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트 외우면 퀴즈왕일 뿐… 전문가는 시간이 만든다"

11월 마지막 주, 주경철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는 2권의 책에 이름을 실었다.
그는 전문 학술 서적과 더불어 대중 인문서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특히 대중성과 전문성을 갖추기 위해서는 의도적인 노력이 필요하다고 언급했다.

    입력 : 2017.12.01 07:04

    [어수웅의 Dear 라이터,] '유럽인 이야기' 등 펴낸 주경철 서울대 교수
     

    11월 마지막 주, 서울대 서양사학과 주경철(57) 교수의 이름이 인쇄된 신간 두 종이 각각 다른 출판사에서 출간됐다. 하나는 자신의 이름이 제목에 등장하는 '주경철의 유럽인 이야기'(전 3권 완결·휴머니스트刊), 또 하나는 역사학자 페르낭 브로델(1902-1985)의 '지중해'(전 5권 예정·주경철 등 공역·까치刊). 지난 28일 오전 9시 30분 광화문에서 그를 만났을 때, 그는 직전 조찬 모임에서 만났다는 한 정신과 의사의 농담을 전해줬다. "아니 주 교수, 왜 그렇게 정신없이 살아, 그것도 병이야, 병."

    정작 주 교수 본인은 과격한 농담의 과녁이 되었지만, 그가 치료를 요하는 '환자'가 된 덕분에 독자는 세계의 패권을 잡기 시작한 근대 유럽과 그 유럽을 만든 사람들을 넓고 깊게 만나게 됐다. 전자는 흡인력 강한 대중 인문서이며, 후자는 진지한 독자를 위한 역사학의 고전. 재미와 의미를 동시에 출간하는 필자라니, 가히 이번 주의 저자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인류의 미래를 예측하는 '호모 데우스'를 쓴 유발 하라리는 역사학자가 아니라 미래학자라는 농담이 있다. 주경철 교수는 "역사학은 다른 분야 전문가를 초빙해 대화하기에 좋은 마당"이라면서 "세상이 바뀌어가는데 홀로 고고한 척할 수는 없다. 역사학의 역할 확장에 대해 나는 긍정적이며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믿는다"고 했다. 28일 서울도서관에서. /장련성 객원기자

    ―과격하지 않은 농담으로 시작해보자. 공교로운 같은 주 출간. 우연의 산물인가.

    "(웃으며) 당연히 우연의 결과지. 하지만 요즘 내가 그런 말 하기를 좋아하는데, 그때는 우연이지만 지나고 보면 필연이더라. 스스로 정당화하자면 지금은 필연이었다고 생각한다."

    둘 다 처음에는 고사(固辭)했던 프로젝트였다. 젊은 대중 독자를 위해 포털 네이버에 매주 연재해서 책으로 묶어보자는 휴머니스트 김학원 대표의 '유럽인 이야기' 기획에는 "바빠 죽겠는데 무슨 소리냐"며 손사래를 쳤고, 중후한 고전의 필요성을 강조한 까치글방 박종만 대표의 '지중해' 제안에도 "번역은 할 만큼 했다"고 손을 내저었다. '지중해'를 쓴 브로델의 또 하나의 역작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총 6권을 혼자 번역한 그였다.

    ―그렇게 고사했는데 왜.

    "결국 설득에 넘어갔다(웃음). '유럽인 이야기'는 작년에 연재를 시작해서 올해 3권이 모두 나왔으니 속전속결이었다. 매주 200자 원고지 40매 분량, 총 60주를 썼다. 다룬 인물은 모두 24명. '지중해'는 2013년부터 시작한 기획이다. 이번에는 도저히 혼자 감당하기 힘들어 팀을 짜겠노라 했다. 서울대 서양사학과 후배 등 총 6명이 참여했다."

    ―전자는 대중 인문서, 후자는 고급 독자를 위한 책으로 보인다. 각각의 글쓰기에 대한 당신의 전략은.

    "전략까지는 아니고, 그런 생각을 많이 한다. 논문이나 학술 서적 전문가도 있어야 하지만, 이걸 대중에게 알리는 글쓰기 전문가가 별도로 있어야 한다고. 우리나라에는 두 분야 모두 부족하지만, 특히 후자가 더 부족한 것 같다. 오트 불가리자시옹(haute vulgarisation)라는 불어 표현이 있다. 우리말로 하면 '고급 통속화'랄까. 농담에만 치중하는 저급한 이야기 말고, 대중이 잘 이해할 수 있도록 고급하게 다듬은 역사 이야기. ('로마인 이야기'를 쓴) 시오노 나나미처럼 (국수주의에) 편향된 필자여서는 안 되겠지만 말이다(웃음)."

