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보수의 현재·사피엔스의 미래… 우리는 이런 책들을 선택했다

조선일보가 선정한 '2017 올해의 책 10권'은 무엇일까?
다양한 분야의 위원들이 참여한 이번 추천에서는 '글 잘 쓰는 전문가들'의 작품들이 유독 강세를 보였다.

    입력 : 2017.12.08 07:15 | 수정 : 2017.12.08 11:13

    [2017 올해의 책 10]
     

    올해의 책을 2회에 걸쳐 싣는다. 이번 주는 '2017 올해의 책 10', 다음 주는 '2017 올해의 저자 10'. 첫 회가 책이라면, 다음 주는 사람이다. 상대적으로 번역서 강세인 국내 출판 시장에서, 참신한 국내 필자의 발견을 시도하고 응원한다는 취지가 '올해의 저자 10'에 있다. '2017년 올해의 책 10'은 작가·학자·번역가·출판평론가·출판사 대표·서점 대표 등 전문가 50명이 각 5권씩 추천한 책 중에서 조선일보 Books팀이 최종적으로 선정했다. 출판사 대표의 경우 5권 중에서 자사(自社) 책은 1권만 추천할 수 있도록 제한했다. 대상은 2016년 12월~2017년 11월 출간 도서. 지난해 10월 출간된 '82년생 김지영'은 이 기준에 따라 포함되지 않았다.

    10권 중에서 가장 많은 지지를 얻은 책 중 두 권을 커버 스토리로 싣는다. 인류는 어디서 와 어디로 가는지를 큰 그림으로 완성한 이스라엘 히브리대 유발 하라리 교수의 '호모데우스'와 가난한 백인 노동 계층이 왜 이해 관계가 다른 것으로 보이는 트럼프 대통령을 지지하는지에 대한 J D 밴스의 구체적 고백 '힐빌리의 노래'다. 소설가 정유정과 판사 문유석이 왜 이 책을 '올해의 책'으로 꼽았는지 원고를 보내왔다.

    /박상훈 기자

    나를 고민하게 만든
    AI·인류의 다음 행선지

    호모 데우스
    유발 하라리 지음
    김명주 옮김|김영사
    630쪽|1만8000원

    허구의 안전장치 없는 유발 하라리의 냉정한 경고

    눈을 감고 옛날 어느 날을 상상해보자. 인류가 꼬질꼬질한 손으로 뭔가를 따 먹고 살던 사바나 촌놈 시절을. 진화의 시계를 24시간으로 가정한다면 현재인 자정에서 3초 전쯤이니 아주 옛날도 아니겠다. 그날 먹을 것을 찾아 나선 촌놈 1호는 무화과가 주렁주렁 열린 나무를 발견한다. 그 나무로 다람쥐 한 마리가 올라가는 것도. 나뭇가지가 입을 쩍 벌려 녀석을 삼켜버리는 것도. 그는 얼어붙는다. 나뭇가지가 아니라 뱀이었구나. 1호는 둥지로 돌아와 촌놈 2호에게 이 일을 들려준다. 2호의 몸에선 1호가 뱀을 봤을 때와 똑같은 신체 표상이 활성화된다. 머리털이 곤두서고, 식은땀이 돋고, 몸이 떨리고….

    이후 그들에겐 나뭇가지만 봐도 줄행랑을 치는 과잉탐지 기제가 발동된다. 이야기를 통해 뱀이라는 낯선 존재에 대한 '두려움'의 감정이 공유되고, '경계'의 개념이 생긴 것이다. 이 감정과 개념이 유발 하라리가 '사피엔스'에서 다룬 인지혁명의 시초다.

    '호모 데우스'는 인지혁명으로 3초 만에 지구를 접수한 사피엔스의 다음 행선지를 보여준다. 그곳은 영원히 살면서(불멸), 걱정 없이(행복), 의지대로 삶을 다루는 초인류(신성)의 세계다. SF나 디스토피아 소설에서 숱하게 봐온 레퍼토리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나는 난생처음 본 것처럼 큰 충격과 여운에 휩싸였다. 왜 그랬을까.

    삼각형을 그려보자. 인간을 사실적으로 설명하는 과학은 생물학이다. 반대편엔 우리의 양쪽 귀 사이에 걸린 둥근 소우주(머리라고도 부른다)를 탐사하는 인문학이, 꼭짓점엔 인간을 총체적으로 규명하는 예술인 문학이 있다.

