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장판 된 21세기 중동, 100년 전 스파이에게 책임을 묻다

100년 전 네 명의 스파이를 통해
난장판이 되어버린 현대 중동을 이해해보자.

    입력 : 2017.06.19 10:00

    [Books]
     

    아라비아의 로렌스

    스콧 앤더슨 지음|정태영 옮김
    글항아리|880쪽|4만원

    당신이 클래식 영화의 애호가라면, '아라비아 로렌스'(1962)의 한 장면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태양이 이글거리는 사막, 까마득히 먼 곳에서 점 하나가 보인다. 낙타를 타고 검은 천으로 온몸을 휘감고 있는 사내가 점점 다가온다. 마침내 울리는 총성…. 영화사에 남은 명장면이지만, 사실 그 전에 더 위력적 장면이 있다. 스크린 가득 사막이 펼쳐지기 직전, 로렌스는 성냥불을 입으로 불어 끈다. 미국 국제 분쟁 전문기자이자 소설가인 스콧 앤더슨(58)의 관심은 로렌스가 아니라, 그 성냥불에 있다. 유럽 열강의 제국주의에 대한 불만이 끓어오르던 1910년대의 아랍, 이 무슬림의 땅에 휘발유를 뿌리고 성냥불을 붙이면 도대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따라서 당연하게도 이 책 '아라비아의 로렌스'는 로렌스의 영웅담이 아니다. 영화와 책의 한글 제목은 같지만, 영어 제목은 전치사 하나가 다르다. 영화는 'of', 책은 'in'. 영화의 로렌스가 대체 불가능한 단독 주연이었다면, 이 논픽션에서는 여러 영웅 혹은 악당 스파이 중 한 명일 뿐이다.

    스콧 앤더슨의 주인공은 4명이다. 1913년 안팎의 중동에서 활약했던 스파이들. 독일 제국의 바람둥이 고고학자 쿠르트 프뤼퍼, 미국 석유회사의 현지 주재원이자 국무부 특수요원 윌리엄 예일, 팔레스타인 땅을 되찾아 밀을 양산하겠다는 유대인 농업학자 아론 아론손, 그리고 우리의 에드워드 로렌스. 옥스퍼드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고고학자로 삶을 시작했다가 영국 정보요원으로 인생을 바꾼 사내다.

    ①영국 에드워드 로렌스, ②미국 윌리엄 예일, ③독일 쿠르트 프뤼퍼, ④시오니스트 아론 아론손. /글항아리

    로렌스를 제외하고는 낯선 이름들이겠지만, 각 인물의 회고록과 전기, 그리고 이스라엘 기록물보관소와 미국 스탠퍼드대 후버연구소, 영국 외무성 기록물 등 최근에야 비밀 해제된 많은 1·2차 자료를 통해 스콧 앤더슨은 저돌적으로 중동의 최근 100년을 가로지른다. 압축하면 이러하다. 네 주인공의 조국인 미국·영국·독일 등 서구 열강은 어떤 탐욕과 속임수로 이 오스만 제국 말기의 '거대한 전리품'을 뜯어먹으려 했는가.

    앤더슨은 네 스파이의 음모와 배신을 교차 편집하면서, 소설가의 필력으로 중동의 천일야화를 펼친다. 사막의 모래폭풍을 배경으로 영국 스파이 로렌스와 미국 스파이 예일이 서로 아닌 척하며 상대 의중을 떠보는 첫 장면부터 흡인력 있다. 몰락한 귀족 출신의 미국 청년 예일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중동 현장을 누빈 첩보원들 가운데 유일한 미국인이었다. 그는 전쟁이 끝난 후에도 뉴욕에 있는 스탠더드 오일사로부터 계속 월급을 받았고, 미국이 중동 정책을 세우는 과정에 작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아랍인 복장으로 정체를 숨긴 독일 고고학자 프뤼퍼는 영국·프랑스 등이 선점한 중동에서, 독일의 지분 확보를 위해 전력투구한 스파이였다. 방법은 이간질의 성냥불 점화. 제국주의·식민주의·기독교 등 이념과 종교에 맞서야 한다는 범아랍 지하드(聖戰)의 한 뿌리가 됐다.