    ―전문성과 대중성을 둘 다 갖는다는 것. 재능의 문제일까, 아니면 의도적 노력의 결과일까.

    "내가 잘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웃음). 하지만 질문에 대답하자면, 당연히 의도적 노력의 결과다. 내가 생각하는 대중서의 타깃 독자는 대학 신입생. 막 1학년 1학기를 시작한 학생도 이해할 수 있는 책이다."


    유럽인 이야기(전 3권)
    주경철 지음|휴머니스트
    각 340·344·352쪽
    각 권 1만8000원

    주경철의 유럽인 이야기
    16·17·18세기 유럽의 핵심적 인물 24명을 다룬다. 나폴레옹 1세, 로베스 피에르 등 정치적 인물이 중심이지만 레오나르도 다빈치, 모차르트 등 예술가도 포함한다. 인물 한 명당 200자 원고지 120장 분량의 짧은 평전. 찬양 일변도의 위인전이 아니라, 그들의 빛과 그림자를 통해 근대 유럽의 입체적 해석을 시도한다. 흡인력 강한 대중 인문서. 전 3권.


    '유럽인 이야기'는 본인 표현으로 '다른 페르소나'를 가지고 쓴 책이다. 느린 호흡으로 천천히 다시 읽게 만드는 자신의 문체를 의도적으로 지웠고, "온라인의 글은 짧고 강렬하고 섹시해야 한다"는 통념을 따랐다. 프랑스 왕 앙리 4세(1553-1610)의 암살 장면을 쓸 때는, 지금은 대학원생인 딸이 소녀 시절 탐닉했던 애니메이션의 대사까지 끌어왔다. "사랑과 정의의 이름으로 너를 용서하지 않겠다."('세일러문') 대중문화와 역사가 '섹시한 정의'로 만난 현장이랄까.

    이 책에는 16~18세기 인물 24명이 등장한다. '역사를 위한 변명'을 쓴 마르크 블로흐(1886-1944)는 "역사가란 인간의 살 냄새가 나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가는 식인귀와 같다"고 말했다지만, 이 24명의 선택 기준은 뭐였을까.

    "세기별로 8명씩 안배했다. 기계적 균형이 아니라 목적을 가진 안배다. 작은 인물들로 시추공을 뚫어 세계 패권을 잡은 근대 유럽을 그려보자는 것. 나폴레옹 1세·로베스피에르 등 정치적 인물이 중심이지만, 해적 등 유럽과 바깥 세계의 연결고리는 물론, 모차르트처럼 예술가도 포함시켰다. 하지만 위인전 읽듯 당장의 교훈보다, 통찰의 '거리(꺼리)'를 제시하고 싶었다. 우리가 지금 욕하는 사람들이 때로는 이런 공헌도 했고, 찬미했던 인물들이 어두운 면도 있다는 삶의 진실을."


    지중해(3권 출간·전 5권 예정)
    페르낭 브로델 지음|까치
    주경철 등 옮김|각 572·442·424쪽
    각 권 2만5000원

    지중해: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
    소위 신역사학의 '교황'으로 불리는 페르낭 브로델(1902~1985)의 역작.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1527~1598)가 지배하던, 16세기 후반의 지중해다. 단순히 전통적 정치사를 넘어 지리적 공간과 인간의 활동 전반을 포괄하는 20세기의 고전으로 평가받고 있다. 총 5권으로 번역되는데, 3권이 먼저 나왔다. 주 교수, 미국 애머스트 대학 조준희 교수, 이화여대 남종국 교수, 윤은주 국민대 교수 등 6명이 함께 번역했다.


    역사는 단답형이나 사지선다(四枝選多)가 아님을 웅변하는 또 하나의 사례가 브로델의 '지중해'다. 1923년에 집필을 시작해 1946년에 출간된 이 분야 고전. 인간·사건·사물·자연·도시·경제·사회를 총체적으로 아우르는 유럽의 16세기사(史)다. 아무래도 좀 더 전문적이고 진지한 독자를 위한 책. 20년 전인 30대 시절, 그는 브로델의 역작 '물질문명과 자본주의'(전 6권)를 홀로 번역한 적이 있다. 주 교수는 "기운 좋았던 시절"이라고 그때를 요약했다. "매일 아침 8시 30분부터 번역 시작, 밥 먹을 때만 잠깐 쉬고 밤 1시까지 내내 옮겼다. 3년 꼬박. 그러고도 지치지 않았다. 그 기운을 왜 거기에만 썼을까"라며 그가 웃는다.

