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인 가구가 만든 랜선이모, 랜선맘, 랜선집사…

'랜선이모, 랜선집사'라는 말이 있다.
SNS, 블로그, 유튜브 등에 공개된 남의 집 아이를 보면서 내 조카인 듯 아낀다는 의미다.
1인 가구들은 귀여운 조카를 자주 만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아쉬움을 이렇게 채우고 있다.

    입력 : 2017.05.19 07:10

    [트렌드] 1인 가구가 부른 랜 가족 시대
     

    /주간조선

    곤히 잠이 든 네 살 여자아이를 깨우는 1분짜리 짧은 동영상이 페이스북에 올라왔다. 순식간에 9만개의 ‘좋아요’가 달렸다.

    “눈썹 너무 예쁘다. 안 예쁜 데가 어딜까, 발톱도 예쁠 거야ㅠㅠ 내 딸이었음 뽀뽀 너무 많이 해서 얼굴 닳았을지도 몰라.” “귀여워, 귀여워. 진짜 아기가 이렇게 예쁠 수가 있나. 그 누구보다 제일 예뻐. 사랑한다.” 마치 팔불출 부모가 남긴 것 같은 댓글도 4300여개가 이어졌다.

    SNS 인스타그램 팔로어 수만 65만5000여명에 달하는 네 살 권율이의 페이스북 모습이다. 마치 자신의 딸인 듯 조카인 듯 권율이의 사진과 영상에 환호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 있다. ‘랜선이모’ ‘랜선맘’이라는 단어다.

    ‘랜선이모’란 인터넷 네트워크를 연결하는 랜(LAN)선과 이모가 합쳐져 만들어진 말이다. SNS, 블로그, 유튜브 등에 공개된 남의 집 아이를 보면서 내 조카인 듯 아낀다는 의미다. 개인적인 친분 관계는 없지만 가상 이모 역할을 한다는 말인데, 비슷한 말로 ‘랜선맘(랜선+엄마)’ ‘랜선삼촌’ 등이 있다.

    랜선이모, 랜선맘은 갑자기 등장한 현상이 아니다. 몇 년 전부터 인기를 얻은 TV 육아 예능프로그램이 시작이다. ‘슈퍼맨이 돌아왔다’ ‘아빠 어디 가’ 같은 육아 예능프로그램에 등장하는 아이들은 스타 배우 못지않게 인기를 얻었다. 출연자 아이들의 생일을 챙겨주고 방송국 시상식에 참여해 응원을 보내주던 이때의 랜선맘은 마치 아이돌 그룹의 팬 같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최근의 랜선맘은 오프라인 활동을 거의 하지 않는다. 랜선이모가 ‘랜선조카’ 삼는 아이도 한 명에 그치지 않는다. ‘슈퍼맨이 돌아왔다’를 보면서는 출연자 승재의 랜선이모가 되었다가 페이스북을 켜면 권율이의 랜선이모가 되는 식이다. 이름도 모르지만 귀여운 행동을 하는 외국인 아기의 동영상에 ‘좋아요’를 누르고 ‘귀여운 아기 사진’을 검색한다.

    랜선이모, 랜선맘의 모습은 ‘랜선집사’와 무척 닮았다. ‘랜선집사’는 고양이를 키우지 않지만 다른 사람이 키우는 고양이 사진, 동영상 등을 보면서 귀여워하는 네티즌을 아우르는 말이다. 고양이를 키우는 사람을 ‘집사’라고 부르는 온라인 용어에서 파생된 단어다. ‘랜선집사’는 집사라고는 하지만 고양이뿐 아니라 개를 비롯한 여러 반려동물을 좋아하는 사람을 모두 지칭하기도 한다.

    /주간조선

    당장 SNS만 봐도 이런 현상이 확인된다. 페이스북 페이지 ‘고양이의 모든 것’ ‘강아지의 모든 것’은 각각 27만개, 19만개의 ‘좋아요’를 받은 인기 페이지다. 반려동물의 귀여운 영상과 사진이 올라오는 ‘펫밀리’라는 페이지도 16만명 넘는 팔로어를 거느리고 있다. 고양이를 인터넷 용어로 바꾼 ‘냥이’에 개를 합성한 ‘개귀엽냥’ ‘개좋냥’ 같은 페이지도 수만 개의 ‘좋아요’를 받는다.

    '개냥이’ ‘댕댕이’ 같은 신조어도 생겼다. ‘개냥이’란 개처럼 사람을 잘 따르는 고양이를 뜻하는 말이다. ‘멍멍이’라는 단어를 잘못 보면 ‘댕댕이’처럼 보인다고 해서 개를 가리켜 ‘댕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나만 없어 진짜, 사람들 고양이 다 있고 나만 없어”라는 문장은 트위터 이용자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고 있다. 고양이를 키우지 못한 채로 고양이 영상만 보면서 만족해 하는 모습을 표현한 문장이다.

    그런데 개와 고양이 영상을 즐겨 보는 현상은 우리나라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지난해 8월 대구에서 열린 대한민국IT융합박람회에서는 ‘인터넷 고양이 이론’이라는 이색적인 컨퍼런스가 열렸다. 캐나다 윌프리드로리에(Wilfrid Laurier)대학의 인문학부 앤드루 허먼(Andrew Herman) 교수를 비롯해 세계 여러 대학의 학자들이 참여한 컨퍼런스였다.

