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튼 뒤의 사악함… 나는 인간이 궁금하다

최근 1년간 스릴러 장르 베스트셀러 1위를 지킨 '죽여 마땅한 사람들'.
이 책의 저자 피터 스완슨은 "나는 실패한 시인"이라며 자신을 소개했다.
그는 가장 좋아하는 단어로 sinister(불길한·사악한)을 꼽았다.

    입력 : 2017.10.27 07:14

    [어수웅의 Dear 라이터] 범죄 소설 작가 피터 스완슨
     

    죽여 마땅한 사람들
    피터 스완슨 지음
    노진선 옮김|푸른숲
    456쪽|1만4800원


    서가(書架)는 그 작가 세계관의 전쟁터라지만, 이런 책장이라면 어떨까. 1995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아일랜드 시인 셰이머스 히니(77)의 시집과 미국 하드보일드 소설의 원조 격인 레이먼드 챈들러(1888~1959)가 같은 진지(陣地)에서 머리를 맞대고 있다. 그 옆 선반에는 히니보다 정확히 70년 전에 같은 상을 받은 아일랜드 작가 버나드 쇼(1856~1950)와 추리소설의 여왕 영국 애거사 크리스티(1890~1976)가 동맹(同盟)을 구축하고 있었다. 순문학과 장르문학이 갈라지며 스미는 현장이랄까. 범죄 소설 작가 피터 스완슨(49). 미국 보스턴 외곽 서머스빌에 있는 작가의 집 서가 풍경이었다.

    최근 1년 동안 기자가 읽은 미스터리·범죄 소설 중 가장 흡인력이 강했던 작품은 '죽여 마땅한 사람들(The Kind Worth Killing)'. 혼자만의 취향인가 싶어, 리스트를 확인했다. 그렇지 않았다. 인터넷 서점 예스24는 최근 1년 스릴러 장르 베스트셀러 1위로 이 작품을 지목하고 있었다. 단순히 엔터테인먼트로서의 재미만은 아니었다. 기품과 압축을 겸비한 문장의 매력, 그리고 인간 본성에 대한 질문이 그 안에 있었다. 보스턴에서 태어나 보스턴 트리니티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는 지역 토박이. 하버드대학에서 차로 10분 정도 떨어진 작가의 집을 찾았다. 그의 첫마디는 "나는 실패한 시인"이었다.

    /보스턴=이현우 사진작가

    ―전공은 영문학이고 졸업 후에는 시와 평론을 썼다고 들었다. 그러고 보니 '죽여 마땅한 사람들'의 주인공은 문학 잡지 출판사에서 일한다. 하지만 지금 당신은 범죄 소설을 쓰고 있다. 무례한 질문이지만, 일종의 문학적 굴복인가 아니면 세계관의 변화인가.

    "시인이 된다는 생각을 꿈꾼 적이 없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나는 동시에 스릴러 작가가 되고 싶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나는 시를 쓰고, 시를 읽는다. 그리고 도나 타트(2014년 '황금방울새'로 퓰리처상을 받은 대표적 미국 작가)를 읽는다. 하지만 나 스스로 가장 편안하고 즐거울 때는 장르 소설을 쓸 때다. 순문학과 장르문학은 꼭 그렇게 구분되어야 하는 것일까.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은 가장 위대한 범죄 소설이지만, 동시에 뛰어난 순문학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정말 재미있는 범죄 소설을 읽고 싶었고, 내가 읽고 싶은 걸 쓰고 있다. 그뿐이다."

    ―시와 평론을 쓴 경험은 범죄 소설 창작에 어떤 도움을 주나.

    "시는 아이디어를 얻는 데 최고다. 최소한의 단어를 사용하지만, 그 언어가 서로 스쳐 지나갈 때 영감이 탄생한다. 소설가에게 큰 도움이 된다. 문학 비평 혹은 북 리뷰를 쓴 경험도 마찬가지다. 어떤 대목에서 독자가 위로와 교훈과 재미를 얻는지, 문학이 작동하는 방식을 뿌리부터 생각하게 해준다."

