분필 던지고 펜을 잡았다… 은폐된 역사 폭로하려

고등학교 생물 교사로 일하며 부업으로 글을 쓰던 작가가
첫 소설로 프랑스 최고 권위의 문학상 '공쿠르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이뤄냈다.
장편소설 '프랑스식 전쟁술'을 써낸 알렉시 제니의 이야기를 들어 보자.

    입력 : 2018.01.19 07:29

    [World Wide Writer] 생물 교사에서 공쿠르상 작가로, 알렉시 제니
     

    프랑스식 전쟁술
    알렉시 제니 장편소설
    유치정 옮김
    문학과지성사ㅣ804쪽
    2만3000원


    겨울비가 가볍게 내린 지난 5일 오후 파리 생제르맹 거리. 20세기 프랑스 문인(文人)들이 즐겨 찾던 플로르(Flore) 카페는 커피잔을 들고 수다 떠는 손님들로 북적였다. 나선형 계단을 타고 카페 2층에 올라서자 얼굴 가득 흰 수염을 기른 중년 남성이 반갑게 손을 내밀었다. 소설가 알렉시 제니(55·Jenni)는 "한국 언론과는 첫 인터뷰"라며 수줍게 미소 지었다.

    제니는 2011년 펴낸 소설 '프랑스식 전쟁술(L' Art français de la guerre)'로 프랑스 최고 권위의 문학상인 공쿠르상을 받았다. 한국어판(유치정 옮김)은 지난해 9월 문학과지성사에서 나왔다. 제니는 전업 작가가 되기 전 고교 생물 교사로 재직했고, 처음 출간한 소설로 공쿠르상을 받았다는 점에서 문학 애호가는 물론 대중의 관심을 크게 불러일으켰다.

    이 작품에서 그는 프랑스군(軍)이 일으킨 알제리 전쟁과 베트남전을 정밀 해부하듯 파고들었다. 포탄 파편에 머리가 찢겨 죽거나 총알에 머리가 관통당한 장면을 비롯해 구체적이고 섬뜩한 전장(戰場)이 무겁게 묘사된다.

    소설에서는 무기력한 일상을 보내는 젊은 화자(話者)가 수묵화를 그리는 빅토리앵 살라뇽이란 노인을 우연히 만나 교류하면서 이야기가 흘러간다. 살라뇽은 10대 시절부터 몸으로 겪은 전쟁에 대해 들려준다. 열일곱 살 때 나치에 저항한 레지스탕스 활동을 시작으로 알제리 전쟁과 베트남 전쟁에서 겪은 참상을 전한다. 헤밍웨이의 '무기여 잘 있거라'를 연상케 하는 전쟁 속 로맨스도 곳곳에서 등장한다.

    2011년 첫 소설로 공쿠르상을 받은 프랑스 소설가 알렉시 제니는 "파리가 유럽의 중심이라지만 내가 살고 있는 리옹이야말로 글을 쓰기에 훨씬 쾌적한 곳"이라고 말했다. /Getty images

    제니는 '프랑스식 전쟁술'로 프랑스 사회의 금기에 도전했다. 프랑스 지식인들은 알제리 전쟁과 베트남 전쟁에 대해 언급하기를 꺼린다. 부조리했던 침략의 역사를 낱낱이 드러내는 데 거부감과 부담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북아프리카 출신 이민자에 대한 프랑스인의 부정적 선입견은 프랑스가 그곳에 가서 저지른 전쟁이 어떤 성격이었는지 몰라서 확대되는 측면이 있다"고 했다. 그는 주먹을 쥐어 허공을 한 번 가르더니 "실제로 벌어진 역사적 사실이지만 남들이 말하지 않으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베트남 전쟁에 미국이 개입했다는 것은 많은 사람이 알지만 프랑스도 그곳에서 전쟁을 했다는 걸 모르는 프랑스인이 많다"고 했다. 프랑스는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에 빼앗겼던 인도차이나 반도의 세 나라(베트남·라오스·캄보디아)를 다시 손아귀에 넣기 위해 1946년부터 1954년까지 인도차이나 전쟁을 일으켰고, 베트남은 이 전쟁의 주무대였다.

