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배우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내 이야기

문소리가 감독한 첫 번째 영화 <여배우는 오늘도>.
배우 문소리가 각본을 쓰고, 연출을 하고, 출연까지 했다.
며느리, 딸, 엄마, 아내 역할로 오늘도 바쁜 배우 문소리는 열심히 달린다.

    입력 : 2017.10.09 08:12

    [topclass]감독 그리고 배우 문소리
     

    여배우는 오늘도… 달린다. 여배우를 찾지 않는 척박한 영화계 토양을 갈아엎으려 달리고, 예고도 없이 날아드는 생의 어퍼컷과 훅을 피하지 않으며 달린다. 문소리가 감독한 첫 번째 영화가 개봉했다. 100%의 진실은 아니지만 100%의 진심을 담은 영화다.

    문가(家)와 이가(家)에 작은 아이(小)가 태어났다는 뜻의 '문소리'는 큰 어른으로 자라, '연두'라는 아이를 낳았다. '연두'는 그가 좋아하는 단어이기도 한데, 이 여린 몸 안에 무한한 커다란 가능성을 품고 있어서다. 최근에는 동명의 영화사도 열었다. 영화사 '연두'의 첫 작품은 문소리가 각본을 쓰고, 연출을 하고, 출연까지 한 〈여배우는 오늘도〉다.

    /필앤플랜

    "40대가 되면 내 삶은 굉장히 안정돼 있을 줄 알았어요. 우아하게 커피를 마시고, 담소를 나누며 살 줄 알았죠. 그런데 40대가 돼도 삶은 불안정하고, 저는 늘 커피를 테이크 아웃해서 뛰고 있더라고요. '왜 이렇게 됐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당연하더라고요. 제가 선택한 삶이 한 번도 '안정과 여유'였던 적이 없었으니까요. 저는 그쪽에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에요."

    대학에서 교육학을 전공했지만, 학과보다는 연극에 더 관심이 많았다. 연극하는 사람들과 부대끼다 우연히 본 오디션으로 1999년 〈박하사탕〉의 주인공 윤순임이 됐다. 2002년에는 〈오아시스〉의 한공주를 만나 베니스영화제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20대에 이창동 감독을 만난 경험은 문소리라는 배의 항로를 바꾸었다. 여러 모로 그렇다. 예를 들어 〈여배우는 오늘도〉에는 끊임없이 외모로 평가받는 여배우의 고단함이 묻어나는데, 그때마다 문소리는 이창동 감독의 말을 떠올린다.

    "'감독님, 제가 그렇게 안 예뻐요?'라고 물어봤더니, '소리야. 너는 충분히 예뻐. 다른 배우들이 지나치게 예쁜 거야'라고 하시더라고요.(일동 웃음)"

    문소리는 영화 속에서나, 영화 밖에서나 유머를 아는 사람이다. 임순례 감독은 문소리 감독의 데뷔작에 '연기도 잘하면서, 연출까지 잘하면 반칙'이라는 평을 남겼는데, 그가 감독으로서 평가한 문소리 감독의 미덕은 '힘을 빼고 만들었다'는 점이다. 힘이 들어가면 유머가 나오지 않는다. 감독 문소리를 배우 문소리와 객관적 거리를 유지하면서, 그가 겪는 아이러니를 유연하게 담아냈다.

    /필앤플랜

    "배우가 상황 파악이나 주제 파악을 하기는 힘든 직업이에요. 남들은 다 아는 사실을 제일 나중에 알게 되기도 하고요. 그 함정에 빠지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처한 상황을, 그리고 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려고 노력하죠."

    영화에 대한 사랑이야 식은 적이 없다. 그런 만큼 공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중앙대학교 대학원에 들어간 이유다. 정책을 공부할까, 이론을 공부할까 하다 '연출'을 공부하기로 마음먹었다. 영화가 만들어지는 메커니즘을 알게 되면 연기에도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다. 옴니버스로 이루어진 〈여배우는 오늘도〉는 3부로 구성된다. 1부 여배우, 2부 여배우는 오늘도, 3부 최고의 감독이다. 1, 2, 3부는 모두 다른 구성의 이야기지만,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건 배우 문소리가 생활인 문소리로 겪는 굴욕이다. 삶은 예기치 못한 뒷골목에서 다짜고짜 뒤통수를 때린다. 그 순간을 포착해낸 건 감독 문소리의 힘이다.

    감독은 참 외롭더라고요

    "영화 예고편만 보고 연락 온 동료들도 많아요. '이거 완전 내 얘기'라면서요(웃음). 영화제에서 공개되고, 관객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가장 기분 좋았던 이야기는 '여배우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내 이야기였다'는 말이었어요. 그러길 바랐거든요."