    ―'지중해'는 당신에게는 어떤 의미이고, 독자에게는 어떤 의미일까.

    "이 책은 고전이다. 위대하지만, 반대로 지금 이 틀로 세계를 보면 적실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뜻이지. 하지만 작은 산만 다니다가 큰 산을 한 번 올라가면, 자신이 부쩍 성장했음을 깨닫게 된다. 꽃이 예쁘다, 안개 낀 경치가 좋다는 식의 디테일도 중요하지만, 그 모든 걸 포함한 큰 경험을 해보는 것. 브로델에게는 대가다운 통찰이 있다. 진지한 독자들도 휴가 때 한번 작정하고 쭉 따라간다면, 작은 책 짧게 여러 번 읽는 것보다 크게 얻는 것이 있을 거다."

    2차 대전에 참전했던 브로델은 이 책을 포로수용소에서 썼다고 한다. 놀라운 점은 총 1600쪽에 이르는 이 육중한 분량을 여러 차례에 걸쳐 다시 썼다는 것. 원래 이 책은 브로델의 박사학위 논문이었다. 지도교수는 초고를 보고 "독창적이고 탄탄하고 적절하다"고 칭찬하는데, 정작 학생은 그 순간 처음부터 다시 쓰고 있었다는 것.

    ―이런 집요함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있다면.

    "브로델 스스로 화가 마티스(1869-1954)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마티스에게는 자신이 원하는 선(線)이 있었다고. 한 번 슥 긋고, 마음에 안 들면 버리고. 또 한 번 슥 긋고 다시 버리고. 이렇게 500번을 그어서 원하는 선을 얻었다는 것이다. 치열한 사람들은 이렇다. 쓰다 보니 나중에 더 훌륭한 프레임을 알게 되고, 그러니 처음부터 다시 쓸 수밖에 없다. 선학(先學)들의 치열함이다."

    수십 년에 걸쳐 책 한 권을 쓰는 선학이 있는가 하면, 요즘은 구글이나 위키피디아 검색 한 번으로 '나도 전문가'를 자처하는 오만의 시대이기도 하다. 진정한 전문가를 오히려 냉소하는 시대. 이런 시대에 전문가의 존재 이유는 무엇이라 할 수 있을까.

    "팩트는 얼마든지 구할 수 있다. 나 역시 구글과 위키피디아를 활용한다. 하지만 그건 출발일 뿐. 요즘 '창발(創發)'이란 말을 많이 쓰던데, 낮은 차원의 디테일 모았다고 높은 차원의 작품 나오는 건 아니다. 기계적으로 팩트를 외운다면 그건 퀴즈왕이지. 전문가와 퀴즈왕은 다르지 않을까. 전문가는 팩트를 연결해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이다. 깊이는 시간과 함께 쌓인다. 피아니스트 백건우를 보라. 단순히 테크닉 차원이 아니라, 장구한 시간 동안 쌓아온 깊이가 있다. 일생일서(一生一書)라는 말이 있다. 한 인생에 하나의 책. 노자처럼, 브로델처럼. 지금 세상에서는 찾기 힘든 덕목이지만, 치열함과 묵중(默重)함에 대한 존경은 필요하다. 그 가치가 무시되는 것 같아 우려스럽다."

    2017년 11월 28일 오전 서울 중구 서울도서관에서 주경철 서울대학교 교수가 본지와의 인터뷰를 갖고 있다. /장련성 객원기자

    '재미'와 '의미'… 두 권의 출간

    역사가는 예측이 아니라 해석을 할 뿐이라고 그는 말한 적이 있다. 하지만 그는 역사가의 경계를 넘어 당대를 발언하고 있고, 신문에 칼럼도 쓰고 있다. 소위 좌우를 가리지 않은 글쓰기였다. "당신이 누구 편이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다면 뭐라 답하겠는가" "역사가의 역할은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을까" 등을 이어 물었다. 적지 않은 시간의 치열한 대답이 있었지만, 그는 자칫 오해를 부르고 싶지는 않다며 대화 말미에 이르러 표현을 삼갔다. 단, 이 대답은 적어둘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진보와 보수라는 프레임은 실제 작동하기는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허구다. 그런데도 허구에 매달리는 사람들을 보면 안타깝다. 아마 이들이 자신만의 가치라고 믿는 것들을 찬찬히 살펴본다면, 80%가 일치하는, 공유하는 가치일 것이다."

    고도근시에 노안이 겹친 주 교수는 두 개의 안경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각각 책을 읽을 때와 일상생활을 할 때. 그가 안경을 바꿔 쓰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기 쓰지 못한 나머지 대답을 위해서는, 다른 성격의 지면이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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