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도 찬란한 역사가 있었다는 자부심을 가졌으면…"

역사적 사실에 상상력을 가미한 소설을 팩션이라고 한다.
백제사를 기본으로 한 팩션 ≪사비로 가는 길≫의 작가 이제홍 씨를 만나보자.

  • 김성동 편집장 
  • 편집=유승희

    입력 : 2018.01.11 07:33 | 수정 : 2018.01.11 11:30

    [Top Class: 소설 《사비로 가는 길》 낸 이제홍 작가 "백제는 동양의 로마였다"]
     

    국내 굴지의 대기업에서 부사장 등 임원을 거쳐 만 쉰네 살에 퇴직을 했다. 역사와는 거리가 먼 전공(서울대 무역학과)을 했지만 퇴직 후 그는 그의 고향 부여에 자리 잡았던 백제에 관한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그 연구를 바탕으로 그는 2015년에 소설 《지워지지 않는 나라》를 썼다. 이 소설은 역사적 사실에 상상력을 가미한 이른바 '팩션'이다. 이 팩션의 무대는 백제다. 그는 백제를 '동양의 로마였다'고 주장한다. 삼국시대의 백제가 일본, 중국은 물론 동남아 지역까지 통치한 거대한 제국이었다는 것이다.

    그의 주장이 사실이든 아니든 우리는 우리의 조상이 아시아를 지배하는 강성한 제국을 이뤘었다는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울 것이다. 하지만 그는 상상이 아니라 "'동양의 로마' 백제는 실재했다"고 주장한다. 그가 이번에는 소설 《사비로 가는 길》을 냈다. 역시 팩션인데 그 안의 팩트는 백제사를 기본으로 하고 있다. 부제는 〈지워지지 않는 의자왕〉이다. 사치를 일삼고 여색을 일삼아 백제를 망하게 만든 왕으로 평가받는 의자왕의 마지막 5년이 이 소설의 주요 무대다. "백제의 영광을 복원하는 일을 남은 생의 업으로 삼은" 작가 이제홍 씨를 만났다.

    /서경리 기자

    ─ 대기업의 임원으로 있다가 전업 작가의 길을 택할 때 가장 망설였던 점은?

    "전업 작가라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은 것 같다. 인생 2막을 글쓰기로 시작했다고 하는 것이 맞는 말일 것 같다. 어려서부터 역사에 관심이 많아 회사 생활을 하면서도 언젠가는 해보고 싶다는 꿈을 버리지 않았다. 하지만 정작 나이가 드니 새롭게 역사학을 공부할 엄두가 나지 않아 방향을 바꿔 역사소설에 도전하기로 했다. 고증한 것들을 입증하지 않아도 되니까…. 다행히 내 글이 많은 사람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는다면 고마운 일이겠지만 아직은 전업 작가라는 말을 쓸 염치는 없다.

    회사를 떠날 때 나를 가장 망설이게 만든 것은 소득의 감소였다. 임원으로서 벌어들이는 소득이 사라지는 것이니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다행히 아내가 교직에 있어서 소득이 끊어지지 않았고, 아내도 격려해 줘서 부담을 많이 덜었다. 하고 싶은 것을 더 미루고 싶지 않다는 욕심도 많이 작용했다. 이제는 아이들도 모두 취업을 해서 자기 앞가림을 하니 경제적 부담은 떨쳐버릴 수 있게 됐다."

    ─ 이수그룹에 몸담았었는데 창업자인 김준성 전 회장도 공직 퇴직 후 소설 쓰기를 시작했다. 혹시 그 영향도 받았나.

    "이수그룹에 있는 동안 김준성 회장님의 소설들은 다 읽었을 것이다. 물론 의무감도 있었을 것이다. 김 회장님을 지금도 존경하고 있지만 이 질문을 받기 전까지는 글을 쓰는 것에 대해 그분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 이수그룹 기획실 임원으로 근무할 때 김 회장님의 지시로 《21세기 문학》이라는 순수 문예지를 창간하고 '21세기 문학상'을 제정하는 일에 깊숙이 관여했다. 그때 내 모습은 전형적인 회사원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실무를 지휘하면서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그 무렵부터 책을 쓰고 싶다는 꿈을 꾸고 은퇴 후 두 권쯤 책을 남기고 싶어졌다. 어쩌면 생뚱맞은 이런 꿈을 꾸게 된 것도 김 회장님의 영향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단편적인 기록이라도 백안시하지 않았으면

    ─ 백제는 물론 우리 삼국시대의 자료를 모으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다. 자료는 주로 어디서 구했고, 참고한 자료들은 무엇이었나.