    가장 기분 좋은 이야기는

    '여배우 이야기 인줄 알았는데
    내 이야기였다'
    는 말.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여배우는 오늘도〉를 본 관객은 직장을 다니며 아이를 키우는 워킹맘이었다. 영화에는 워킹맘 문소리가 나온다. 친정 엄마에게 아이를 맡기고 촬영을 가야 하는 문소리는 '유치원 등원 거부'를 하는 딸과 승강이를 벌인다. 친정 엄마는 이미 아이의 고집에 지쳐 신세를 한탄하는 중이다. 볕이 드는 거실에 딸과 마주 앉은 문소리는 연두에게 왜 유치원에 가기 싫으냐고 묻는다.

    "힘드니까… 힘들면 좀 쉬면 안 돼?"

    연두의 말에 문소리는 내복 입고 울고 있는 아이를 안아준다. 친정 엄마의 '민원'을 들어주고, 한창 고집이 세지는 아이를 달래고, 은행에서 대출 신청을 하고, 시어머니 병원에 들러 홍시를 사다 드리고, 개런티 없는 영화에 출연해달라는 부탁을 들어주는… 모든 일이 '여배우가 오늘도' 감당해야 할 일들이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2편 '여배우는 오늘도'예요. 장소 섭외하는 데 정말 애를 많이 먹었거든요. 은행이며 치과, 병원까지 다 섭외해야 했으니까요. 찍고 편집할 때는 지긋지긋하기도 했는데, 막상 영화를 보니 장소가 달라지는 맛도 있고, 보는 재미가 있더라고요."

    이미지 크게보기
    /필앤플랜

    문소리의 집으로 보이는 '연두네 집'은 사실 주변 지인을 총동원해 만든 공간이다.

    "은행 대출 장면을 찍을 곳이 마땅치가 않아서 고민하던 중에 '독립영화제'에 참석하게 됐어요. 영화로도 바쁜데, 제가 독립영화에 빚진 바가 있으니 또 참석을 했죠. 마치고 류승완 감독과 식사를 하다가 그 이야기가 나왔어요. 마침 류 감독의 친한 학부형의 남편이 금융업계 고위 간부라 (일동 웃음) 장소 섭외를 해주더라고요. 장소 대여비만 해도 엄청난데, 얼마나 고마웠는지 몰라요."

    3부 '최고의 감독'을 위해서는 전국 방방곡곡에 장례식장을 섭외하러 다녔다. '한 장면을 위해 이런 수고까지 해야 하나'라는 의심은, 영화를 본 뒤 확신으로 바뀌었다. 공간이 주는 힘이 분명히 있다.

    "배우를 하다 감독을 해보니 외로움의 깊이가 다르더라고요. 배우는 상의할 사람이 있잖아요. 감독이오. 감독은 없어요. 아주 작은 사안부터 큰 결정까지 혼자 해야 해요. 제 장면을 찍을 때도 이 고민을 함께 나눌 사람이 없으니 외로웠어요. 제가 제 역할을 한 건 다른 이유가 없어요. 감독으로서 이 아이러니한 상황을 가장 잘 표현할 배우가 저였거든요.”"

    결국은 나 자신에 대한 공부

    '차려진 밥상에 숟가락만 올렸다'는 겸손은 이 영화에는 통하지 않는다. 좀처럼 밥상이 찾아오지 않는 여배우는, 한 끼의 식사를 위해 농사부터 지었다. 데뷔 18년 차, 트로피는 많지만 러브콜은 없는, '연기력은 쩔지만, 매력은 쫄리는' 상황이다. 영화에는 이 매력에 대한 고민이 묻어난다.

    "설경구 배우가 매일 줄넘기를 하는 이유도 매력 때문일 거예요. 배우들이 작품을 앞두고 다이어트를 하는 이유도 매력 때문일 거고요. 한 사람의 매력은 비단 외모가 아니에요. 연기도 아니고요. 그 사람을 바라보게 만드는 힘, 당기는 에너지가 모두 매력이에요. 아무리 외모가 훌륭해도 매력이 없으면, 뭔가 공허하거든요."

    이번 작품은 영화에 대한 공부인 동시에, 자신에 대한 공부이기도 했다. 자신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아닐 수 있다. 더구나 배우는 늘 평가를 받고 남의 입에 오르내린다. 하루는 '한국의 메릴 스트리프'라고 한껏 띄우다가, 이내 '한물갔다'는 평가를 받을 수도 있다. 속으로 단단해지지 않으면 휘둘리기 일쑤다.