    정유정 소설가

    '호모 데우스'는 삼각형의 중심에 자리 잡고 우리 심연에 잠든 핵심적인 무언가를 즉각적으로 뒤흔든다. 인류의 가장 유서 깊은 감정, 두려움이다. 무화과 나뭇가지인 줄 알았던 것이 실은 우리를 집어삼킬 뱀일지도 모른다는 그 두려움.
    호모 데우스는 분명 허구의 이야기다. 그런데 여기에는 우리를 현실로 무사히 귀환시키는 허구 특유의 안전장치가 없다. '사실'의 레일 위를 달리기 때문이다. 도망칠 곳도, 외면할 길도 없는 여정이고 꼼짝없이 끝을 봐야 한다. 읽는 동안 오만가지 생각이 뒤엉킨다. 지구라는 푸른 별에서 만물과 공생하려면 무얼 추구해야 하는지.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어찌해 볼 기회가 남아있기는 한지….

    복잡한 감정과 진지하고도 거시적인 고민은 책을 덮고 난 후로도 오래오래 지속된다. 흔치 않은 일이고 소중한 경험이다. 내게는 올 한 해를 통틀어 이 책이 유일했다.

    "보수·진보 모두의 실패"
    1인칭 고백 소중한 기록

    힐빌리의 노래
    J.D.밴스 지음
    김보람 옮김|흐름출판
    428쪽|1만4800원

    "잘났건 못났건 같이 살자" 백인 노동계층의 진솔한 고백

    사실 보편적인 이야기를 다룬 책은 아니다. 미국 애팔래치아산맥 지역에 정착한 스코틀랜드계 아일랜드인 가문 및 그 이웃들의 이야기다. 이들은 날품팔이, 소작농, 광부를 거쳐 기계공이나 육체노동자로 살아온 백인 빈곤 계층이다. 힐빌리(산골 백인), 레드넥, 화이트 트래시라고 불리며 멸시당하곤 하는 사람들의 민낯을 그들 중 한 사람인 저자가 솔직히 털어놓은 이야기다. 그런데 왜 이 책에 관심을 갖게 되는 걸까. 간단하다. 이 특수한 이야기를 통해 이 시대의 보편적 징후를 읽어내고 싶기 때문이다. 이들은 도널드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만들어낸, 바로 그 사람들이니까.

    내가 읽은 것은 보수·진보의 사이좋은 실패다. 저자는 자기 이웃들이 오바마로 상징되는 진보 엘리트를 왜 싫어하는지 설명한다. 그들 눈에 아이비리그 출신 지식인인 오바마는 외국인처럼 이질적으로 느껴진다. 할리우드와 실리콘밸리의 리버럴들 역시 마찬가지다. 진보는 예의 바르게 빈곤은 사회의 책임이라고 말하지만, 힐빌리가 실제로 목격하는 현실은 아이를 방치하는 마약중독자 부모와 나태한 '복지 여왕'들의 천국이다.

    그렇다고 모든 건 정부의 실패 때문이고 기업만 살리면 다 해결된다고 선동하는 우파를 믿지도 않는다. 공화당의 부자들은 값싼 외국인 노동자들을 고용하고 중국과 무역해서 이윤을 극대화하는 데 관심이 있지 힐빌리들의 삶에 관심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들이 민주·공화 양당 대신 트럼프를 선택한 것은 어찌 보면 가장 합리적인 경고 메시지다. 이들은 전 세계에 있다.

    영국에서는 브렉시트를 선택했고, 터키에서는 이슬람 원리주의로 회귀하는 대통령 에르도안을 지지하고, 필리핀에서는 두테르테에게 열광한다.

    문유석 판사·'개인주의자 선언' 저자

    그렇다고 이들이 반문명적 퇴행을 진심으로 원할까? 아니다. 이들의 속내는 '너희 잘난 놈들만 잘살지 말고, 같이 좀 살자!' 아닐까. 세계화도 좋고 인공지능도 좋고 인권과 다양성 존중도 좋은데, 그게 엘리트들에게만 좋은 게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진짜로 좋다는 걸 믿게 만들어 달라, 증거를 보여 달라, 우리를 시대에 뒤떨어진 촌스러운 낙오자 취급 말고, 너희가 말하는 찬란한 인류 진보 대열에 주인으로 동참하게 해 달라는 외침 말이다.

    내가 이 책을 올해의 책으로 꼽은 이유는 그 외침을 1인칭 시점으로 전해주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니 주변부니 하는 엘리트들의 말 한마디 없이 무덤덤하게 우리 힐빌리들은 이렇게 살아왔다고 쓰고 있다. 그래서 더 귀한 증언인 것이다.

    다음주에는 '2017 올해의 저자 10'을 소개합니다.