    美 분쟁 전문기자 앤더슨 논픽션
    로렌스 등 미영독 첩보전 그려

    서양제국주의·아랍민족주의 갈등
    오늘날 중동 분쟁 뿌리 찾아내

    900쪽 가까운 방대한 분량이 부담스럽지만, 로렌스의 입체적 인생에 대해서는 몇몇 직접 인용으로 요약해보자. 23세 청년이던 1911년의 로렌스를 중동 발굴 현장에 추천하는 고고학자 데이비드 호가스의 편지는 이렇게 시작한다. "선생님, 옥스퍼드 출신의 로렌스라는 젊은이가 있습니다. 혹시 자리 하나 마련해주실 수 있는지요. 선생님께 인정받고도 남을 사람이라고 확신합니다. 이 청년을 좋아하실 겁니다. 참고로 그는 음식을 가리는 법이 전혀 없습니다. 어디다 던져놓아도 살아갈 친구입니다."

    고고학에서 아랍으로 삶의 목표를 바꾼 로렌스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은 1915년 그가 집에 보낸 편지다. "시리아에 관한 한, 이제 우리의 적은 터키가 아니라 프랑스입니다."

    세계사를 통해, 우리는 영국이 아랍 독립의 약속을 여러 번 배신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영·프 고위 외교관의 이름을 딴 이른바 사이크스-피코 협정(1916). 두 나라는 중동 지도를 날림으로 끼워 맞췄고, 그 결과 프랑스는 시리아 전역을, 영국은 이라크를 차지했다. 아랍 독립국들은 아라비아 사막 바깥 오지로 밀려났고, 로렌스의 꿈도 함께 스러졌다.

    배우 피터 오툴이 로렌스(앞의 흰 아랍 옷 사내) 역을 맡은 영화‘아라비아의 로렌스’. 스크린에서 로렌스는 단독 주연의 영웅이었지만, 앤더슨의 논픽션에서는 여러 영웅 혹은 악당 스파이 중 한 명이었다. 100년 전의 서양제국주의는 오늘날 아수라장을 겪고 있는 중동 분쟁의 직접 원인 중 하나였다. /게티이미지코리아

    지난 1주일 동안 우리는 국제 뉴스의 윗자리를 차지하는 중동을 다시 한 번 목격하고 있다. 미 트럼프 대통령이 사우디 순방에서 춤을 춘 뒤 중동의 맹주 국가는 카타르에 단교 조치를 감행했고, 사우디 오일 달러에 의존하던 가난한 몰디브 등 8국이 동참했다. 이 와중에 IS는 이란 혁명 성지인 호메이니 묘와 의사당에 테러를 가했고, 이란은 사우디와 미국이 배후라며 복수를 다짐했다. 아수라장의 뿌리를 찾다보면 1400년 전 수니파와 시아파 분열까지 거슬러 올라가겠지만, 좀 더 가까운 책임이 100년 전 이 스파이의 조국들이 벌인 뒷거래와 독단으로 그은 국경선에 있음을 이 책을 읽다 보면 알게 된다.

    표면적으로는 한 편의 첩보 드라마와 같은 엔터테인먼트의 쾌감이 '아라비아의 로렌스'의 매력이지만, 난장판이 되어버린 현대 중동을 이해하는 실용적이고도 교훈적인 독서라는 점에서 더 의미 있다.

    1917년 8월 로렌스가 쓴 '영국군 장교들에게 전하는 충고'의 한 구절을 마지막으로 인용한다. "모든 문제를 내 손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을 버릴 것. 우리가 단번에 해치우느니 아랍인이 천천히 풀어가는 편이 낫다. 이것은 그들의 전쟁이고, 우리는 조력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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