    /필앤플랜

    "10년 동안 함께 지낸 친구들이 있어요. 다 영화를 너무 사랑하죠. 함께 여행도 가고, 술도 마시고, 수다도 떨어요. 그러다 함께 영화를 만든 거죠. 이거 만들면 고생이라는 걸 다들 알았지만, 그래도 해보고 싶었던 거예요. 저예산 영화 제작 비용을 지원받아서 배급이며 홍보까지 다 저희끼리 했어요. 함께 같은 곳을 바라보면서 온 사람들이 함께 만들어낸 거죠."

    붉은 드레스를 입고, 빨간 하이힐을 신고, 길게 웨이브 진 머리를 날리며 달리는 포스터도 그렇게 만들어졌다. 1년 중 가장 더운 날이었다. 운동장에 개미 한 마리도 보이지 않던 날, 육상 경기장을 뛰고 구르면서,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났다고 했다.

    "'우리 지금 이게 뭐하고 있는 거냐?' 하면서 같이 웃었어요. 그 웃음이 포스터에 담겨서, 아마 제일 저처럼 나온 거 같아요."

    영화에서 문소리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 중 하나도 '문소리가 달리는 장면'이다. 돌연 차에서 내려 벌판을 달리는 문소리, 당황한 매니저는 차로 그를 따라가지만 문소리는 멈추지 않는다. 한참을 달린 후에야 후드티의 모자를 머리에 쓰고 흡사 복서처럼 비장한 모습으로 차로 돌아온다. 기다리다 지친 매니저는 문소리가 다가오자, 차를 출발한다. 문소리는 소리를 지르며 차를 쫓아간다.

    Run & Learn

    "아이를 낳고 산후우울증이 심하게 왔어요. 숨이 잘 안 쉬어져서 조리원 바깥을 막 뛰었어요. 그렇게 뛰어야 좀 살겠더라고요. 지금도 가슴이 답답하면 뛰는 게 도움이 돼요. 호르몬이 좀 올라오는 기분이기도 하고요. 달리기만 보면 제 신체 나이는 스물하나라니까요.(웃음)"

    '자신에 대해 잘 안다'는 의미는, 어떨 때 자신의 호르몬이 솟구치고 또 가라앉는지를 안다는 의미인지도 모른다. '안정'이나 '여유'는 문소리의 호르몬을 바꾸지 못한다. 여배우가 출연할 영화가 없으면, 영화를 만든다. 척박한 황무지라면, 낫이라도 들고 땅을 개간한다. 그렇게 개간한 땅이 비록 한 평 남짓이라도 그 한 평이 없던 이전보다는 훨씬 나은 삶인 것이다.

    /필앤플랜

    "저는 운이 좋은 편이었어요. 처음부터 좋은 감독님들을 만나서 사랑받으며 영화를 만들었으니까요. 제가 한창 활동하던 때에는 〈박하사탕〉, 〈오아시스〉뿐 아니라 〈사과〉,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 〈가족의 탄생〉 같은 영화들이 만들어질 때였어요. 천만 영화가 아니라 300만, 400만 영화도 꾸준히 나왔죠. 지금은 그렇지 않다고 해서 영화계 탓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빚을 갚는 심정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으려고 하죠."

    덕분에 가족과 아이와 보내는 시간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연두는 이제 엄마, 아빠가 하는 일이 어떤 일인지는 알지만 '왜' 그 일을 하는지는 아직 모른다. 그 질문에 대답하는 게 그의 숙제이기도 하다.

    "연두가 일곱 살이 되면서 질문이 많이 늘었어요. '엄마는 몇 살 때부터 영화가 좋았어?', '누가 엄마한테 연기를 잘한다고 말해줬어?' 이런 것들을 묻죠. 대답하다보면 저도 생각이 많아져요.(웃음) 친정 엄마는 그렇게 다 이야기해주면 피곤하다고 말리시지만 제가 할 수 있는 대답은 해주려고 하죠. 남편은 아이랑 한번 이야기를 시작하면 2시간씩도 해요."

    남편 장준환 감독은 문소리 감독의 첫 작품에 "처음 치고는 잘했다"는 말을 해주었다. 서로 칭찬에 박한 것을 감안하면, 꽤나 인정받은 셈이다. 문소리도 이 작품으로 남편을 이해하는 폭이 넓어졌다고 했다. 결국 영화를 통해 얻은 건 인생에 대한 이해다. "아이도 인생은 '외로운 거'라는 걸 알아가는 것 같아요. '인생은 원래 외롭다'는 면에서 각자에게 주어진 몫을 잘 감당해야죠.(웃음)"

    내일의 봉사를 위해 오늘 더 유명해지고 싶은 배우
    칸이 두번이나 소환한 배우 김옥빈
     
  • Copyright ⓒ 조선일보 & Chosun.com
  • 이전 기사 다음 기사
    기사 목록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