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리가 끊어졌다… 피란은 아비규환이었다"

한강을 건너는 유일한 수단인 철교가 폭음과 함께 끊어졌다.
수많은 피란민들이 폭사하고, 국군 차량들이 강물 속으로 곤두박질쳤다.
퇴각하던 국군이 밀려오는 인민군의 진격을 저지하려고…

    입력 : 2017.06.25 13:54 | 수정 : 2017.06.26 15:17

    [북스]
     

    80대 강인숙 교수 6·25 회상… 67년 전 그날의 비극 생생
    불타는 마을·불타는 장독대 "간장도 분노도 함께 끓어올라

     ●어느 인문학자의 6·25

    강인숙 지음|에피파니|376쪽|1만8000원

    1950년 6월 28일 새벽 2시 30분. 한강을 건너는 유일한 수단인 철교가 폭음과 함께 끊어졌다. 수많은 피란민들이 폭사하고, 국군 차량들이 강물 속으로 곤두박질쳤다. 퇴각하던 국군이 밀려오는 인민군의 진격을 저지하려고 서둘러 철교를 폭파해 일어난 참사였다.

    강인숙(84) 건국대 명예교수는 그때 경기여고에 재학 중이던 열일곱 살 소녀였다. 그녀는 가족과 함께 피란길에 나섰다. 한강 철교가 멀리 보이는 강변에서 오도 가도 못한 채 발을 동동 굴렀다. 짙은 어둠 때문에 철교는 보이지 않았다. 철교가 폭파된 것도 몰랐다. 그쪽을 응시할수록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많은 차들이 남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그런데, 철교 중간에 있는 어느 한 지점에 다다르면, 약속이나 한 듯이 헤드라이트들이 꺼져 버리는 것이다. 필름이 끊기듯이 깔끔하게 불들이 꺼져 버리고, 또 꺼져 버리고, 또 꺼져 버리고…그 남쪽에는 어둠만 있었다."

    국군 차량들이 철교 폭파를 통지받지 못해 어둠을 뚫고 달려가다가 속속 추락한 것이다. 강인숙 교수는 지금도 67년 전 그날 밤의 비극을 생생히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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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5의 비극을 한 장에 압축했다고 평가받는 ‘대동강 철교’. 당시 AP통신 종군기자였던 막스 데스퍼는 1951년 1월에 찍은 이 사진으로 그해 퓰리처상을 받았다. 1·4후퇴 당시 부서진 대동강 철교 난간에 달라붙어 목숨을 걸고 전진하던 피란민들. 상당수는 몸을 가누지 못하고 강 아래로 떨어졌다.

    문학평론가로 활동해 온 강 교수의 6·25 회상록은 서정적 묘사와 사실적 서사를 골고루 뒤섞었다. 소녀의 순수한 시점으로 본 전쟁의 풍속도가 마치 성장소설처럼 재현됐다. 소녀의 의식에 각인된 전쟁의 이미지는 '끓어오르는 간장과 된장'이었다. 포화에 불타는 마을을 지나칠 때 본 장독대의 옹기들이 잊히지 않는다는 것. "집들이 타면서 생긴 열로 장독대의 옹기들이 달아서 집집마다 장이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독 속에서 부글부글 끓고 있는 것은 슬픔이 아니라 분노였다. 장독들이 하늘을 향하여 욕설을 퍼붓고 있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강인숙 가족은 한강을 건너지 못했다. 한강 철교가 폭파되자 군인들은 어렵사리 조각배를 모아 강을 건넜다. 그런데 그들은 강변에 남은 피란민들을 향해 조각배를 보내지 않은 채 남하했다. 다급해진 피란민 중 몇몇이 헤엄을 쳐서 조각배를 끌고 오더니 갑자기 선주(船主)가 됐다. 살겠다고 몰려드는 피란민들에게 엄청난 돈을 요구했다. 아비규환의 거래가 벌어졌다. 그래도 배에 매달리는 사람이 줄지 않았다. 몸싸움이 벌어지고, 배 한 척에 수십 명이 몰려들어 엎치락뒤치락했다. 배가 뒤집혀 사람들이 물에 빠졌다. 흩어진 가족이 울부짖기도 했다. 강인숙은 "군중의 욕심이 알몸을 드러낸 악몽 같은 장면이었다"고 회상했다.

    어쩔 수 없이 강인숙 가족은 서울에 남았다. 강인숙은 인민군 치하의 서울 시민 풍속도를 세밀하게 재현했다. 시민들이 부르주아로 몰리지 않으려고 일부러 허름하게 입고 다녔다는 것. "남정네들은 헌 바지에 베잠방이 같은 것을 걸치고 검은 고무신을 신으려 했으며 여자들은 무채색의 무명 옷 같은 것을 찾아내서 입었다. 치마보다는 몸뻬를 선호했고, 화장도 하지 않았다. 파마도 기피 사항에 들었다."

    강인숙은 서울 수복 직전의 상황도 기억했다. "인민군들은 정말로 눈에서 불이 일 것 같은 표정으로 마을 구석구석을 뒤지고 다녔다. 그들도 우리처럼 먹을 것이 없었고, 그들도 우리처럼 겁에 질려 있었던 것이다./(중략)/9월 28일 새벽은 총소리도 없이 아주 조용하게 열렸다."

    강인숙 가족은 1·4 후퇴 때는 피란길에 올랐다. 가족은 걸어서 군산까지 갔다. 강인숙은 "거기에서 나의 소녀 시절은 끝났다"고 했다. 팔순을 넘긴 인문학자 강인숙은 자기 세대에 대해선 "너무 일찍 철이 들어서, 제대로 어른이 되지 못하여 정신적인 기형아가 돼버린 아이들"이라고 담담하게 썼다.

    [문학평론가·소설가의 6·25, 그날의 기억]

    6·25 기억을 진솔하게 펼친 문인들이 적지 않다. 문학평론가 유종호(82)는 중학생 때 겪은 전쟁 체험을 소상하게 밝힌 책 '그 겨울 그리고 가을-나의 1951년'(2009년)과 '회상기-나의 1950년'(2016년)을 낸 바 있다. 그는 "소설가처럼 말을 꾸며내는 재주는 없지만 과거를 그대로 기억하고 그때 상황을 전달할 수는 있다"고 밝혔다.

    소년 유종호는 1·4 후퇴 때 고향(충주)을 떠나 청주에 가서 미군 부대에 취직했다. 사무실 청소를 하는 재니터(janitor)가 된 것. 알파벳을 쓸 줄 안다고 해서 한국인 노무자 관련 서류를 담당하기도 했다. 미군이 떼로 몰려들자 몸을 피한 양공주를 숨겨줬다가 미군에게 욕설을 들으며 엉덩이를 차인 적도 있다. 그 와중에도 소년 유종호는 정지용과 윤동주의 시를 외우며 참담한 현실을 견뎌냈다.

    소설가 박완서(1931~2011)는 서울대 국문과 1학년 때 6·25를 맞았다. 그는 당시의 개인사(個人史)를 사실적으로 재현해 회상록이나 다름없는 자전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를 1992년 발표했다. 서울에 살던 박완서는 전쟁이 터졌다는 소식을 듣곤 "최악의 경우라 해도 다만 몇 발짝이라도 38선 이북에서 밀었다 당겼다 하는 장기전이 되려니 했다"고 회상했다. 박완서는 인공기와 태극기가 번갈아 올라갈 때 이념의 폭력을 겪은 뒤 1·4 후퇴 때 피란길에 올랐다. 그때 박완서는 "벌레의 시간도 증언해야지, 그래야 난 벌레를 벗어날 수가 있다"고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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