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오오" 워킹맘이 된 41세 삐삐 이윤정

삐삐밴드의 보컬 이윤정씨는 90년대 중반 발랄한 매력으로 무대를 사로잡았다.
말괄량이 삐삐도 나이가 들어 어른이 되듯 이제 그녀도 성숙한 어른이 되었다.
한 아이의 엄마이자 실력파 스타일리스트가 된 이윤정씨를 만나보자.

    입력 : 2017.04.11 17:43

    [Table with: '삐삐밴드' 보컬 이윤정 스타일리스트로 변신]
     

    이윤정은 평소 아이라인을 진하게 그린다. 어느 날 아들이 동화책에서 진한 아이라인에 눈꼬리 치켜 올라간 마녀를 보고 물었단다. "엄마 나쁜 사람이야" 동그랗게 눈 뜬 아이에게 그녀가 답했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 속마음을 다를 수 있단다."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빨강 머리로 무대 휘젓던 젊음과 파격의 아이콘
    "아이 키워보니 알겠어요
    부모님이 날 얼마나 참아주셨는지"


    “안녕하세요 오오오~”
    삐죽삐죽 짧은 머리를 빨갛게 물들인 삐삐가 천연덕스럽게 첫인사를 건네는 순간 대한민국은 충격에 빠졌다. 1995년 등장한 삐삐밴드는 기존 대중문화의 틀을 깨는 파격이자 도발이었다. 열아홉 살 삐삐 이윤정은 발랄하고 자유분방하게 무대를 휘젓고 다녔다. TV 가요 프로그램 진행자가 “빨간 머리 어른들이 싫어하지 않느냐”고 물었을 땐 “저도 어른들 싫어해요”라고 거침없이 답했다. 이듬해 2집을 냈을 땐 마이크 대신 확성기를 붙들고 “딸기가 좋아”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한 시대를 대표하는 젊음과 개성의 상징이었다.
    삐삐밴드 시절 머리를 빨갛게 염색한 이윤정(왼쪽),남편인 작가 이현준과 함께 활동하는 '토탈 아트 퍼포먼스팀 EE'/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이윤정
    말괄량이 삐삐도 나이가 들어 어른이 되고 엄마가 된다. 올해 마흔한 살 이윤정은 스타일리스트로 활동하면서 설치미술 작가인 남편 이현준(35)과 ‘토탈 아트 퍼포먼스팀 EE’를 결성해 미술·음악·영상 등을 결합한 전위적 퍼포먼스를 선보여왔다. 아이 낳고 키우며 활동이 뜸하다가 최근 소녀시대 서현 개인 앨범과 서울패션위크 디자이너 우진원·김은혜의 ‘로켓런치’ 쇼 스타일링을 맡아 다시 주목받은 그녀를 만났다.
    삐삐, 어른이 되다
    지난 7일 이윤정은 새로 이사 갈 서울 용산 작업실에서 페인트칠을 하고 있었다. 펀치를 날리는 오락실 기계가 작업실 한가운데 놓여 있다. “재미있죠? 사람들은 나를 잘 모르면서 막연히 무서워해요. 실제로는 그냥 동네 언니 같은 성격인데.”
    ―단순히 옷 골라 입히는 일만 하는 건 아닌 것 같다.
    “서현 솔로 활동은 앨범 재킷과 뮤직비디오, 무대 등 전체적인 분위기를 정하고 의상을 일일이 수작업으로 만들었다. 로켓런치 쇼는 디자이너와 함께 주제를 잡은 다음 액세서리, 영상, 음악까지 만들었다.”
    ―일반적인 스타일리스트가 일하는 방식과 다른가.
    “나도 나를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 ‘콘셉트 디렉터’가 그나마 적당한 표현 같다. 브랜드 협찬받아 일해본 적이 거의 없다. 원단 사다가 재봉틀과 손바느질로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를 구현하니 사실 품만 많이 들고 돈은 안 된다. 고유의 정체성이 돋보이도록 콘셉트를 잡고 다양한 수단을 활용한다.”
    이윤정의 의상 스케치(왼쪽), 이옷을 입고 무대에 선 소녀시대 서현(오른쪽) /이윤정 인스타그램
    ―모범생 이미지 서현이 틀을 깨는 스타일링으로 변신에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아이돌을 처음 맡아 무척 힘들었다. 소녀시대 막내로서 그간 나름대로 설움을 겪지 않았을까. 자기만의 빛이 나도록 만들어주고 싶었다. 서현에겐 공주님 같은 느낌이 있으니 르네상스 복식을 활용해 관능적이면서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냈다.”
    ―스타일리스트 일은 어떻게 시작했나.
    “2001년 가수 그만두고 난방비조차 못 내던 시절 YG엔터테인먼트 양현석 대표가 ‘우리 애들 너처럼 입혀 달라’고 부탁해 힙합 그룹 ‘스위티’를 맡았다. 미술과 공연을 접목한 EE 활동으론 먹고살 수 없으니 생업으로 스타일리스트를 병행한다.”
    ―EE 퍼포먼스는 난해하고 기괴해 대중과 거리가 있다. 왜 굳이 어렵고 외로운 길을 가나.
    “틀 안에 갇혀 일하는 것은 아무리 노력해도 잘 안 되니 나도 내가 불쌍하다. 젊었을 땐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면 사람들이 좋아해 줬는데 이제는 왜 그렇지 않은지 궁금하다. 갈수록 취향이 상업화, 정형화되면서 자판기 안에서 취향을 고르는 세상이 됐기 때문일까. 자판기 안으로 들어가고 싶지는 않다. 세상엔 나 같은 취향도 있다.”
    삐삐가 된 발레리나
    이윤정의 아버지인 이경재 전 방송통신위원장
    이윤정은 4선 국회의원을 지낸 이경재(76) 전 방송통신위원장의 삼 남매 중 막내다. 학창 시절 발레리나를 꿈꿨으나 서울예고 3학년 때 다쳤다. 어쩔 수 없이 발레를 그만두면서 인생이 바뀌었다.
    ―고전적이고 여성스러운 발레를 했다니 상상이 잘 안 된다.
    “발레 말고 다른 길을 생각해본 적 없는 얌전한 아이였다. 친구가 툭 건드렸는데 넘어지면서 다쳤다. 하나뿐인 꿈을 잃게 되자 작정하고 비뚤어졌다. 중앙대 연극영화과 시험을 봤지만 김희선, 이민우 등에게 밀려 떨어졌다.”
    ―그 뒤 꿈을 가수로 바꿨나.
    “대학 떨어진 날 아버지가 내 앞머리를 가위로 싹둑 잘랐다. 한 번도 매를 든 적 없었는데 내가 책임지지 못할 행동을 하고 다닌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그날 내가 새로 태어났다. 사흘간 불 꺼진 방에 처박혀 있다가 가출했다. 머리가 엉망이라 아예 삭발을 했고, 그 머리로 아르바이트할 수 있는 곳을 찾다가 압구정 바에서 일했다.”
    ―압구정에 가면 머리 빡빡 깎은 여자 아르바이트생이 있다는 소문이 났다던데.
    “그 소문 듣고 강기영(달파란), 박현준 오빠가 찾아왔다. 삐삐밴드에 어울리는 삐삐를 찾고 있었다. ‘같이 음악 해볼래?’ 묻더니 ‘뭐든지 네 마음대로 해봐’라고 했다. 무대에 올라서도 정말 나 하고 싶은 대로 했다.”
    ―패션과 미술은 언제 배웠나.
    “삐삐밴드 2집 내고 탈퇴해 솔로 앨범 냈다. 패션에 관심이 생겨 복장학원 다니다가 영국 센트럴 세인트 마틴으로 유학을 떠났다. 패션과 순수미술 공부해보니 너무 재미있었다. 음반 계약 때문에 공부를 마치지 못하고 돌아와 2집을 냈다. 그 뒤론 무대에 올라 춤추고 노래하는 가수는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았다.”
    ―젊음과 파격의 아이콘 삐삐가 자부심이자 부담이었을 것 같다.
    “반반이다. 삐삐밴드 활동 기간이 2년도 채 안 됐는데 사람들은 여전히 나를 삐삐로 기억한다. 다들 내가 무책임하고 불성실할 거라고 생각하더라. 편견에 맞서느라 오히려 일을 더 열심히 하게 됐다.”

