빽빽한 계획표에 질렸던 여행… 특별한 추억으로 남을 줄이야

  • 정이현 소설가 
  • 편집=오현주

    입력 : 2017.03.07 17:21

    [정이현의 단어 더하기 단어]
     

    계획 + 표

    여행은 삶의 축소판이라고 처음 말한 사람이 누구였을까. 그 말에는, 길동무의 중요성도 포함되어 있을 것 같다. 친구와 둘이 여행을 간 적이 있다. 어릴 적부터 친해서 서로의 성격을 충분히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여행 동료로 만나니 또 달랐다. 꼼꼼하고 성실한 그녀가 공항에 메고 나타난 가방엔 우리가 갈 곳의 관광 명소와 유적지, 유명 식당 등을 프린트해둔 종이가 한 묶음 들어 있었다.

    그대로 책으로 펴내도 될 것 같았는데, 이 여행이 정해진 몇 달 전부터 틈틈이 모아둔 자료라고 했다. 수첩에는 5일 동안의 여행 루트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여행사 가이드 같아!” 나의 감탄은 진심이었다. 그 속에는 경외감뿐 아니라 미지의 불안감이 도사리고 있었음을 이제야 고백한다. 친구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이건 플랜A야. 다른 계획들도 있어.”

    그 순간 내 불안 지수가 치솟았다면, 복수형을 의미하는 접미사 ‘들’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미리 작성된 초안을 바탕으로 공들여 계획표를 완성하고 그것을 충실히 이행하는 하루하루가 이어졌다. 일일 계획표가 최종 확정되는 것은 그 전날 밤이었다. 그날의 지출 내역 정산과 함께였다. 그리고 지도를 들여다보며 내일 오후 박물관을 나와 저녁 먹을 식당까지 가는 가장 빠른 길을 연구해야 했다.

    안병현 일러스트

    계획표에 따르면 우리는 반드시 다섯시 오십분이 되기 전에 식당에 도착해야만 했다. 아주 유명한 곳인데 예약은 받지 않으므로 본격적인 식사시간이 닥치기 전에 줄을 서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메뉴도 미리 골라 놓았다. 그다음 스케줄로는 한국에서 미리 예매하고 온 뮤지컬 관람이 이어져 있었다.

    친구가 간혹 내 의견을 물을 때도 있었다. 나는 ‘아무거나! 난 다 좋아!’ 라고 대답하여 도리어 그녀를 답답하게 했다. 그런데 정말이었다. 진짜 아무래도 좋았다. 그게 몸에 밴 나의 여행 방식이었다.

    원래 나는 여행 전에 교통편과 숙소를 예약하고 나면 그걸로 대강의 준비가 끝났다고 생각하는 인간이다. 그러곤 여행서 한 권 정도를 읽어두는 게 전부였다. 여행의 큰 윤곽은 정해두되 세부적인 계획은 찬찬히 세워두지 않았다. 유명한 관광지를 일부러 피하지는 않지만 현지 사정으로 여의치 않으면 미련 없이 포기한다. 날이 궂으면 굳이 교외의 유적지를 보러 가기보다 숙소 옆 카페에 죽치고 앉아 사람 구경하는 게 더 행복하다. 그러니 친구의 여행 방식을 따르는 일이 힘에 부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여행 중엔 이 친구와 다시는 같이 오지 않겠다고 남몰래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기도 했다. 그러나 여행에서 돌아와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동네 마실 다녀오듯 편안히 훌쩍 떠났던 여행도 즐거웠지만, 친구 손에 이끌려 차근차근 꼭꼭 씹어 먹듯 여행한 그 도시도 특별한 추억으로 오래 남았다.

    친구에게 왜 그렇게 매사에 철저한 계획을 세워서 움직이는지 물어보았다.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안 그러면 불안해서.” 계획을 짜서 명기화하지 않으면 목적을 이룰 수 없을 것 같아서란다. “내가 나를 어떻게 믿어?” 친구야, 계획표 안에서도 밖에서도 너는 진짜 믿을 만한 사람이야. 내가 보증해. 나는 큰 소리로 말해주고 싶었다.

    얼마 전엔 또 다른 후배와 여행을 다녀오게 되었다.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인 줄은 익히 알았지만, 어느 숙소를 예약하는 게 좋겠느냐는 내 물음에 그녀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지금껏 전 세계를 돌아다녔지만 단 한 번도 미리 숙소를 정해둔 적이 없단다. 다른 여행자들의 후기를 읽어본 적도 없다고 했다. 그럼 어떻게 하느냐고? 비행기 안에서 여행서를 대충 훑어본 후 현지 공항에 내려서 그날 기분에 따라(!) 한 군데를 찾아간단다. “만약 빈방이 없으면?” 그게 무슨 걱정거리가 되냐는 표정으로 후배가 웃었다. “그 근처에 또 다른 데가 있겠죠!” 없으면? “설마 잘 데가 없겠어요.

    다 있어요. 세상이 이렇게 넓은데.” 철저한 무계획의 여행. 함께 해 보니 그것은 또 그것대로 좋았다. 과연 세상은 넓고, 계획표는 다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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