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아인이 부른 전쟁, 페미니즘 2.0

배우 유아인과 네티즌의 온라인 설전이 다양한 담론을 촉발시켰다.
단순한 개인의 의사 표현을 넘어 '페미니즘'이라는 사회적 이슈에 닿았기 때문.
이를 통해 한국 페미니즘이 걸어 온 짧은 역사를 되돌아본다.

    입력 : 2017.12.27 07:34

    [이슈]
     

    배우 유아인이 작정하고 선전포고한 페미니즘 전쟁이 점점 가열되는 양상이다. 한 네티즌과 '어이가 없는' 상황에서 시작된 설전은 의외의 상황들과 맞부딪히면서 다양한 담론을 낳고 있다. 진짜 페미니즘과 가짜 페미니즘 논쟁, 익명의 다수가 실명의 개인에게 가하는 온라인 테러리즘 논쟁 등. 처음엔 몇 번 저러다 잠잠해지겠지 싶었다. 하지만 형세가 심상치 않다. 그동안 온라인 공간에서 끓어오르던 페미니즘 담론들이 폭발한 모양새다. 유아인이 촉발시킨 논쟁은 온라인에서 찬반 양론으로 갈려 난타전으로 치닫고 있다.

    설전(舌戰)의 진행 상황을 간략하게 보자. 이번 사태는 '애호박 게이트' 또는 '애호박 대전'으로 불린다. 지난 11월 18일 한 트위터 사용자가 유아인을 두고 "20미터 정도 거리를 두고 보기엔 좋은 사람인 것 같지만, 친구로 지내기엔 조금 힘들 것 같다"고 한 말이 발단이 됐다. 이 말 뒤에 "막 냉장고 열다가도 채소칸에 뭐 애호박 하나 덜렁 들어있으면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갑자기 나한테 혼자라는 건 뭘까? 하고 코 찡끗할 것 같음"이라고 하자 유아인이 댓글에 "애호박으로 맞아봤냐(코 찡끗)"라고 달았다. 일면식 없는 두 사람의 대화는 이렇게 시작됐다.

    여기까지는 문제없었다. 한 익명의 네티즌이 자신의 SNS에 유명 배우에 대한 호불호를 자유롭게 피력한 것이었고, 우연히 이를 본 배우가 기분이 상해 농담처럼 댓글을 단 게 전부였다. 하지만 이 글이 원래 맥락을 벗어나 온라인 게시판에 옮겨지면서 사태가 커졌다. '애호박' 표현은 '여혐(여성혐오)' 발언으로 둔갑했고, '맞아봤냐'는 표현에는 '폭력적'이라는 반응이 붙었다.

    배우 유아인.

    유아인은 순식간에 여성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여혐주의자 내지 한남충(蟲·한국 남자를 비하하는 표현)으로 취급됐다. 유아인은 자신을 향한 날 선 공격에 특유의 논리로 맞섰다. 논리의 공방전은 복잡하고 길다. 유아인의 주장을 요약하면 이렇다. '나는 페미니스트다. 페미니스트에는 가짜와 진짜가 있다. 증오를 포장해 왜곡된 집단의식을 피력하는 이들은 가짜 페미니스트이다. 나는 이들과 그 방조자들을 향해 전면전을 하겠다.'

    유아인을 향한 찬반 양론은 갈린다. 남성은 대부분 유아인을 지지하지만 여성 내에서는 찬반이 갈린다. 여초 커뮤니티 안에서도 갈리고, 심지어 이른바 진보언론 진영에서조차 갈린다. 여성신문에서는 유아인을 향해 "여성들의 문제제기를 '자신을 향한 혐오'로 이해하며 '메갈짓'으로 낙인찍으면서도 '페미니스트'를 자임하는 모순적 태도로 비판을 받고 있다"며 "누가 진짜·가짜 페미니스트를 규정하는가"라고 비판했고, 한 진보 신문에서는 "페미니즘은 캐논이 아니다. 반박이 곧 신성모독일 수는 없다"며 극렬 페미니스트를 공격한 유아인을 지지했다. 한 보수 성향 일간지에서는 방향을 틀어 '유아인을 보며 언론을 돌아본다'는 칼럼을 썼다. 군중에 영합하지 않고 온몸을 던져 왜곡된 집단의식과 일전을 불사하는 유아인의 태도에 주목하면서 언론을 향해 '정론직필을 믿는가'라는 자기반성적 질문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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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우 유아인이 자신의 SNS에 올린 페미니즘 관련 글.

