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측 못한 '돌연변이'가 역사를 바꿨네

채륜의 종이는 부산물인 수피지를 지나치지 않고 개발한 것이다.
종이의 발명은 인류에게 기록 문화를 촉진해 문명 발전의 원동력이 됐다고 여겨진다.
이처럼 거대한 변화를 불러일으킨 것은 대개 사람의 의도에서 몇 발짝 벗어난 부산물이다.

    입력 : 2017.12.22 07:14

    [Books]
     

    문명은 부산물이다
    정예푸 지음
    오한나 옮김
    378|528쪽|2만2000원


    우리는 종이를 처음 발명한 사람이 중국 후한의 채륜(蔡倫)이었다고 알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인류의 기록 문화를 촉진해 문명 발전의 원동력이 됐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채륜 이전의 '고대 종이'는 중국에서만 아홉 번 발견됐다. 그것들이 모두 애초에 필기를 위한 발명품이었을 것 같진 않고, 그냥 포장이나 받침 용도의 두루마기 정도였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 사람들은 '아, 이 두루마기가 글씨를 쓰기에도 좋구나!'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그럼 채륜은? 그가 과연 '문명의 유구한 발전'을 내다보고 종이를 본격적으로 발명하는 사명을 맡았던 것일까. 전 베이징대 사회학과 교수이자 베스트셀러 작가로 2016년 이 책(원제 '文明是副産品')을 쓴 저자 정예푸(鄭也夫)는 이렇게 본다. 채륜은 고향인 옛 초(楚)나라 땅에서 묘족(苗族)들이 나무껍질로 만드는 헝겊인 수피포(樹皮布)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수피포 제작 과정에서 부산물인 '수피지'가 쉽게 나왔고, 여기서 영감을 얻은 채륜은 그때까지 글자를 적기 위해 쓰던 비단만큼이나 매끄럽고 윤이 나는 고품질 종이를 개발했다는 것이다. 부산물이 역사를 바꾼 셈이다.

    후한의 채륜이 나무껍질 등을 이용해 종이를 만드는 모습을 그린 현대 중국의 상상도. /조선일보DB

    저자는 "문명은 계획할 수도 없으며 인류의 목적적 행위로 결정되지도 않는다"고 말한다. 거대한 변화를 불러일으킨 것은 대개 사람들의 의도에서 몇 발짝 벗어난 부산물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족외혼(族外婚), 농업, 문자, 제지(製紙), 조판 인쇄, 활판 인쇄의 여섯 가지 사례를 통해 이를 논증한다.

    예를 들어 다른 씨족이나 부족으로부터 배우자를 데려오는 제도인 족외혼은 근친혼의 생물학적 위험을 방지하려는 거시적 계획이 아니라 어려서부터 익히 봐온 이성에게 별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성적(性的) 요인과 촌수가 흐트러져 질서가 잡히지 않는 일을 우려한 정치제도적 요인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부산물이 인류 구성원의 교환과 협력 관계라는 엄청난 결과를 만들어냈다는 얘기다.

    이 책이 강조하는 것은 위대한 군주나 정책이 아니라 인간과 부산물의 '상호 작용'이야말로 문명을 변천시켜 온 진짜 원동력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인류가 농업에 종사하면서 그 농업이 인간을 한자리에서 떠나지 못하도록 붙들어 놓았다. 인공지능(AI)을 만들어 놓고서도 그 예상할 수 없는 효과에 두려워하는 요즘 인류를 보면 고개를 끄덕일 만하지 않은가. 중국 책으로선 드물게 중화주의를 벗어난 이 책은 새로운 생각을 권한다. 문명의 기원을 따지며 근거 없는 자신감을 가지기보다는 인간 자체를 냉철하게 바라보라는 것, 그리고 역사가 반드시 진보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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