    제니는 소설에서 프랑스 역사의 정통파라고 자처하는 드골주의자들을 '거짓말쟁이'로 몰아붙여 논란을 일으켰다. 그는 "2차 대전 이후 프랑스를 새로 만든 능력자라며 사람들이 드골을 존경하지만 기실 드골이 자신의 필요에 의해 역사를 미화한 측면이 있다"면서 "나를 비난한 드골주의자들도 있었지만 개의치 않는다"고 했다.

    알렉시 제니가 보내온 친필 사인. '조선일보 독자들에게, 머나먼 곳에 있는 작가로부터'라고 썼다.

    제니는 과학(생물학)을 공부한 것이 글을 대하는 태도에 영향을 줬다고 했다. 사물과 현상을 관찰하는 태도와 객관성을 확보하는 자세를 배웠다고 했다. 그는 "두뇌나 신경계가 아직 미지의 영역이라 AI(인공지능)를 비롯해 인간의 뇌를 둘러싼 관심이 점점 커지고 있다"고 진단했다. 걱정도 커지고 있다고 했다. "페이스북과 같은 소셜미디어는 알고리즘을 통해 접속자가 관심 있어 할 내용만 보여주고 있어요. AI나 알고리즘에 인간이 의존하기 시작하면 인간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잃어버릴 수 있지요. 관심 있는 것만 보는 사람으로만 이루어진 사회, 그건 굉장히 닫힌 사회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열린 공간을 지향한다는 소셜미디어의 역설이죠."

    제니는 신년을 맞아 "미래를 긍정할 수 있는 한 해가 되면 좋겠다"고 했다. "사람들은 풍요롭게 살면서도 우울해하고 있어요. 그럴 필요가 없지요. 올해는 그런 괴리를 줄이는 한 해가 됐으면 합니다. 믿고 긍정하는 태도가 중요해요."

    그는 보다 인간적인 삶이 가능하도록 새해가 사회의 시스템을 바꾸는 시작점이 되기를 열망한다고도 했다. "인간끼리의 충돌을 막기 위해 집단적 유대를 강화하고, 부(富)의 집중을 막아 돈이 흐르게 하고, 환경을 파괴하는 산업 현장의 관행을 고치는 변혁이 필요해요. 2018년은 변화의 작업이 시작되는 한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세 자녀가 한국 영화·K팝 광팬"

    알렉시 제니는 프랑스 제2의 도시 리옹에서 예수회 재단이 운영하는 고등학교의 생물 교사로 일했다. 스물여덟살 때부터 소설 쓰기를 부업으로 삼았다. 20년간 번번이 출판사 퇴짜를 맞은 끝에 2011년 갈리마르를 통해 처음 출간한 소설 '프랑스식 전쟁술'로 프랑스 최고 권위의 문학상인 '공쿠르상'을 받았다.

    2013년 교직을 그만두고 전업 작가로 변신했다. 리옹의 집에서 글을 쓰고 파리를 오가며 지인들과 교류한다. 그는 "오전 9시가 되면 글을 쓰기 시작하는 '직장인식 글쓰기'를 철칙으로 삼고 있다"고 했다. "혈기 왕성한 젊은 시절엔 소설로 유명세를 얻어보려고 한 게 사실이에요. 힘이 들어갔다고 해야 할까요. 하지만 20년을 해도 안 되니까 그제야 원 없이 '쓰는 즐거움'에만 몰두하기로 했어요."

    제니는 '프랑스식 전쟁술'에서 전쟁을 해부하듯 다뤘지만 군(軍) 생활은 전혀 하지 않았다. 그는 "도서관을 가보고 인터넷을 뒤져보니 군대에 대한 소재가 무한대로 많았다"며 "작가는 부지런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고 했다. 제니는 전업작가로 전향한 이후에는 다작(多作)을 했다. 작년까지 모두 10편을 출간했다. 문학, 과학, 종교를 주된 소재로 삼는다.

    젊은 시절부터 동양 문화에 호기심을 가졌다. 합기도와 유도를 배웠다. 중국 무술인 태극권도 익혔다. 한국 문화를 접해봤느냐고 묻자 제니는 "K팝을 좋아하기에는 나이가 너무 들었다"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세 자녀가 한국 영화와 K팝을 좋아하기 때문에 옆에서 지켜볼 기회가 있었는데, 힘이 넘치는 문화라는 인상을 받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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