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트 위에 야상… 당신, 멋 좀 아는군요

1차대전 당시 추위를 견디기 위해 트렌치 코트가 고안됐고,
크림전쟁에 참전한 백작들이 즐겨입던 옷이 카디건이 되었다.
개성을 패션으로 드러내는 시대의 야상에 대해 알아보자.

    입력 : 2017.02.21 16:47

    [채민기 기자의 패션읽기: ‘M-65’ 필드재킷]
     

    ‘람보’·‘택시 드라이버’에서 아웃사이더의 유니폼으로 등장
    여성복 포함한 대부분의 브랜드가 야상서 영감받은 옷 만들어

    지난주 겨울 휴가 마지막 날, 언젠가부터 창고처럼 돼버린 건넌방 옷장을 정리하려고 문을 열었다가 잠시 멈칫했다. 4~5년쯤 전에 사놓고 까맣게 잊었던 재킷 한 벌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홍대 앞 어느 숍에서 구한 미군의 ‘M-65’ 필드재킷(field jacket)이 한쪽 구석에 걸려 있었다. 잘 입지 않는 양복, 아내의 한복 따위가 잡다하게 걸려 있는 그 옷장 안에서 올리브그린 색상 군복이 유난히 두드러져 보였다.

    필드재킷은 우리 군에서 쓰는 말로 야전용 방상외피(野戰用 防上外皮), 이른바 ‘야상’이다. 옷장에서 찾아낸 재킷은 실제로 군납(軍納)했던 옷은 아니고 군수회사가 민간용으로 생산한 것이다. 그래도 군데군데 얼룩지고 해진 자국이며, 가슴에 박음질했던 명찰을 뜯어낸 흔적이 제법 진짜 같은 느낌을 준다. 가게를 찾아 좁은 골목길을 빙빙 돌며 “사봐야 못 입을 게 분명하다”고 생각하던 일도 떠올랐다. 그러면서도 옷을 산 건 아마도 ‘가장 많이 카피된 군복’이라는 상징성이 탐나서였을 것이다.

    남자 옷의 상당수가 군복에 뿌리를 두고 있다. 트렌치코트, 피코트가 모두 군복에서 왔고 이제는 너무나 친숙한 옷이 된 나머지 종종 잊곤 하지만 카디건도 전쟁터에서 유명해진 옷이다. 하지만 풀색 야전용 재킷은 조금 특별하다. 장교들이 입었던 트렌치코트나 수병(水兵)의 옷인 피코트와 달리 병과를 가리지 않고 널리 보급됐고, 민간 패션에 미친 영향 또한 보병의 진격처럼 전면적이고 광범위하다. 약간 과장해서 말하면 이제는 거의 모든 브랜드가 필드재킷에서 영감을 받은 옷을 만든다. 여성복도 예외가 아니다. 패션에서 영원히 되풀이되는 주제가 된 것이다.

    미군이 2차대전 때부터 본격 채택한 필드재킷이 패션 영역에 진입한 건 베트남전 전후로 대중문화의 여러 장면에 M-65가 등장하면서부터다. 특히 영화에서 이 옷은 아웃사이더, 전쟁에서 돌아와 방황하던 청춘들, 기성의 견고한 질서와 타협하지 못하는 국외자(局外者)들의 유니폼이었다.

    우선 기억나는 영화로 ‘람보’가 있다. 그저 그런 속편이 이어지며 람보는 점차 실베스터 스탤론의 우람한 근육으로만 기억되는 영화가 되어갔지만, 적어도 시리즈 첫 편(1982)은 전투 장면 없이 전쟁의 또 다른 냉혹함을 보여준 수작이었다고 생각한다.

    M-65 필드 재킷을 입고 ‘람보’를 연기한 실베스터 스탤론(왼쪽)과 미군 셔츠를 입고 TV 토크쇼에 출연한 존 레넌. /영화 람보, 유튜브 화면 캡처

    월남에서 돌아온 람보가 맞닥뜨린 건 전쟁이 어느 나라 이야기냐는 듯한 사람들의 편견과 냉대였다. 영화 초반 람보는 월남에서 입던 M-65를 그대로 걸치고 등장하는데, 이는 보통사람들 사이에 좀처럼 녹아들지 못하는 이질성을 나타낸다.

    가슴에 펄럭이는 성조기 패치를 붙여본들 전쟁 경험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그는 결국 이방인인 것이다.‘택시 드라이버’(1976)에서 M-65는 주인공의 성격 변화를 암시한다. 트래비스(로버트 드니로)는 처음엔 그런대로 말쑥한 빨간색 재킷을 입다가 구애(求愛)에 실패한 뒤로는 군복을 입은 반영웅으로 변신한다. 그의 M-65 재킷 왼팔에는 가상의 부대인 ‘킹콩 중대’ 마크가 붙어 있는데, 포효하는 킹콩의 사나운 표정이 주인공 내면의 분노를 보여준다. ‘서피코’(1973)에서 자신만만한 제복 경관 서피코(알 파치노)가 사복형사가 되어 경찰 내부의 비리와 맞설 때 입었던 옷도 M-65였다.