    ‘워킹맘’이 된 삐삐
    펀치를 날리는 오락실 기계에 걸터앉은 이윤정 /앙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2010년 6세 연하 남편과 결혼한 이윤정은 여섯 살 아들 시화 엄마다. 남편·시어머니와 교대 시간 정해 아이 돌보고, 잠잘 시간 쪼개가며 유치원 소풍 도시락 싸고, 바짓가랑이 붙들고 우는 아이 간신히 떼어놓고 출근하는 전형적인 워킹맘이다.
    ―아이도 남다르게 키울 것 같다.
    “육아에 있어서는 의외로 보수적이다. 남들과 다르거나 인위적으로 하는 것 없다. 다만 아이가 고정관념에 갇히지 않도록 신경 쓴다. 아이가 유치원을 다니더니 ‘남자는 분홍색 입으면 안 돼’ ‘남자는 머리 길면 안 돼’라고 하더라. ‘남자도 분홍색 입을 수 있어. 아빠는 예전에 머리가 허리까지 길었어’라고 말해준다.”
    ―아이를 키우면서 부모님과 관계도 달라졌나.
    “아버지와는 자연스럽게 화해했다. 나는 기성세대에 대한 저항을 담은 펑크록을 하는데 아버지가 정치하는 것이 예전엔 참 싫었다. 하지만 아버지도 스스로 옳다고 믿는 길을 가셨다고 생각한다. 예나 지금이나 내겐 장난꾸러기 같은 귀여운 아빠다. 요즘도 일주일에 한 번은 부모님과 삼 남매 가족 13명이 모두 모인다.”
    ―예전에 자신이 그랬듯이 아이가 부모 생각과 다른 길을 택한다면 어떨 것 같나.
    “요즘 아이한테 ‘안 돼’라는 말을 자주 하게 된다. 생각해보니 부모님은 내게 안 된다는 말을 한 적이 별로 없었다. ‘부모님이 나를 많이 참아줬구나’ 새삼 깨닫고 있다. 나는 난방비가 없어 벌벌 떨 때도 스무 살 이후로는 한 번도 부모에게 손 벌리지 않았고, 충분히 나쁜 짓 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스스로를 지켰다. 부모님이 나를 믿는다는 걸 잘 알았기 때문이다. 어떤 삶을 살든 내 아이도 그것 하나만 알아줬으면 한다.”

    이윤정이 말하는 스타일 
    멋은 ‘있는’게  아니라 ‘나는’ 것이다. 빛이 나는 것처럼 원래 가진 속성이 자연스럽게 밖에 나오는 것. 충분한 노력과 연구가 없으면 불가능 하다. 사람을 대할 때 어떤 삶을 살았는지, 어떤 성격인지, 어떤 희로애락이 있는지 집중해서 봐야 그 사람에 맞는 스타일을 찾을 수 있다. 스타일을 살린다는 건 단순히 어여쁘게 만드는 일이 아니다. 그 사람 고유의 정체성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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