    "삼국시대, 특히 백제의 자료를 찾는 것은 말씀하신 대로 쉽지 않았다. 1차적으로는 우리나라 역사서들을 참고했고, 이도학 교수나, 노중국 교수 같은 분들의 저서나 논문들을 읽었다. 또한 'DB pia'라는 학술논문 전문 사이트에서 관련된 논문들을 찾아 읽었다. 그 외에 인터넷에서 자료의 편린을 많이 얻었다. 예컨대 '당나라 전기소설'의 하나인 《규염객전》을 통해 규염객이라는 인물을 등장시키고 '묘도열도'에 대한 글들을 읽으며 지형을 설계하는 방식으로 소설의 골격을 만들었다. 인터넷에서 얻은 편린을 발판으로 상세 자료를 찾아가는 작업은 소설을 써 가는 동안에도 멈추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어 소설의 스토리를 네 번 바꿨다."

    ─ 《사비로 가는 길》도 그런 방법으로 구상했나.

    "처음 《사비로 가는 길》을 구상할 때 군산에서 부여까지 금강을 따라 3일간 걸었다. 나당연합군과 백제의 싸움을 머리에 그리면서 그 길을 따라 전해오는 백제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당나라 소정방이 안개 속에서 길을 잃고 5명의 노인에게 사비로 가는 길을 물었다는 군산의 오성산, 백제 무왕이 쌓았다는 어래산성이 있는 익산시 웅포면 등에서 새로운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다. 또 부여군 세도면 반조원리가 나당연합군이 만나 사비성을 공격한 곳이라 해서 일부러 찾아가 봤다. 그리고 합리적 추론 결과 와전된 이야기라고 결론짓기도 했다. 의자왕이 끌려갈 때 백성들이 몰려들었다는 유왕산도 가보고 논산시 강경읍과 부여군 석성면 사이에 펼쳐진 너른 들판도 바라보며 옛일을 상상해 보기도 했다. 걸을 수 있는 곳은 걸어봤고 그렇지 않은 곳은 상상해서 소설의 디테일을 채우려고 했다."

    ─ "백제는 동양의 로마였다"는 주장에 대해 황당하다는 사람도 많을 텐데, 그런 반응을 접할 때 어떻게 대응하나.

    "1970년대에 《백제사》를 펴낸 문정창이라는 분이 있다. 그분이 '백제는 로마제국 같은 대제국'이라는 취지로 어느 신문과 인터뷰한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아마 내가 중학교나 고등학교 다닐 때였을 것이다. '동양의 로마제국'이라는 단어는 그날 이후 내 머릿속에 깊숙이 자리 잡았다. 그때 이후 틈나는 대로 이런 글들에 더욱 많은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제대로 된 사료가
    남아 있지 않다고 하여

    단편적인 기록들을
    백안시하지 않길

    소설 《사비로 가는 길》작가 이제홍

    제대로 된 사료가 남아 있지 않은 백제를 놓고 '동양의 로마제국' 운운하는 것에 논란이 많을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단편적인 기록들을 백안시하는 일도 없었으면 좋겠다. 예를 들면 《일본서기》에 '백제 왕(聖王)이 부남의 특산물과 노예 2명을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 부남은 지금의 캄보디아를 가리킨다. 중국의 《남제서》나 우리나라의 《삼국사기》에 '백제 동성왕이 사법명 등으로 하여금 북위의 군사를 물리치게 했다'는 기사가 있다. 이런 기록들은 백제의 대외활동, 특히 해상활동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기록들이다. 이에 반해 중국 배는 하나같이 돛이 없고 사람의 힘만으로 운항했다. 당연히 먼바다로 나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백제는 중국 사서에 기술된 것처럼 중국에 영토가 있었으니 중국과 한반도를 연결하는 항로가 당연히 존재했을 것이다."

    ─ 백제가 동양의 로마였다는 근거를 구체적으로 쉽게 몇 가지 예를 들어준다면?

    "중국의 역사책인 24사 가운데 《송서》, 《양서》, 《남사》 등에 '고구려가 요동을 빼앗자 백제는 요서·진평 2군(郡)을 소유하고 직접 백제군을 두었다'는 기록이 있다. 우리나라 《삼국사기》나 중국의 《남제서》에 '이해(서기 490년)에 위(북위)가 기병 수십만을 동원하여 백제를 공격했으나 백제가 장군 사법명, 찬수류, 해례곤, 목간나를 보내어 크게 격파하였다'라는 기록도 있다. 《북사》나 《주서》에는 ‘백제가 진대로부터 시작하여 송, 제 양대에 양쯔강 좌우를 차지하고 있었다’라는 기록도 있다. 이외에도 많은 중국 사서에 백제가 중국에 영토를 갖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물론 한반도 서남부에도 백제의 영토가 있었고 일본도 직·간접으로 백제의 영향권 아래 있다는 기록들이 산재해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서해가 백제의 영향권 아래 있었다는 추론이 가능하지 않은가?

