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와 자선 사이 '제3의 길'을 찾다

복지와 기부를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것은 옛날이다.
복지국가라는 유럽에서도 '필란트로피'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다.
지난 25년 유럽 내 필란트로피를 연구해 온 테오 슈이츠 교수를 만나 보자.

    입력 : 2017.06.18 10:47

    [Cover Story] 유럽 내 필란트로피 연구 선구자 '테오 슈이츠' 암스테르담 자유대 교수
     

    "정부냐, 시장이냐, 복지국가냐, 민간 기부 활성화냐, 이런 이분법은 고리타분하다. 현실에도 안 맞는다. 복지국가라는 유럽에서도 20년 전부터 '필란트로피(Philanthropy)'의 역할과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다. 정부는 그 영역의 존재를 인정하고, 최대한 역할할 수 있도록 뒷받침해야 한다."

    테오 슈이츠(Theo Schuyt·사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자유대 필란트로피학과 교수의 말이다. 최근 아름다운재단은 그의 책 '이타주의자의 시대: 유럽 필란트로피의 뿌리와 현대적 재발견'을 번역·출판했다. 유럽 내 필란트로피를 다룬 다소 딱딱한 책에서 그는 "복지국가와 필란트로피는 함께 가야 한다"며 "민주주의를 완성시키는 기제로서도 필란트로피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했다.

    유럽 내 필란트로피 학문의 선구자인‘테오 슈이츠’교수는“건강한 필란트로피 분야 없이 민주주의가 번창하기란 어렵다”고 했다./ 테오 슈이츠 교수 제공

    '복지국가의 꽃'이라는 유럽에서, 민간 기부는 어떻게 이뤄지고 있을까. 미국식 기부 문화와 유럽식 복지 정책, 둘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한국은 어디로 나아가야 할까. 창간 7주년을 맞아, 더나은미래는 지난 25년 유럽 내 필란트로피를 연구해 온 테오 슈이츠 교수를 스카이프로 인터뷰했다. 네덜란드에서 나고 자란 그는 유럽 내 필란트로피 연구를 이끌어 온 선구자다.

    1995년부터 네덜란드 내 민간 규모를 집계한 '기빙 인 더 네덜란드(Giving in the Netherlands)' 연구를 이끌어왔으며, 10년 후인 지난 5월 초엔 40여 연구진과 함께 유럽 전역의 민간 기부 현황을 담은 최초의 연구 '기빙 인 유럽(Giving in Europe)'도 발표했다. 2007년엔 유럽 전역의 필란트로피 연구자들을 모아 '유럽 필란트로피 연구 네트워크'도 결성했다.

    복지국가 유럽 vs 자본주의 미국?

    ―흔히 유럽과 미국은 대척점에 있다고 여겨진다. 작은 정부에 민간 기부가 활성화된 미국, 세금을 내고 정부가 사회복지 서비스를 제공하는 유럽 모델이다. 유럽 내에서 민간 기부에 대한 시선은 어땠나.
    "실제로 유럽에서는 오랜 기간 자선이나 기부와 같은 '필란트로피'를 구시대적 유물로 여겼다. 기부나 자선은 복지국가가 아니었던 과거에나 했던 것으로 생각했다. 이제는 복지국가가 됐으니 필란트로피 영역 전부를 국가가 맡아야 할 책무라고 본 것이다. 기부를 부자들의 '뽐내기' 정도로 치부하는 이도 많았다. 그런데 1990년대부터 달라지기 시작했다. '필란트로피'가 다시 늘어나기 시작했다. 과거의 '자선(Charity)' 방식과도 다른 형태였다."

