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문화 뒤흔든 舊소련의 아이들 ‘제2의 러시아 혁명’

여러 도시에서 패션 위크가 한창인 거리를 보면
한가지 공통된 키워드를 볼 수 있다.
바로 '러시아'

    입력 : 2017.03.14 17:32

    [Trend] 패션·사진·공연계 ‘러시아 무드’ 
     


    요즘 패션 위크가 한창인 뉴욕·파리·런던 등 거리를 보면 분명 다른 도시인데도 비슷한 풍경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마치 잘못 빨아 늘어난 듯한 긴 품의 의상과 1990년대 ‘맨투맨’이라 불리는 스웨터 셔츠, 날렵한 코의 신발을 차려입고 어딘가 퀭해 보이는 인상으로 무심한 듯 발걸음을 재촉하는 이들이다. 러시아의 키릴 문자가 새겨진 티셔츠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국적은 제각각이지만 이들에게 공통된 키워드가 있다. 바로 ‘러시아’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발발한 지 딱 100년이 되는 2017년. 지금 대중문화계는 ‘제2의 러시아 혁명’ 중이다. 패션은 물론 예술·사진·전시·공연 등 문화 전 분야에서 ‘러시아 무드’가 20~30대의 열광적인 호응을 얻고 있다. 러시아 모스크바 출신 패션 디자이너 고샤 루브친스키(33)의 스타일을 추종하는 ‘고샤 보이즈(Gosha boys)’라는 용어가 유행한다. 반항적인 러시아 거리의 청년 모습에서 따온 하위문화인 ‘고프닉(gopnik)’이 시대정신을 설명하는 키워드로 떠올랐다.

    국내도 예외가 아니다. 고샤 루브친스키 사진 작품을 만날 수 있는 한남동 디 뮤지엄 ‘유스(youth)’ 전시회는 젊은이들로 발 디딜 틈 없고, 지드래곤을 비롯해 유명 연예인들이 앞다퉈 이 스타일을 소화하고 있다.

    ‘청춘의 열병’이란 주제로 디뮤지엄에서 열리고 있는 고샤 루브친스키의 사진 작품들(왼쪽). ‘미국의 상징’인 스타워즈 영화를 프린트한 치마와 키릴어가 적힌 티셔츠를 선보인 뎀나 즈바살리아의 의상./ 디뮤지엄·베트멍

    서구 문물을 흡수한 ‘포스트 소비에트 세대’, 중앙 무대로 튀어 오르다

    이들의 문화는 청춘의 방황과 반항을 담은 ‘유스 컬처’라는 용어로 설명된다. 디자이너이자 사진가로 활동하는 고샤 루브친스키, 베트멍과 발렌시아가를 이끌며 현재 가장 주목받는 디자이너로 꼽히는 뎀나 즈바살리아(36), 러시아 고프닉 스타일을 완성한 스타일리스트 로타 볼코바(33) 등이 대표 주자다.

    “그 당시 디오르 의상을 산다는 건 단지 옷을 사는 게 아니라 일종의 반사회주의 에너지를 적극적으로 표시하는 운동이었다.” 로타 볼코바의 이야기에서 볼 수 있듯 이들은 1991년 소련 해체 후 개혁·개방을 맞이해 급변하는 시대를 바라보면서 허영에 찌든 자본주의를 동경과 멸시로 흡수했다.

    서구의 클럽 문화, 히피와 일렉트로닉을 넘나드는 음악이 들어왔고, 각종 약물까지 걸러지지 않은 채 쏟아졌다. 이들의 독특한 취향은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독재와 자유, 동구권과 서구 문화 등 다른 두 세계의 충돌이 만들어낸 ‘짜릿한’ 작품이다.