    피할 수 없는 조류, 페미니즘

    유아인의 애호박 게이트를 보며 페미니즘의 새로운 흐름을 읽는다. 최근 몇 년 전부터 페미니즘은 피할 수 없는 큰 이슈였다. 인정하든 안 하든 페미니즘은 사회 곳곳을 파고들어 깊숙이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굳이 '페미니즘'이라는 간판을 달지 않아도 여러 갈래의 표피를 입고 일상에 스며 있다. 여혐 vs 남혐의 첨예한 갈등 양상으로 드러나기도 하고, 성 감수성이 예민해진 2030세대의 사이다 발언으로도 드러난다. 한국여성의전화나 여성노동법률지원센터에 성희롱 상담 건수가 급증한 현상으로도 나타나고 "이제 그런 말 함부로 하다가는 큰일 나"라는 아재 세대의 발언에서도 읽는다. 확실히 여성 남성 할 것 없이 커다란 페미니즘의 조류 한복판에서 살고 있다.

    /일러스트=박상훈

    시장도 반응한다. 서점가에는 페미니즘 서점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나오고 있다. '페미니즘' '여혐'이라는 키워드로 출간된 서적을 검색해 보면 최근 2년간 100권이 넘는다. 소설 '82년생 김지영'에서 절정을 찍은 페미니즘 관련 서적은 그 이후에도 사그라들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제목도 다채롭다. '페미니스트로 살아가기' '나는 여성 징병제에 찬성한다' '페미니스트가 매우 불편해할 진화심리학' '페미니스트 파이트 클럽' '엄마는 페미니스트' 등. 페미니스트로서의 대응 논리를 제공하는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입이 트이는 페미니즘'도 있다.

    그런가 하면 페미니즘을 테마로 한 기획 소설 '현남 오빠에게'도 출간됐다. 소설은 '82년생 김지영'의 작가 조남주를 비롯, 최은영, 김이설, 최정화 작가 등 7인의 작가가 동참했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여성으로 살아가는 일상을, 당연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여겨져온 성차별의 풍경을 담담하게 그려낸 책이다. 페미니즘 담론을 공적 공간에서 사적 공간으로 옮겨온 소설들은 한국 사회가 얼마나 광범위하게 성차별을 자행해왔는지를 예리하게 갈파해낸다.

    이런 분위기는 도서관으로도 확산 중이다. 지난 11월 10일 인천 부평구에는 여성주의 도서관 '랄라'가 들어섰다. 원래 '신나는 어린이도서관'으로 운영하다가 여성주의 도서관으로 탈바꿈했다. 페미니즘 관련 서적을 대거 들여놓고, 여성주의 영화도 상영하게 된다. 서울도서관은 '우리 시대의 페미니즘'을 주제로 11월 목요대중강좌를 열었다.

    '페미굿즈'로 불리는 페미니즘 상품들도 빼놓을 수 없다. 페미니즘을 표방한 엽서, 휴대전화 케이스, 탁상달력, 에코백, 스티커 등이 늘고 있다. 페미굿즈는 일상에서 자기만의 목소리를 내는 수단이다. '가치소비'를 선호하는 젊은이들의 소비방식으로 호응이 높다. 페미굿즈를 생산하는 주체 역시 다양하다. 여성단체뿐 아니라 자발적으로 모인 예술가 그룹에서도 생산하고, 크라우드펀딩을 통해서도 생산해낸다. '페미디아'라는 여성주의 정보생산자조합도 있다.

    "나는 페미니스트"를 표방하는 남성도 늘고 있다. 서민 단국대 의과대 교수가 대표적. 지금은 폐쇄된 급진 페미니스트 커뮤니티인 메갈리아의 회원이었던 그는 최근엔 '여혐, 여자가 뭘 어쨌다고'라는 책을 냈다. 그의 페미니즘은 실천으로도 연결됐다. 대학에 '여성과 의학'이라는 강좌를 열었고, 여성학자가 진행하는 문화강좌를 찾아다니며 수강했다. 젊은 남성 사이에도 페미니스트를 지향하는 이들이 종종 보인다. 20대 중반 대학생 이모씨는 여자친구의 권유로 페미니즘 서적을 독파했다. 여자친구는 "나는 우리 엄마처럼 살고 싶지 않다. 하지만 가부장제 질서에서 살아온 남성들은 여성이 일상에서 느끼는 성차별을 감지하지 못한다. 나와 일상을 함께하는 남성은 꼭 페미니즘 서적을 읽어서 여성의 시선으로 세상을 볼 수 있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페미니즘 서적을 난생처음 읽은 서민 교수와 대학생 이모씨의 반응은 같다. "세상을 다르게 보는 법을 알게 됐다."