    실제로 '죽여 마땅한 사람들'의 도입부는 최소의 어휘로 최대의 긴장을 만들어내는 모범 사례 중 하나로 불러도 좋을 듯하다. 탑승 시간을 기다리며 공항 라운지에서 우연히 만난 남녀. 전혀 모르는 타인인데도 각자 마티니를 마시다 비밀을 털어놓는다. 외도하는 아내의 목숨을 빼앗고 싶다고 충동적으로 고백하는 남자와 자신은 이해관계가 없으므로 경찰의 의심을 받지 않고 그 계획을 실천에 옮겨줄 수 있다고 제안하는 여자.

    ―이 아이디어의 시작은?

    "(웃으며) 공항 라운지 바의 법칙(Rules of airport lounge bar)이랄까. 내가 열 살 때 아버지가 들려준 이야기가 있다. 비행기 옆 좌석에서 타인에게 비밀을 고백한 사람에 관한. 잘 아는 사람에게는 차마 말하기 어려운 삶의 어둠. 비행기 혹은 라운지 바에서 헤어지고 나면, 두 번 다시 만나지 않을 사람들이니까. 사람이라면 누군가에게는 비밀을 털어놓고 싶은 법이다. 인간은 외로운 존재니까. 열 살 때부터 그 이야기가 내게 꽂혔다. 완전히 모르는 사람이 털어놓는 비밀이라는 설정에 늘 매혹됐다. 그 불길한(sinister) 매력이라니."

    시·평론 쓰다 범죄 소설로
    장르 건너뛰는 '흡인력'
    최근 1년 스릴러 분야
    베스트셀러 1위 꼽혀


    평범함 밑의 불길함
    내 안의 또 다른 '나'
    "인간 본성 쓰겠다"

    ―그러고 보니 당신은 sinister (불길한·사악한)라는 형용사를 자주 쓰는 편이다.

    "실제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단어다. sinister. 발음부터 불길하지 않은가(웃음). 인간은 책임감이라는 얇은 베니어합판 아래 사악한(sinister) 본성이 숨어 있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물론 정도의 차이는 조금씩 있겠지만. 어렸을 때 히치콕 감독의 영화 '다이얼 M을 돌려라'를 본 적이 있다. 아내를 죽일 계획을 짜는 무서운 남편이 등장한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악한 남자 주인공이었다. 나는 완전히 넋을 빼앗겼다. sinister는 내게 그런 의미다. 평범함의 수면 밑에 도사린 불길하고 사악한 존재. 인간도 마찬가지고, 세상도 마찬가지 아닐까."

    그는 움베르토 에코에 이어, 자신의 영웅으로 앨프리드 히치콕을 호명했다. 결국 중요한 건 장르가 아니라 그 작품이 표면 아래 숨어 있는 진실을 드러내는 데 성공하느냐 여부일 것이다. 히치콕 영화에서처럼 스완슨 소설의 평범해 보이던 주인공은 우연한 만남을 통해 자신 안에 숨어 있던 또 다른 자아를 발견한다.

    ―(웃으며) '실패한 시인'뿐만 아니라 '실패한 영화감독'이기도 한 건가.

    "내게는 히치콕이 최고의 감독이자 영웅이다. 문학과 영화를 막론하고 가장 창의적인 예술가라고 생각한다. 히치콕의 영화 '레베카'를 소재로 소네트(보통 10음절 14행으로 이뤄진 정형시)를 만들어 본 적이 있다. 그 소네트가 너무 맘에 들어서, 히치콕의 전작(全作)으로 소네트를 써보겠다는 결심을 했다. 히치콕 영화가 모두 53편이다. 이 53편을 다시 몰아서 보느라 어느 해 겨울을 전부 써버렸다. 대단한 겨울, 잊을 수 없는 겨울이었다. 전작 소네트는 지금도 진행 중이다."

    ―당신도 영화감독을 영웅으로 고백했지만, 소설 읽는 사람들이 갈수록 줄어드는 세상이다. 시각 예술, 영상매체에 비해 당신이 생각하는 소설의 장점은.