    유럽 1990년대 이전까지
    "자선은 국가의 의무"

    복지국가 한계 인식하고
    '글로벌 시민의식' 생기면서
    민간 재원 기반 필란트로피 늘어나

    제3섹터청 만들어 국가가 예산 지원
    정부·민간 연합한 영국 사례 배워야

    ―어떤 흐름이 있었나.
    "하나는 정부, EU 등에서 필란트로피 영역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기 시작했다. 영국 블레어 정부는 1998년 '더 콤팩트(The Compact)'라는 파트너십을 통해 제3섹터를 복지국가 제도권으로 끌어들였다. 2006년에는 '제3섹터청(Office of the Third Sector)'도 설치했다. 유럽연합 집행위원회(EC·이하 유럽연합위원회)에서도 필란트로피를 중요한 민간 파트너로 인식했다. '공공의 선(善)'이라는 같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또 다른 협력 파트너로 받아들인 것이다. 현장에서 체감하는 변화도 컸다. 유럽 내에서 1990년대 이후로 민간 재단이 눈에 띄게 늘었다. 독일에서는 지역 재단이 빠르게 성장해, 미국에 이어 지역 재단이 둘째로 많은 곳이 됐다. 네덜란드에서 '네덜란드 모금가 협회'나 '재단 연합' 등이 만들어진 것도 이 시기였다."

    복지국가에서, 민간 재원에 기반한 필란트로피가 늘어난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그가 설명하는 이유는 이렇다. 하나는, 사람들이 복지국가의 한계를 지켜봤다는 것. 모든 문제를 국가에 맡겨둘 수도, 국가가 늘 최선의 답을 내는 것도 아니었다. 둘째 이유는 스스로를 '글로벌 시민'으로 인식하는 이들과, 문제 해결에 직접 뛰어드는 이가 늘었다는 점이다. 서유럽만의 상황은 아니었다. 세계적으로도 상황은 비슷했다. 부(富)는 늘고 인구는 고령화됐는데, 재산을 물려줄 자식은 예전만큼 많지 않다. 세대 간 이전되는 부의 총량이 많아진 것 역시 한 이유였다. 그는 "지난 20여 년은 유럽 외에도 전 세계적으로 필란트로피가 성장했던 황금기였다"며 "앞으로도 한동안은 계속 확대될 것"이라고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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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지와 필란트로피 결합한, '제3의 길'

    책 전반에서, 그는 "정부와 시장의 이분법을 뛰어 넘어 '제3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복지국가가 이룩한 성취를 바탕으로 필란트로피의 가치가 통합돼야 한다는 것. 그에 따르면, 영국은 유럽 내 정부와 필란트로피 분야가 함께 첫발을 뗀 선구자다.

    ―제3의 길을 처음으로 시도했던 영국 사례를 소개해 달라.
    "1998년, 블레어 정부는 전 세계 최초로 제3섹터와 파트너십 협약을 맺었다. '더 콤팩트(The Compact)'라는 협약이다. 정부와 필란트로피 섹터 간 협정이었는데, 골자는 이렇다. '정부에서 필란트로피 분야를 존중하겠다, 자선단체의 사회적 중요성을 인식하겠다, 함께 협력하는 문화를 만들겠다'. 이후 2006년엔 내각 사무처에 민간단체·사회적기업·공동체이익회사 등을 총괄하는 '제3섹터청'을 설립하고 예산도 지원했다. 민간의 자발적 기부를 제도적 차원으로 통합한 것이다."

    ―지난해, 정권이 바뀐 이후로 영국 내 제3섹터청 예산이 삭감되고 자원봉사계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고 들었다. 그간의 시도가 후퇴하는 건 아닐까.
    "영국 상황은 우려된다. 그러나 지난 10년간, 네덜란드, 프랑스, 스페인 등 유럽 전역에서 필란트로피 연구가 활발해졌다. 다른 나라에서도 복지 패러다임에 필란트로피를 더하려는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

    영국 사례에 착안, 네덜란드 역시 2011년 정부와 필란트로피 분야 간에 협약을 맺었다. '내각은 자선단체의 사회적 중요성을 인식하고, 더 나은 사회를 위해 공동의 노력을 할 준비가 됐으며, 적극 지원하고자 함을 선언한다'는 내용이었다.

