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상병들은 노르망디 절벽에 기대서 책을 읽었다

사람은 왜 책을 읽는가?
전쟁, 천재지변과 같은 급박한 상황에서도 사람들은 책을 찾았다.
책은 정신을 지켜주는 가장 가벼운, 그리고 든든한 무기가 되었다.

  • 김시덕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교수 
  • 편집=한승미

    입력 : 2017.09.08 07:02

    [김시덕의 종횡무진 인문학] 매닝 '전쟁터로 간 책들'
     

    2011년 3월 11일에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났다. 그 직후, 이와테현 모리오카에 있는 사와야 서점으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시민들은 무슨 책이라도 좋으니 아무튼 책을 달라며 앞다퉈 찾아왔다.

    대재앙 이후, 컴퓨터도 스마트폰도 사용할 수 없고, 먹을 것도 부족한 절박한 시간이 이어졌다. 그런 비상 상황에서 책은, 시민들이 자기 자신의 정신을 유지할 수 있는 가장 값싸면서도 안정적인 생활필수품이었다.

    똑같은 일이 제2차 세계대전 때에도 있었다.

    추축국(樞軸國) 독일과 일본에 맞서 싸우기 위해 미국은 전 세계로 병사들을 보냈다.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에 부닥친 병사들은, 정신을 지켜줄 물건을 찾았다. 이러한 절박한 요구에 답하기 위해, 뒷주머니에 넣을 수 있는 작은 크기의 책이 채택됐다. 페이퍼백 형태의 진중문고다.

    진중문고로는 연애소설에서 법률서까지 실로 다양한 책이 선정됐다. 병사들은 내용을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다. 노르망디로 출발하기 전, 짐의 무게를 줄이기 위해 이런저런 물건을 버리는 중에도, 책을 버리는 병사는 거의 없었다. 책은 "많은 군인에게 절실히 필요한 오락을 제공해주는" 유일한 물건이었다.

    그리고 노르망디 전투가 시작됐다. 잘 알려졌듯이 상륙 초기에 연합군 병사들은 몇 발자국 내딛기도 전에 독일 측의 공격에 쓰러졌다. 부상병들은 노르망디 바닷가에 쓰러진 채로 책을 읽었다. "오마하 해변을 뚫고 나아간 군인들은 심한 부상을 당한 전우들이 절벽 아래쪽에 몸을 기대고 책을 읽던 광경을 결코 잊지 못했다." 소총이 병사들의 목숨을 지켜주는 무기였다면, 책은 정신을 지켜주는 가장 가벼운 무기였다.

    [남정욱의 영화 & 역사] '라이언 일병 구하기', 그날 노르망디에 神은 없었다. /그래픽=이철원 기자

    전쟁터에서 병사들을 지켜준 책은, 전쟁이 끝나고 나서도 그들의 인생을 새로이 열어줬다. 폭탄이 터지는 전쟁터에서도 목숨 걸고 역사, 경영, 수학, 과학, 언론, 법, 고전문학을 읽어낸 그들이었다. 징용되기 전까지 책 읽는 습관이 없던 낮은 신분과 가난한 계층의 젊은이들도, 책을 읽는다는 것의 의미를 전쟁 중에 깨달았다. 전쟁이 끝나자 그들은 대학으로 가서 학업에 매진했다.

    사람은 왜 책을 읽는가. 대학에서 미국사를 전공하고 지금은 법조인으로 일하는 몰리 굽틸 매닝(37)의 '전쟁터로 간 책들―진중문고의 탄생'(책과함께刊)은 이 질문에 대한 근본적인 답을 준다. 필자가 지난 몇 년 사이에 읽은 최고의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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