    "물론 영화나 TV를 보는 게 훨씬 더 쉽다. 관객이나 시청자에게 생각을 강요하지 않으니까. 영상·음악·멋진 배우… 이 모든 걸 한꺼번에 선물한다. 하지만 독서는 이 모든 걸 독자가 주체적으로 상상해야 하지. 그러나 바로 그 수고가 독서를 영화보다 의미 있게 만든다. 수고한 만큼 더 대가를 준다. 오래 시간을 들일수록, 더 오래 남는 건 자명하다."

    출처에 대해서는 말을 흐린 채, 피터 스완슨은 사람의 실제 두개골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독자에게 완전히 다른 세계로 건너가는 경험을 주고 싶다고. 잔잔해 보이는 수면 아래 출렁이는 삶, 평범함 뒤에 숨은 불길함이 그 안에 있다. /보스턴=이현우 사진작가

    ―궁극적으로 당신이 독자에게 주고 싶은 경험은.

    "소설을 읽는다는 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감정을 경험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영화광이고, TV 드라마도 많이 본다. 하지만 책 읽을 때의 쾌감과 비교할 수는 없다. 나만의 상상계를 만든다는 것. 다음에 무엇이 일어날지를 먼저 생각하고 설계하는 즐거움. 궁극적인 탈출이랄까. 내 책을 읽느라고 밤을 새웠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 가장 기쁘다.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기쁨이다."

    이 인터뷰를 시작할 때 묘사했던 풍경이 있다. 셰이머스 히니와 레이먼드 챈들러, 버나드 쇼와 애거사 크리스티가 같은 참호에서 전의를 다지고, 앨프리드 히치콕과 움베르토 에코가 번갈아 질문을 던지며 즐겁게 대화하는 서가. 피터 스완슨의 책 제목은 '죽어 마땅한(deserve to die)'이 아니라 '죽여 마땅한(worth killing)'이었다. 수동이 아니라 능동의 세계, 실패한 시인이나 영화감독이 아니라, 스스로 좋아서 선택한 범죄 소설의 세계.

    다시 한 번, 중요한 건 장르문학이냐 순문학이냐의 분류가 아니라 좋은 소설이나 좋지 않은 소설이냐에 대한 질문일 것이다. 피부를 들춰내야 드러나는 삶의 진실. 스완슨의 '전쟁터'인 서가 구석에는 자신의 머리보다 조금 작아 보이는 해골이 있었다. 복제품이냐 물었더니 실제 인간의 두개골이라고 했다. 출처에 대해서는 말을 흐린 채, 작가가 씩 웃으며 말했다. 인간의 숨은 본성이 늘 궁금했다고. Sinister.


    낯선 타인에게 비밀 털어놓는 이유

    아낌없이 뺏는 사랑
    피터 스완슨 지음
    노진선 옮김|푸른숲
    367쪽|1만4500원


    피터 스완슨의 국내 번역 소설은 두 권이다. 데뷔작 '아낌없이 뺏는 사랑'은 스무 살 첫사랑을 20년 만에 만난 한 남자의 야심만만한 스릴러고, 두 번째 장편 '죽여 마땅한 사람들'은 완전한 타인에게 털어놓은 비밀을 키워드로 완전범죄를 추구하는 여자의 지적 누아르다.

    한국에는 '죽여…'가 먼저 출간됐고, '아낌없이…'는 지난 6월에 나왔다. 지금까지 세계 30여 국에서 번역됐다. 스완슨은 '죽여…'의 표지 디자인이 30국 중 최고라며 거듭 감탄했다. 서로 모르는 타인들이 길에서 우연히 마주치고, 또 짧게 스친 뒤 각자의 길을 가는 이미지다. 그는 "내가 생각한 공항 라운지바의 법칙에 120% 들어맞는 표지 디자인이라 생각한다"고 엄지손가락을 추켜올렸다.

    미국에서 올봄에 나온 스완슨의 세 번째 소설 'Her Every Fear'(그녀의 모든 공포)는 내년 여름 국내에 번역 출간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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