    훈련받은 외교관·월街 분석가… '글 잘 쓰는 전문가'의 약진

    원효부터 정인보까지
    1300년 명문장 총망라

    한국 산문선(전 9권)
    안대회·정민·이종묵 외 편역
    민음사|각 권 2만2000원

    통일신라 원효부터 20세기 정인보(1893~ 1950)까지 1300년 우리 고전 명문을 총망라한 '한국 산문선'이 8년에 걸친 작업 끝에 나왔다. 고전문학자 6명이 달라붙어 229인의 산문 613편을 책 9권으로 나눠 엮었다. 국내 출판계에서는 드물게 '억(億)' 소리 나는 예산이 필요했음은 물론. 편역에 참여한 정민 한양대 교수는 "15세기 서거정이 '동문선(東文選)'을 편찬한 이래 이 정도 규모의 작업은 처음일 것"이라고 했다.

    번역보다 어려웠던 작업은 글 선정이었다고 한다. 1300년 동안 나온 글 중 지금 읽어도 의미 있을 글을 골라 추렸다. 일본과 청나라의 위협을 걱정하는 목소리부터 바둑, 낚시, 정원 손질 같은 소일거리에서 삶의 이치를 찾는 감각적 산문까지 폭넓은 주제를 포괄했다.

    한글로 선조가 남긴 짙은 묵향(墨香)을 느낀다. 고전이라 하면 플라톤과 그리스·로마 신화 같은 서양 고전부터 떠올리는 세대에게 더 의미 있는 작업일 것이다.

    양지호 기자

    검색만으로 나도 전문가?
    전문 지식의 죽음 경고

    전문가와 강적들
    톰 니콜스 지음
    정혜윤 옮김|오르마
    420쪽|1만8000원

    "나도 너만큼 알아."

    검색 엔진과 함께 아침 나절을 보냈다는 이유로 10년은 걸려야 쌓을 수 있을 만한 지식과 해석력을 지닌 전문가에게 당당히 도전하는 세상. 단순히 전문가의 죽음만이 문제가 아니다. 보통 사람들이 "나도 너만큼 알아"라고 믿기 시작할 때, 민주주의는 포퓰리즘에 빠질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경고다.

    경고의 주인공은 컬럼비아대학과 조지타운대학에서 국제관계학으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은 러시아 전문가 톰 니콜스 미 해군대학 교수. 어디 미국만의 일일까. 약 안 쓰고 아이를 키운다는 소위 '안아키'나, 부검의가 아니라는데도 김광석은 타살이라고 주장하는 선동가에게 휘둘린 최근 우리를 돌아보라. 지난 2월 출판 등록을 마친 1인 출판사의 의욕작. 비용 들이는 마케팅이 불가능한 형편이었다는데도 중쇄를 찍고 4000부가 소화됐다. 원칙과 객관적 정보에 기초한 주장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새삼 깨닫게 한다.

    어수웅 기자

    직업 외교관 경험 살려
    '에도 시대' 중요성 읽어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일본사
    신상목 지음
    뿌리와이파리|276쪽
    1만5000원

    일본을 '근대화 우등생'으로 만든 동인(動因)을 에도(江戶)시대(1603~1867) 대해부를 통해 살펴본다. 저자는 에도시대를 일본 근대화 성공에 기여한 '축적의 시간'이자 '가교의 시기'라 분석한다. 지난 8월 초 출간돼 현재까지 4쇄 8000부를 찍었다. 인문·역사서가 출간 넉 달 만에 5000부 이상 팔린 건 주목할 만한 성과다.

    그간 일본 근대화 연구는 메이지 유신(1868) 이후 시기에 치우치는 경향이 있었다. 박윤선 뿌리와 이파리 편집주간은 "SNS에 올라오는 독자 반응을 보면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던 일본 에도시대 이야기를 통해 우리 근현대사를 되돌아보고 반추할 수 있어 반가웠다'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고 했다.

    저자는 전직 일본통 외교관이자 현직 우동집 주인장이라는 매혹적인 이력의 소유자. 민족주의에 치우치지 않고 일본을 다각적으로 읽어내는 그의 시각은 직업 외교관으로서 훈련된 결과물이다.

    곽아람 기자

    빅데이터 오·남용 고발
    내부고발자 증언 생생

    대량살상 수학무기
    캐시 오닐 지음
    김정혜 옮김|흐름출판
    392쪽|1만6000원

    수학(數學)을 오용하고 남용한 빅데이터 알고리즘이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심화시킨다는 고발. 묵직한 제목과 무거운 내용에도 불구하고 지난 9월 국내 번역 출간 이래 1만6000부 팔렸다. 출간 초 교보문고 종합 베스트 20위까지 올랐고, 요즘도 매주 400~500부씩 팔린다. 이 책을 낸 흐름출판 신성식 차장은 "빅데이터와 미래사회에 대해 사람들이 막연한 불안감을 느끼고 있는데 신뢰감을 주는 저자가 그에 대해 경고를 했다는 것이 독자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 같다"고 했다.

