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적 소비'라고 하면 덜 불편한가요?

'소비'라는 단어를 듣고 떠오르는 이미지는 무엇인가?
어쩌면 우리는 낭비와 과소비의 틀에 갇혀 소비에 대한 불편함을 감내해왔는지도 모른다.
저자는 소비가 반영하는 시대상과 변화를 말하며 중립적인 시각을 제안한다.

    입력 : 2017.09.01 06:53

    [북리뷰] 소비의 역사
     

    소비의 역사

    설혜심 지음|휴머니스트
    496쪽|2만5000원


    "아껴야 잘산다"라는 구호를 너무 오래 들었기 때문일까. '소비'라는 낱말은 낭비와 과소비를 떠올리게 한다. 이제 주변에서는 소비하는 인간(homo consumens)이 아닌 사람을 찾기 어렵지만 소비는 여전히 죄책감을 불러일으키는 어둠의 힘이 있다. 돌이켜보면 20세기 초까지 학계는 소비와 소비자를 맹비난했다. "잘 먹고 잘 입겠다는 욕구는 인간적인 것이 아닌 동물적 기능"(마르크스) "소비자란 결국 무의식적이고 비조직적인 개인들로, 아첨에 속아 넘어가는 얼간이 같은 존재"(보드리야르) "소비는 자본주의 생산체제의 재생산을 위한 것"(아도르노·호르크하이머)….

    한동안은 소비를 장려하다가 요즘은 환경보호를 위한 '적정 소비', 공정무역 등의 '윤리적 소비'를 강조하는 상황이니, 소비에 대한 불편함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설혜심(51) 연세대 사학과 교수는 이런 소비 행위에 대한 가치판단을 멈추고 중립적인 시각에서 보자고 제안한다. 문화사·미시사적 관점에서 소비가 시대상을 어떻게 반영하는지, 또 시대를 어떻게 바꿨는지를 들여다보면 그 시대 '사람'과 '일상'이 생생하게 복원된다는 것이다.

    미국 시어스사(社)의 우편 주문 카탈로그를 읽고 있는 19세기 미국 여성. 1895년 이 회사의 카탈로그는 532페이지에 달했다. 돈만 있다면 누구든 같은 상품을 살 수 있는 시대가 온 것이다. /휴머니스트

    20세기 미국 인종차별을 '소비'를 빼놓고 말할 수 없다. 흑인과 백인은 함께 소비하지 못했다. 식당도 버스도 '분리'라는 이름으로 차별이 이뤄졌다. 흑인은 백인 전용 간이식당과 버스에서 의자에 앉아 저항했다. 이는 자본주의적 체제 재생산, '구별짓기'와는 상관없이 동등한 소비를 통해 동등한 인권을 누리고 싶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또 다른 사례는 미국에서 1970년대에 나타난 소비자단체 '그레이 팬서(Grey Panther)'. '연령차별주의(ageism)'에 반대하며 고령자 관련 사회 정책에 목소리를 높였다. 이들은 노년층의 소비력을 과소평가하는 시장과 업체에 문제를 제기했다. 이들은 "왜 백화점에 베이비, 키즈, 영(young) 전문관과 여성 캐주얼, 여성 정장 코너는 있는데 노인 전용 상품관은 없느냐"고 질문했던 셈이다.

    저자의 안내에 따라 소비사(史)를 따라가다 보면 역사의 아이러니를 접한다. 1851년 미국 여권운동가 아멜리아 블루머가 고안한 여성용 바지 '블루머'를 보자. 아멜리아 블루머는 여성이 바지를 입기 어려웠던 시대에 움직이기 편한 펑퍼짐한 바지를 만들고 자기 이름을 붙였다. 이 옷을 소비하는 여성은 남녀 평등주의를 부르짖는 것이었다고, 설 교수는 썼다. 그런데 이 바지가 지금 일본 여학생들이 입는 핫팬츠 형태의 체육복 '부르마'의 먼 조상이다. 블루머를 일본식으로 읽으니 '부르마'가 된 것. 여성 인권 운동의 일환으로 만든 바지가 지금은 남성의 비뚤어진 성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물건이 된 셈이다. 최근 한 케이블방송에서 아이돌 지망생들에게 '부르마'를 입혔다가 관음증 논란을 자초했다. 이렇듯 소비에는 온갖 사례를 묶어내는 힘이 있다.

    흑백분리·애국소비 등
    소비현상으로 본 세상

    역사학자 설혜심 교수
    포르노로 쓰인 醫書 등
    시대별 소비史 담아

    설 교수는 포괄적으로 소비를 정의하면서 다양한 분야에서 흥미로운 일화를 찾아냈다.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유언으로 두 번째 아내에게 남겼다는 침대, 만화 '베르사유의 장미'에서 오스칼이 입고 나타난 터키풍 드레스, 16~17세기 영국의 목욕탕 문화, 19세기 현대 홈쇼핑의 선구자 격인 카탈로그의 등장, 각국의 성형 문화까지. 소비 행위 뒤에 숨겨진 함의를 찾아낸다. '의학서라 쓰고 포르노라 읽는다' '애국소비'처럼 흥미로운 주제가 여럿이다. 쉽게 읽히는 글이 200여장에 달하는 컬러 도판으로 단단히 무장했다. 인터넷 포털사이트에 연재했던 글을 묶어냈기에 가능했던 장점이다.

    소비라는 키워드로 여러 일화를 느슨하게 묶는 데는 성공했지만, 핵심 주장을 증명하겠다는 야심보다는 재밌는 읽을거리를 제공하는 데서 만족하는 느낌이다. 저자도 인정하듯, '소비'를 어떻게 정의할지부터가 합의되지 않은 현실도 학술적 엄밀함을 원하는 독자라면 아쉬운 대목이다.

    저자는 전공 분야인 서양 위주 서술로 일관한다. 동양이나 국내 소비사는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일례로 미국에서 일본 차를 때려 부수는 사건을 언급하며 '애국소비'의 역사를 짚어내지만, 물산장려운동이나 신토불이 같은 국내 사례 언급은 찾아보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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