    ‘포스트 소비에트’ 시대가 왔음을 말하고 있는 유명 패션·아트 매거진 ‘하이스노바이어티’의 메인 화면./ 하이스노바이어티

    ‘포스트 소비에트 세대’는 서구권 학교에 다니며 그곳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뎀나 즈바살리아는 벨기에 앤트워프 왕립 예술학교 출신이고, 로타 볼코바는 영국 센트럴 세인트 마틴에서 잠시 수학했다. 정제되지 않은 아트 사진으로 유명한 알렉산드라 고르디엔코(25) 역시 러시아 출신. 영국 센트럴 세인트 마틴 졸업작으로 그가 내놓은 예술 매거진 ‘마르파 저널(Marfa journal)’이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며 문화계 가장 주목하는 ‘무서운 신인’이 됐다.

    천재는 천재가 알아본다.

    문화적 격동기를 겪으며 ‘나만의 목소리’를 갈구하던 이들이다. 억눌렸던 자아가 폭발하면서 스스럼없이 표현하는 이들을 보면서 서구 세계는 감탄하기 시작했다. 2000년대 초 런던에서 공부했던 로타 볼코바는 독일의 유명 사진작가 볼프강 틸만스의 눈에 띄어 함께 사진 작업을 했다. 그들의 작품은 2002년 뉴욕의 대표 갤러리 중 하나로 꼽히는 데이비드 즈위너 갤러리에 전시되면서 화제를 모았다.

    런던 도버 스트리트 마켓을 통해 신예 디자이너에게 아낌없이 투자하는 세계적인 디자이너 레이 가와쿠보는 고샤 루브친스키에 매료돼 콤데가르송 브랜드 협업을 맡겼다. 친구들에게 기껏 한 해 10장쯤 팔았던 티셔츠가 5만 장 이상 팔렸다. 뉴욕 편집숍인 오프닝 세리머니 역시 그와 협업했다.

    (왼쪽부터 차례로) ①지난 1월 ‘베트멍’의 2017 봄·여름 파리 오트 쿠튀르 쇼에 선 모델. 베트멍 디자이너 뎀나 즈바살리아는 젊음의 상징인 데님으로 기괴한 패션을 연출했다. ②‘베트멍’의 오버 사이즈 의상을 입은 모델. 가슴에 유전자 조작으로 인한 생물 재해를 뜻하는 ‘바이오해저드(biohazard)’ 로고를 넣었다. ③디자이너 뎀나 즈바살리아(왼쪽)와 스타일리스트 로타 볼코바(가운데)./ 고샤 루브친스키·Getty Images 이매진스

    독재가 꽃피운 예술의 아이러니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에 러시아가 공식 유니폼으로 독일 브랜드 ‘아디다스’를 채택할 때만 해도 서슬 퍼런 사회주의가 활개 치던 때였다. 그때만 하더라도 ‘아디다스를 입는 것은 조국을 판매하는 것이다’라는 선전 문구를 가슴에 달아야 했다. 아디다스의 상징인 ‘삼선(三線)’이 자본주의 증표라며 한 줄을 제거한 ‘두 줄짜리 아디다스’로 자체 ‘짝퉁 처리’ 공정을 거치기도 했다. 당시 러시아 젊은이를 사로잡았던 ‘두 줄 아디다스’는 체제 반항을 의미했다. 이런 1980년대 러시아 스타일은 포스트 소비에트 아티스트들이 주요 모티브 삼는 소재로 발전했다.

    러시아 현상에 대해 뉴욕타임스 등 외신에선 “생경한 자극에 목말라 있던 대중 문화계가 혼란과 환락의 시대상을 이수한 이들에게 보내는 호기심 어린 찬사”라고 평한다.
    제정 러시아 시대 황제였던 차르와 이후 사회주의 독재에 고통받았던 민족이기 때문에 러시아 문화에는 ‘인류애’와 ‘한’이 서려 있다는 시각도 있다. ‘스트롱맨’으로 세계 정치 무대에서 목소리를 높이는 푸틴 체제에도 이들은 적극적으로 반항한다.

    러시아 문학 박사이자 패션 전문가인 김정아 스페이스 눌 대표는 “러시아는 혁명으로 세계사에 족적을 남기고도 다시 독재에 허덕였다. 이 과정을 거치는 동안 예술은 체제 반항적인 기류를 유지했다. 그런 반항기가 대중문화에서 러시아 문화가 인기 끄는 배경”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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