    여성혐오는 진화된 페미니즘

    1980년대에 본격 촉발된 한국 페미니즘 운동은 한때 급진적 소수가 점유한 어젠다였으나 지금은 달라졌다. 어느 정도 보편화됐고 일상화됐다. 그렇다면 현재 대한민국의 페미니즘 운동은 어느 단계에 와 있을까. 큰 흐름으로 페미니즘의 현주소를 진단할 수 있는 학자를 찾기는 쉽지 않았다. 여자 대학에서 여성학이 교양필수인 시대가 있었으나 지금은 거의 폐강됐다. 여성의 지위 상승을 위해 목숨 걸고 투쟁해야 했던 시기는 지났다는 얘기도 된다. 장명선 이화여대 젠더법학연구소 교수는 "여성혐오는 페미니즘 발전단계의 또 다른 형태"라며 이렇게 말했다.

    세계 최고의
    성평등 국가로 꼽히는
    노르웨이와 스웨덴은

    한때 급진 페미니즘이
    그 어느 나라보다 강력했다

    "여성혐오와 여성차별은 다르다. 한때는 고용에서의 차별 등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성차별과 싸웠다. 여성혐오는 여성차별이 어느 정도 완화되어 여성의 지위가 상승된 단계에서 나타나는 개념이다. 남성이 보기에 여성들이 예전 같지 않고 맞먹는 존재일 수 있다고 느껴지면서 혐오 감정이 생긴다. 가부장적 사고방식이 혐오로 나타나는 거다. 분명 페미니즘의 진화로 보인다."

    페미니즘이 보편화된 만큼 목소리의 층위도 다르다. 페미니즘 격론장을 들여다보면 분파가 나뉜다. 메갈리아와 워마드로 대표되는 극렬 페미니스트와 일상에서 "그건 성차별입니다" "성희롱입니다"라며 손들고 이의를 제기하는 온건파 페미니스트. 후자가 훨씬 많다. 후자들의 눈에는 전자가 불편하고, 전자들의 눈에는 후자가 비겁하고 답답해 보인다. 온건파 페미니스트는 메갈과 워마드식 페미니즘을 뒤틀린 페미니즘, 변질된 페미니즘, 시대착오적 페미니즘으로 보는 경향이 강하다. 하지만 온건파 역시 극렬파에 대한 반감으로 강화된 부분이니만큼, 이들에 빚진 부분이 많다고 봐야 한다. 일명 '애호박 대첩'으로 불리는 유아인발(發) 페미니즘 전쟁의 이면에는 이런 격돌이 있다.

    남혐 대 여혐의 갈등은 치열하다. 눈에 보이는 행위가 수반되는 '차별'과는 달리 '혐오'는 드러나지 않게 싫어하는 감정이니만큼 남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무조건 싸잡아 비난하는 식이다. 서민 교수는 "남성 페미니스트로 불리면서 안티들이 급증했다"며 이렇게 말했다. "원래 나는 청정구역 같은 사람이었다. 안티가 없었다. 그러다 메갈리아 회원이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안티가 급증했다.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인신공격식 댓글이 많다. 한국에서는 페미니즘 편에 서는 것이 굉장히 어렵다는 걸 느낀다." 어려운 길을 자처한 이유를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남성은 잠재적 범죄자다. 나 역시 공범이었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부끄러웠다. 일종의 부채의식에서였다."

    서민 교수는 기생충 박사로 유명한 학자다. 그는 기생충 중 주혈흡충 이야기를 꺼냈다. "주혈흡충이라는 기생충이 있다. 사람의 혈관 안에 사는데, 매해 10만명 가까이 주혈흡충으로 인해 죽는다. 주혈흡충이 이렇게 생명력이 강한 비결은 암컷과 수컷의 사이가 좋기 때문이다. 암수 사이의 금실이 좋지 않은 기생충들은 거의 대부분 멸종했다. 여혐은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기현상이다. 이렇게 여혐이 계속되다간 우리나라도 조만간 멸종할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그 조짐이 나타나고 있는 것 같다."