    아쉬운 것은 우리나라의 많은 학자가 중국의 기록에 대해 혹은 《일본서기》의 기록에 대해 신빙성이 떨어진다며 수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것들은 우리의 기록이 아니지 않은가? 우리가 왜곡한 것이 아니지 않은가?"

    /서경리 기자

    삼국시대 전반은 백제가 지배적 위치였다

    ─ 혹시 이 작가께서는 고구려, 신라, 백제 중 백제가 가장 융성했다고 보나?

    "삼국시대 각국의 인구에 대한 기록을 찾아본 적이 있다. 《삼국사기》나 《신당서 열전 동이전》에 백제의 가구 수가 76만 호, 고구려는 69만 호라는 기록이 있다. 가구당 5명이 산다고 가정하면 백제 인구는 380만 명, 고구려는 350만 명쯤 됐을 것이다. 숫자 자체는 과장되어 있을지 모르지만 사람 살기 좋은 백제의 인구가 영토는 훨씬 넓지만 사람이 거주하기에 척박한 고구려와 인구가 비슷했을 것이라는 추측은 가능할 것이다.

    영토 면적은 차이가 나면서 인구가 비슷하다면 백제의 인구밀도가 고구려보다 높았을 것이고, 인력 동원의 효율성도 백제가 나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런 배경 때문에 삼국시대 초기에는 백제의 근초고왕이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전사시킨 것으로 상징되듯 백제가 고구려보다 강성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런 역학관계는 광개토대왕의 등장과 함께 역전된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에 후연을 복속시키는 등 강력한 정복전쟁을 벌이면서 고구려의 인구가 비약적으로 늘어났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따라서 광개토대왕이라는 영걸이 급격히 늘어난 인구를 바탕으로 국력을 크게 신장시켰고, 강화된 국력을 바탕으로 장수왕이 백제 개로왕을 참수하면서 두 나라의 역학관계가 역전되었을 뿐만 아니라 백제는 예전의 위력을 회복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삼국시대 전반은 백제가, 후반은 고구려가 지배적 위치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그렇게 본다면 백제는 왜 패망했나.

    "백제는 북방계 이주민과 남방계 토착민이 결합된 국가라는 게 일반적 정설이다. 동의한다. 한성백제 시대 토착귀족들은 장수왕이 개로왕을 죽이고 문주왕이 웅진으로 천도하면서 세력이 크게 꺾였을 것이다. 그들은 문주왕을 따라 웅진으로 이주한 한성귀족들은 웅진귀족과 권력을 나눠 가져야만 했을 것이다.

    웅진에서 전열을 정비한 백제는 또다시 사비로 천도한다. 이 과정에서 지배층에 사비 토착귀족들도 편입되면서 신권이 더욱 강해졌을 것으로 보인다.

    사람 살기 좋았던
    백제의 패망이유…

    귀족들의 세력으로
    백제 왕권 강화 실패

    이처럼 귀족들의 세력이 팽배해지자 백제의 역대 왕들은 끊임없이 왕권 강화를 노렸지만 대부분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의자왕이 태자로 책봉된 나이가 30대 후반으로 추정되는데 이처럼 늦은 나이에 태자가 됐다는 것은 귀족들의 입김이 작용한 결과였을 것이다. 의자왕 역시 대외적 성공을 바탕으로 왕권 강화를 노렸는데 그 결과가 《일본서기》에 나오는 의자왕의 정변(서기 655년)이다. 일본서기는 이 정변의 목적이 백제의 명문 귀족들인 8대 대성들을 제압하기 위함임을 명백히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정변을 통해 왕권은 확고해졌지만 귀족들과의 관계는 더욱 껄끄러워진 것으로 보인다. 많은 학자가 나당연합군에게 백제가 무기력하게 패한 이유로 귀족들의 비협조를 드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이처럼 내부적으로 반목이 극심한 가운데 김유신의 치밀한 간첩공작도 효과를 발휘한 것으로 보인다. 백제는 개로왕 때는 고구려의 장수왕이 보낸 승려 도림에게, 의자왕 때는 첩자인 조미압에게 철저히 농락당한 셈이다. 개인적 생각으로 백제는 개로왕 때 이미 망하여 한성백제 시대를 마감하고 두 번째 백제는 의자왕 때 망했다고 본다."

    ─ 역사가 기록한 의자왕과 이 작가께서 고증을 통해 밝혀낸 의자왕은 어떻게 다른가.

    "의자왕에 대한 기록은 서기 655년을 전후로 확연히 달라진다. 이전에는 '해동증자'로 대변되듯 긍정적인 평가가, 그 이후에는 사치와 방탕에 빠진 부정적 평가가 주류를 이룬다. 흥미로운 것은 의자왕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가 정사보다는 야사에서 주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정사에서는 백제가 망할 무렵 나타나는 수많은 유언비어가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그 외에도 태자궁을 화려하게 수축하였다느니, 요녀의 말만 듣고 정사를 그르쳤다(대당평백제국비명 ·大唐平百濟國碑銘)는 기록 등 단편적인 내용뿐이다.