    ―협약만으로 실효성이 있나. 형식에 그치는 건 아닌가.
    "그렇지 않다. 네덜란드 헤이그에는 '1818 재단(Foundation 1818)'이라는 문화 재단이 있다. 이곳에서는 헤이그 주정부와 별도로 협상을 했다. 기부금이 늘어도 정부 예산을 줄이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정부는 필란트로피를 대체재로 보고, 모금이 늘었다고 예산을 줄여선 안 된다. 민간 단체도 정부와 끊임없이 이야기하며, 복지의 중요한 파트너로 인정받고, 그만큼의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럼에도 정부와 민간 필란트로피 영역의 협력은 결코 쉽지 않다. 이유가 무엇일까.
    "두 영역의 생리가 완전히 다르다. 정부는 4~5년을 주기로 돌아간다. 민간재단에서는 한 사업을 20~30년, 길게는 50년을 바라보면서 가기도 한다. 또 필란트로피 분야 자체가 조직화되지 않았다. 정부 입장에서는 누구와 함께 일해야 하고, 협의해야 하는지 헷갈린다. 그리고 민간재단이 어떤 일을 하는지 잘 모르는 이가 많다. 자꾸만 알리고 소개해야 한다.

    "필란트로피… 민주주의를 위한 '사적인' 행동

    그는 책의 상당 부분을 필란트로피의 정의를 다듬는 데 쏟는다. 그가 정의하는 필란트로피는 "공공의 선을 달성하기 위해 개인이 가진 자원을 자발적으로 내놓는 것." 어려운 이들에게 당장 필요한 것을 제공하는 것이 자선(Charity)이라면, 빈곤, 환경, 교육, 다양성 등 더 확대된 가치를, 오랜 기간을 바라보며 간다는 것도 큰 차이점이다. 그는 "필란트로피는 의회 민주주의를 보완하는 직접 민주주의로서의 함의도 크다"고도 강조했다.

    ―'민주주의는 필란트로피를 필요로 한다'는 문장을 인용하기도 했다. 어떤 의미인가.
    "정치 민주주의는 다수결로 결정된다. 어떤 이슈를 우선순위에 둬야 하는지, 예산을 어떻게 편성해야 할지 등 각각의 의사결정이 힘과 다수결에 의해 결정된다. 소수자가 늘 생긴다. 필란트로피는 그보다 훨씬 더 직접적인 참여 방식이다.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슈에 내가 가진 자원을 직접 투입한다. 필란트로피가 성숙한 곳은 민주주의도 성숙하고, 사회 내 다양성이 높다."

    ―같은 맥락에서, 기부나 필란트로피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도 많다. 돈을 가진 이들이 세상을 좌지우지한다든지, 시스템은 바꾸지 않으면서 수혜적으로 문제만 완화한다는 비판이다.
    "세계 부자들이 큰돈을 기부할 때 따르는 위험성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미국이든, 유럽이든, 네덜란드든 전체 기부 시장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건 개인 기부다. 우리가 매일 듣는 건 마크 저커버그(페이스북 창업자), 빌 게이츠(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 등 손꼽히는 부자들의 '특별한' 이야기지만, 기부 시장 전체를 놓고 보면 그들은 소수라는 것이다. 게다가 불평등이나 빈곤은 필란트로피로 인한 결과는 아니다. 불평등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정책과 기부 중 이루고 싶은 공공 목적에 따라 더 나은 전략이 있을 것이다. 그중 선택하는 문제다."

    ―필란트로피 영역을 키우기 위해, 무엇이 필요할까.
    "필란트로피 자체가 독립적 전문 분야로 자리매김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학술 연구가 뒤따라야 한다. 필란트로피의 실체가 있는지, 있다면 어느 정도 규모인지, 무엇을 하는지 등을 먼저 증명하는 게 이 분야를 성장시키는 첫걸음이다. 그 과정을 통해 신뢰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정부의 지원은 큰 차이를 만든다. 정책, 협약 등을 통해 가능하다. 동시에 정치인들과 필란트로피 영역 종사자들도 자주 만나야 한다. 서로가 서로를 너무 모르는 경향이 있다. 자주 이야기하고 지향하는 바를 나누다 보면 협력이 가능한 지점을 찾아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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