    보통 고발류(類) 책은 사회 운동가들이 많이 집필한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는 수학자이자 데이터과학자이면서 헤지펀드에서 퀀트(quant·분석가)로도 일했다. 학자인 동시에 빅데이터 분석 현장의 내부 고발자라는 저자의 이력이 책의 진정성을 담보한다. 요즘 빅데이터 업계에선 이 책을 모델 삼아 빅데이터와 사회문제를 결부시켜 집필 중인 저자들이 속출하고 있다.

    곽아람 기자

    反엘리트 주의 뿌리 밝힌
    퓰리처상 받은 20세기 고전

    미국의 반지성주의
    리처드 호프스태터 지음
    유강은 옮김|교유서가
    680쪽|3만5000원

    1964년 퓰리처상을 받았다. 반세기 동안 번역되지 않았다. 그래서 학계에서는 원서를 읽었다. 올해 초역된 '미국의 반지성주의'는 미국 대중이 엘리트 지식인에게 적대감·회의감을 느끼는 역사적 연원을 분석한 책이다. 저자는 작년 미국 대선에서 나타난 '트럼프 현상'을 50년 전 매카시즘 광풍을 보며 우려한 셈이다.

    번역이 늦었던 이유는 대중적이지는 않다는 판단 때문. 그러나 초판 2000부 소화가 목표였던 책은 3쇄까지 찍으며 선전했다. 표정훈 출판평론가는 "한국에서도 정치·사회적으로 극단적인 주장, 즉 반지성주의가 득세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봤다.

    호프스태터가 지적한 미국적 반지성주의의 특징 중 하나는 '자기 계발서'. 평범한 사람도 '의지'만 가지면 '헛똑똑이' 지식인보다 낫다는 생각이 깔려있다는 것. 한국과 미국은 유독 '자기 계발서' 시장이 큰 나라다. 근대화 과정에서 미국을 닮아간 한국 사회라 더 의미 있는 20세기 고전이다.

    양지호 기자

    디지털 浮遊 중인 한국인
    아날로그에 강한 향수

    아날로그의 반격
    데이비드 색스 지음
    박상현·이승연 옮김
    어크로스|448쪽
    1만6800원

    "인류는 디지털 기술과 연애하는 데 지쳐가고 있다."

    스마트폰 없는 삶은 상상할 수 없는 디지털 시대.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출신 저자는 아날로그가 부활의 날갯짓을 펼친다는 도발적인 주장을 펼쳤다. 신기술이 등장하면서 공룡처럼 멸종할 줄 알았던 턴테이블 레코드, 잡지, 필름 카메라 같은 아날로그 상품이 저점(低點)을 찍고 다시 성장하고 있다고, 발품 판 취재로 독자를 설득한다.

    캐나다인 저자가 썼고, 미국 뉴욕타임스가 2016년 올해의 책으로 꼽았다. 미국·캐나다 판매 부수를 합친 것과 비슷한 2만 부가 한국에서 팔려나가며 더 화제가 됐다. 강태영 어크로스 편집자는 "디지털 사회에서 부유(浮遊)하는 한국인들이 아날로그에 강한 향수를 느끼고 있다는 뜻"이라고 했다.

    인터넷 유통 공룡 아마존은 왜 오프라인 매장을 늘려나가고 있는가. 아날로그만이 제공하는 매력이 있다는 것이다.

    양지호 기자

    '안은 흰 눈, 바깥은 여름'
    김애란 동인문학상 수상작

    바깥은 여름
    김애란 소설집|문학동네
    272쪽|1만3000원

    바깥은 여름이어도 안쪽은 그렇지 않은 세계. "안에선 하얀 눈이 흩날리는데, 구(球) 바깥은 온통 여름일 누군가의 시차를 상상했다." 교통사고로 아들을 잃은 부부, 아빠 없는 다문화가정, 사멸하는 언어…. 7편의 단편에서 춥고 외곽에 있는 군상들은 주춤주춤 발을 구르고 있다.