    "적당한 거리가 좋다”

    허먼 교수는 이 자리에서 2015년을 기준으로 인터넷에 업로드된 고양이 이미지는 65억장으로 고양이가 나오는 유튜브 동영상 조회수는 250억회이며 영상당 평균 조회수가 1만2000회라고 밝혔다. 이 발표에 대해 올드도미니언(Old Dominion)대학의 위트코워(D.E.Wittkower) 교수는 “고양이는 독립심, 냉정함, 거리감을 상징하는데 온라인 내에서 인간 대 인간의 관계와 매우 유사한 측면이 있다”고 설명했다. 이에 따르면 사람들이 ‘랜선집사’를 자칭하는 이유는 단순히 고양이가 귀엽기 때문만이 아니다. 이 현상은 1인 가구의 증가에 따른 미디어 이용의 변화와 관련 있을 수 있다.

    지난 3월 통계청의 발표에 따르면 2015년 말을 기준으로 우리나라 1인 가구 수는 520만가구를 넘어섰다. 이는 전체 가구의 27.2%에 달하는 수치다.

    1인 가구의 증가는 사회 전반에 다양한 변화를 이끌어 왔는데 그중 하나가 미디어 이용의 변화다.

    1인 가구가 대세가 된 요즘 네티즌들은 더 이상 TV, 영화 같은 일방적인 대중문화 콘텐츠만 즐기지 않는다. 스마트폰을 이용해 시공간의 제약을 벗어나 콘텐츠를 즐긴다. 보고 싶은 영상은 언제든 다시 볼 수 있고, 부분만 잘라 볼 수도 있다. 거기다 1인 미디어 같은 새로운 방식의 미디어도 등장했다.

    주로 ‘먹방’ ‘겜방’ 같은 이름으로 알려진 1인 미디어는 말 그대로 방송을 제공하는 BJ 1인이 촬영, 편집, 송출까지 담당하는 방송을 말한다. 아프리카TV나 유튜브 등을 통해 접할 수 있는데 유명한 1인 미디어 BJ인 ‘대도서관’의 경우 150만명의 구독자를 거느리고 있는 수준이다.

    사람들이 1인 미디어 방송을 보는 이유는 다양하다. 이들 방송이 모든 것을 혼자 하는 1인 가구 시청자들을 위해 의식주, 즉 먹고 마시고 자는 행동을 함께함으로써 ‘외로움을 공유’해주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 방송이 대개 BJ와 소통하며 진행되기 때문에 BJ와 ‘관계를 맺고 있다’는 인식을 주기도 한다. 동시에 내가 원하는 때에 원하는 만큼만 볼 수 있다는 측면에서 ‘맞춤형’이라고도 할 수 있다.

    가상의 온라인 관계로도 충족 가능한, 내가 원하는 모습만 보는, 짧고 간편한 콘텐츠. 증가한 1인 가구 시청자들이 원하는 콘텐츠의 모습이다.

    이를 비춰 볼 때 랜선이모, 랜선집사는 1인 가구가 만들어낸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현실적인 여건상 1인 가구가 반려동물을 키우기란 어려운 상황이다. 그러나 반려동물을 통해 얻는 심리적 위안과 즐거움은 얻고 싶다. 이런 욕구가 고양이 동영상을 즐겨 보고 사진을 저장해 두는 ‘랜선집사’의 모습으로 이어진 것이다.

    랜선집사는 반려동물에 대한 책임감을 가지지 않아도 된다. 반려동물을 기르다 보면 어려운 점이 한둘이 아니지만 랜선집사는 이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 적당히 친밀한 듯 독립적인 이 관계는 위트코워 교수가 말했듯이 “온라인 내의 인간 관계와 매우 유사하다”. 필요할 때 접할 수 있고, 필요가 없어지면 잠시 꺼둘 수 있다.

    마찬가지로 아이를 낳고 기르기 힘든 1인 가구나 젊은 네티즌들은 시공간의 제약 때문에 만나기 힘든 ‘현실 조카’보다 ‘랜선조카’에게서 위안을 얻는다. ‘랜선이모’는 육아의 어려움을 나눌 필요가 없다. 필요할 때 보고 싶은 부분만 골라서 볼 수도 있다. 길어봤자 2~3분 되는 동영상에서 아이의 귀여움만 만끽하면 되지, 현실적인 부분은 필요가 없다.

    랜선족이 즐기는 콘텐츠는 개인적이고 부분적이지만 그 목적에 충실하다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비록 현실적인 부분을 제외하고 가상의 관계 맺음으로 끝나는 것이지만, 이를 비판적으로 봐서는 안 된다. 지난해 8월 ‘인터넷 고양이 이론’이라는 컨퍼런스에서 발표한 허먼 교수는 “텍스트 자체뿐 아니라 사회적으로 어떤 욕구가 반영돼 콘텐츠가 만들어지는 것인지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허먼 교수의 발표에 따르자면 랜선족의 콘텐츠는 ‘적당한 거리’의 관계를 희구하는 1인 가구의 욕망이 반영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본 기사는 주간조선 2456호에서 발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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