    /서경리 기자

    일반적으로 의자왕을 부정적으로 인식시키는 것 가운데 하나가 삼천궁녀다. 다행히 요즘은 삼천궁녀가 허구라는 인식이 많이 퍼졌다. 소정방이 백제 수호룡을 백마를 미끼로 잡았다는 조룡대 전설은 소정방을 미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만들어진 것이 틀림없다. ‘왜 사비를 코앞에 두고 진군을 멈추었는가?’라며 질책하는 황제(당나라 황제)의 조서를 반포했다고 해서 붙여진 반조원(頒詔院)이라는 지명은 헛웃음마저 나오게 한다.

    이에 반해 의자왕을 긍정적으로 보게 하는 우여나 유왕산 전설 등은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우여는 의자왕이 즐겨 먹던 웅어라는 생선인데 소정방이 이 말을 듣고 잡아오라 명하자 모두 사라졌다가 의자왕이 당나라에 끌려갈 때 타고 가던 뱃전에 머리를 부딪치며 죽었다고 해서 의어라고 불렀다고 한다. 지금 부여지방에서는 우여라 부르며 4월의 별미로 알려져 있다. 유왕산도 의자왕이 끌려가는 게 안타까워 마지막 모습이라도 보려고 백성들이 올라가 대성통곡했다는 작은 언덕이다. 지금도 부여지방에 전해오는 ‘유왕산놀이’가 여기에서 비롯됐다. 이외에 의자왕이 탄 배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사람들이 모여 절을 했다는 망배산 전설도 있다.

    의자왕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는 전설이나 《삼국유사》의 기록에서 많이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백제부흥군 활동이 치열하게 전개되자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신라나 당나라가 지어낸 이야기가 많이 포함되어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 꺼풀을 벗겨내면 의자왕의 진면목이 드러날 것이고."

    어린 시절부터 들은 '찬란한 백제 문화'

    ─ 이 작가의 고향이 부여다. 백제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가 고향 때문인가.

    "어려서 자란 곳이니 가장 크게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고향 집이 정림사지 바로 앞에 있었다. 정림사지 오층석탑이 놀이터였고, 주변의 넓은 공간은 당시로는 보기 드문 잔디구장(?)이었다. 이곳에서 공을 차고 뛰어놀았다. 그때 많이 듣던 말이 '찬란한 백제 문화'였다. 그 말이 낯설었다. 부여 어디를 가 봐도 백제의 유적이라곤 정림사지 오층석탑 하나뿐인데 무엇을 보고 찬란하다고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조금 더 자란 뒤에는 찬란한 백제 문화가 땅속에 묻혀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따라서 부여 땅을 뒤엎어 보면 '찬란한 백제 문화'가 모습을 드러낼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이런 이유로 대학에서 역사, 특히 고고학이나 금석학을 공부하려고 한 적도 있다."

    ─ 혹시 범위를 넓혀서 백제만이 아닌 삼국시대 전체로 상상과 고증의 외연을 넓혀갈 생각은 없는지.

    "할 수만 있다면 찬란했던 우리 역사의 한 부분을 그려보고 싶다.

    비록 과거 한때일지라도 주변을 아우르던 시대가 우리 역사에 있었다는 자부심을 국민이 가졌으면 하는 생각을 종종 한다. 자부심을 느끼는 역사를 갖고 있다면 지금 그리고 미래에도 내 나라에 대해 자부심과 자신감을 갖고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터키 여행을 하며 비록 지금은 상대적으로 낙후됐지만 언젠가는 옛날 좋았던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는 믿음과 자부심을 가진 사람들을 만났었다. 우리에게도 이런 정신적 자산이 있으면, 더욱 많이 쌓을 수 있다면 우리의 미래가 더 나아질 것으로 생각한다. 능력이 된다면 백제뿐만 아니라 어느 시대든 찬란했던 역사의 한 부분을 떼어내 글로 써보고 싶다."

    ─ 이 작가께서 낸 두 권의 소설을 팩션이라고 한 이유는 역사적 고증에 자신 없는 부분들이 있어서인가.

    "모든 것을 고증해 낼 수 있다면 역사학을 하려고 했을 것이다. 그럴 만한 지식이 없고 고증할 만한 자신이 없기 때문에 역사소설을 쓴 것이다. 지인들에게도 얘기한다. 내가 사실관계를 모두 고증할 수 있다면 보고서나 연구논문을 썼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 있는 공부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소설로 방향을 바꾼 것이다. 소설은 고증하지 않더라도 전후관계가 개연성만 있으면 받아들여지지 않는가? 때로는 팩트를 무시하고 순수한 상상력만으로 소설을 쓰고 싶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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