    너나 할 것 없을 것이다. 제자를 구하려다 목숨을 잃은 남편. 수록작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에서 남겨진 아내는 시리(아이폰 음성인식 서비스)에게 묻는다. "인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요?… 시리는 무척 곤란한 질문을 받았다는 듯 인간에 대한 '포기'인지 '단념'인지 모를 반응을 보였다. '뭐라 드릴 말씀이 없네요.' 피식 웃음이 났다. 오랜만에 나온 소리였다. 나는 그 웃음에 편안함을 느꼈다."

    그러니 이 발구름은 비관으로 끝장나는 대신 주춤주춤 어디론가 향하게 한다. "바깥은 여름"이라고 말하는 자의 안쪽을 들여다보게 한다. 2017 동인문학상 수상작.

    정상혁 기자

    가족 외치면 구식인가
    다섯 식구의 경쾌한 드라마

    세 살 버릇 여름까지 간다
    이기호 소설집|마음산책
    248쪽|1만2500원

    저자는 이 책을 '가족소설'이라 명명한다. 여덟 살 어린 위대한 아내와 갈팡질팡 어딘가 측은한 소설가 남편, 천진한 세 아이들이 빚어낸 44편의 이야기. "가족이라는 이름 자체가 꼭 소설의 다른 말 같다"는 저자의 고백은 이 문장에서 진실로 드러난다.

    "아내와 세 아이들이 침대 바로 아래 좁은 방바닥에 이불을 깔고 나란히 누워 잠들어 있었다. 침대에서 자면 아이들이 따라 올라올까 봐, 그러다가 행여 아래로 떨어지기라도 할까 봐 아내는 항상 방바닥에서 잠을 잤다… 그들 틈에 살짝 모로 누웠다. 쌕쌕거리는 아이들의 숨소리가 들리고 아내의 콧김이 내 뺨에 와닿았다… 누운 자리는 좁았고, 그래서 우리는 조금 더 가까이 있었다."

    마지막 장(章)에 이르러 "우리가 아직 모르는 게 많다니까" 말하는 이들은 어설플지언정 든든해 보인다. 가족을 부르짖으면 구식으로 간주되는 요즘, 남녀유별을 주창해야 흥행하는 요즘 같은 시대에 이 가족소설은 얼마나 귀한가.

    정상혁 기자


    나도 너만큼 알아?

    '2017 올해의 책 10'의 특징 중 하나는 전문가의 반격입니다. 인터넷이 지적 평등을 가져왔다는 주장도 있지만, 자기도취적 나르시시즘의 도구로 추락했다는 우려가 요즘은 더 많죠. 반나절 구글 검색에 열중한 뒤 '나도 너만큼 알아'라고 말하는 사람들. 조선일보 Books가 선정한 올해의 책은 유난히 '글 잘 쓰는 전문가들'의 책이 많았습니다. 하버드대 수학박사 출신으로 뉴욕 월가 헤지펀드 분석가(퀀트)로 일한 캐시 오닐의 '대량살상 수학무기', 유머 한 스푼 섞어 '한문 번역의 어벤저스'로 불리는 한문학자 안대회·이종묵·정민 교수의 '한국산문선', 주일대사관에서 근무한 외교관 출신 신상목의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일본사' 등이 그 예입니다. 전문가와 일반인, 지식을 가진 사람과 궁금증을 가진 사람 사이의 구분과 차이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책들이라고 생각합니다.

    50년 전부터 이 위기를 경고했던 리처드 호프스태터의 '미국의 반지성주의'와 러시아 전문가인 미 해군대학 교수 톰 니콜스의 '전문가와 강적들'도 이 문제의식을 선명히 보여주는 책입니다. "팩트 많이 외우면 퀴즈왕일 뿐, 전문가는 시간이 만드는 것"이라고 대답한 지난주 Books의 주경철 서울대 교수 인터뷰를 떠올리게 만드는 대목이죠.

    어수웅·Books팀장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문학은 두 편이 뽑혔습니다. 세상과 자신의 온도차를 이야기하는 김애란의 동인문학상 수상작 '바깥은 여름', 20대에게 출산을 '고무'하고 30대에게는 공감의 '울컥'을 이끌어낸 이기호의 장편(掌篇) 소설 '세살 버릇 여름까지 간다'입니다. 올해 새로운 시도가 또 하나 있습니다. 과학 전문가 20명이 직접 투표해 뽑은 '올해의 과학책'입니다.

    늘 그래왔듯, 조선일보 올해의 책은 숫자보다 의미에 주안(主眼)을 뒀습니다. 많이 팔린 베스트셀러 1, 2위 작품이 잘 보이지 않는 까닭입니다. 다음 주 '올해의 저자 10'도 기대해 주시기를.

    [Books] 詩, 만추를 읽다
    [Books] 한국의 맹렬 독자 1000명이 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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