    이나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한국 페미니즘의 짧은 역사를 지적한다. 서구가 200~300년간 싸워서 쟁취한 법, 제도, 문화, 성적권리 등의 어젠다들이 한꺼번에 들어오다 보니 제도가 의식을 따라가지 못해 부작용이 따랐다는 것. 그러면서 이 교수는 현재 여성운동은 1980~1990년대에 조직된 집단이 아니라 자율적으로 의식화된 이들의 느슨한 연대에 의해서 발생했다고 말한다. 평등의식을 몸으로 체화한 개인이 온라인에서 문제의식을 확장한 '아래로부터의 페미니스트 운동'이라는 얘기다.

    이퀄리즘은 시기상조

    '아래로부터의 페미니즘'에 불씨를 댕긴 건 강남역 묻지마 살인사건이었다. 이 사건 이후로 여성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무참히 희생될 수 있었다는 공포심을 갖게 됐다.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 저자 이민경씨는 책을 쓴 계기에 대해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이전과 같을 수 없었다"며 이렇게 말한다. "저도 한때 페미니스트라 말하는 여성들을 이상하게 생각하고 거부감을 느꼈습니다. 그러다 다시 생각하니 그것은 '틀을 이탈한 여성'에게 느끼는 혐오감과 비슷했습니다. 너무 드센 여성, 너무 활발하게 사회생활을 하는 어머니, 옷을 너무 짧거나 너무 길거나 너무 화려하게 입은 여성 등."

    강남역 사건은 페미니즘의 조류를 확산시키는 데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이 사건 이후 공기처럼 존재하고 당연하게 여겨졌던 성차별적 언동에 대해 "그것은 당연하지 않습니다"라며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동안 느끼지 못했던 구조적 모순에 새롭게 눈뜬 이들도 많다. 페미니스트는 일부 과격분자들의 사상이 아니라 나의 이야기였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2016년 5월 21일 오후 서울 강남역 '묻지마 살인사건' 피해자 여성을 추모하는 추모집회가 열려 참석자들이 사건현장까지 침묵의 추모행진을 하고 고인을 추모하는 가운데 강남역 10번출구에는 고인을 추모하는 시민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이진한 기자

    혹자는 '젠더 이퀄리즘'을 제안한다. 페미니스트라는 용어에 대한 거부감이 상당하니 '양성평등'이라는 용어로 대체하자는 것. 하지만 페미니스트들은 대체로 "아직은 그 단계가 아니다"라고 입을 모은다. 급진 페미니스트든 온건 페미니스트든 마찬가지다. 세계 최고의 성평등 국가로 꼽히는 노르웨이와 스웨덴은 한때 급진 페미니즘이 그 어느 나라보다 강력했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

    한국의 현실을 보자. 영국 경제지 '이코노미스트'가 발표하는 '유리천장 지수(Glass Ceiling Index)'를 보면 한국은 조사대상 29개국 가운데 29위를 차지, 4년 연속 꼴찌의 불명예를 안았다. 유리천장 지수는 노동시장에서 성평등이 얼마나 이루어지는지를 따지는 지표다. 1위는 아이슬란드, 2위는 스웨덴, 3위는 노르웨이, 4위는 핀란드, 5위는 폴란드였다. 해당 조사에서는 한국에 대해 "이 나라에서 여성 국회의원의 비율은 15%에 불과하고 관리직이나 대기업 임원에서도 여성을 찾아보기 힘들다"고 평가했다.

    양성평등 수준은 어떤가. 조사대상 142개국 중 117위로 역시 최하위 수준이었다. 남녀 간 임금격차도 그렇다. 여성의 임금이 남성의 60%로 OECD국가 중 1위였다. 가사노동 부담은 맞벌이 여부와 관계없이 가사와 양육을 여성이 대부분 담당한다. 이런 현실에서 양성평등 운운은 요원한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장명선 교수는 최근의 시끌벅적한 페미니즘 담론 자체를 긍정적 징후로 본다.

    "유아인씨가 일으킨 페미니즘 논쟁이 일면 반갑다. 다양한 상황에서 다양한 목소리가 나오면서 논의가 되는 것은 보편화되어 간다는 증표다. 페미니즘은 이렇게도 저렇게도 읽힐 수 있다. 획일적 목소리는 성공하지 못한다. 더 많은 사람들이 더 다양한 목소리를 내서 페미니즘의 지평을 넓히면 좋겠다."

    <본 기사는 주간조선 2486호에서 발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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