    반전(反戰) 메시지의 반어적 표현으로 군복을 입은 청년 문화의 기수들도 ‘녹색 군복’의 대중화에 힘을 보탰다. 대표적인 이가 1972년 미군 셔츠를 입고 뉴욕 콘서트 무대에 올랐던 존 레넌이다. 레넌은 이 무렵 출연한 TV 토크쇼에서 “베트남에서 오는 군인을 독일 공항에서 우연히 만나 얻었다”며 이 군복의 취득 경위를 설명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에 주둔하는 미 2보병사단의 인디언 마크나 한반도 모양 ‘임진 스카우트’(임진강 전초부대) 휘장이 붙은 걸 보면 원래 주인은 주한미군이었다고 보는 쪽이 자연스럽다.

    (왼쪽부터)털로 장식한 필드 재킷을 슈트 위에 걸친 피티워모 한 참석자. (중간)커다란 가슴주머니가 달린 필드 재킷에 화려한 자수를 더한 발렌티노의 올 봄시즌 여성복. (마지막)레인코트처럼 디자인한 필드 재킷에 각종 패치를 붙인 디스퀘어드2의 남성복. /피티워모·발렌티노·디스퀘어드2

    군 생활의 기억 때문에 한국 남자들이 얼룩무늬나 올리브그린에 거부 반응을 보인다고들 하는데 꼭 그런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남자가 가진 군대에 대한 감정은 양면적이다. 군대라면 치를 떠는 듯하다가도 술이라도 한잔 들어갈 참이면 이내 군대에서 축구 한 이야기를 꺼내는 게 남자들이다. M-65만 해도 견장(肩章)의 유무나 지퍼 색깔에 따라 1~4세대로 디자인을 구별해가며 입는 마니아들이 국내에 수두룩하다. 그랜저가 1세대 ‘각그랜저’부터 얼마 전 나온 6세대 신형까지 변해왔듯이 말이다.

    필드재킷이 가장 돋보이는 건 슈트에 매치할 때다. 극과 극은 통한다고, 철저하게 기능이 우선인 옷과 격식을 최고조로 끌어올린 옷이 대척점에서 의외의 조화를 빚어낸다. 아쉬운 건 국내에선 그런 옷차림을 여간해서는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이다. 열성팬들의 M-65 역시 슈트를 입는 날에는 옷장 신세를 면치 못하는 것일까. 슈트에 필드재킷을 매치한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은 정치인들의 군부대 방문 행사 사진뿐이다. 이건 안보나 장병 복지를 강조한다는 메시지는 될 수 있지만 패션은 아니다.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옷장 정리는 이번에도 다음으로 미뤘다. 그래도 오는 주말에는 필드재킷을 꺼내 입고 산책이라도 해볼 생각이다. 부랑자 같다고 아내가 타박하겠지만, 옷 입기의 즐거움을 위해선 가끔 꿋꿋해질 필요도 있다.


    (왼쪽부터)트렌치코트, 피코트, 카디건, 플라이트 재킷. /조선일보DB·플리커

    1차대전 당시 참호의 추위 견디기 위해 트렌치코트 고안
    카디건은 크림전쟁 참전한 카디건 백작이 즐겨 입었던 옷

    군대와 관련된 패션

    남자들의 옷이나 액세서리 중엔 군대와 관련된 물건이 상당히 많다. 그런 옷을 평생 입는다는 점에서 군대란 남자의 숙명인지도 모른다.

    트렌치코트 1차 대전 당시 참호(trench)의 진흙탕과 추위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해 탄생했다. 지금도 정통 트렌치코트에는 당시에 만들어진 디테일이 남아 있다. 소총 개머리판을 밀착시키기 좋게 어깨에 덧댄 천이나 수류탄을 걸 수 있도록 허리띠에 달아 놓은 D자형 고리 같은 것들이다.

    피(pea)코트 해군 수병들이 입는 짧은 코트다. 영국 해군의 코트가 미국 남북전쟁 이후 퍼져 나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차가운 바닷바람을 막을 수 있도록 두꺼운 모직물로 만든다. 앞에 두 줄의 단추가 달려 있다. 지금도 한국과 미국을 비롯한 주요 국가의 해군에서 정식 유니폼으로 채택하고 있다.

    카디건 크림전쟁에 참가했던 영국 ‘카디건 백작’ 제임스 브루드넬이 즐겨 입었던 옷이다. 브루드넬의 경기병대가 러시아 포대에 돌격한 일이 널리 알려지면서 유명해졌다. 단추로 여미는 디자인은 머리 모양을 망가뜨리지 않기 위한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플라이트 재킷 육·해·공군 항공기 조종사들의 재킷을 통칭한다. 조종석에서 거추장스럽지 않도록 대체로 길이가 짧고, 높은 고도에서도 추위에 견디게끔 두꺼운 가죽을 쓴 옷들도 있다. 선명한 오렌지색 안감을 댄 재킷도 있는데, 조난당했을 때 재킷을 뒤집어 구조 신호로 활용하도록 한 것이다.


    “알루미늄 여행가방, 멋진 가죽 재킷처럼 보기 좋게 낡아가죠”

    ‘투미’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산즈

    /장련성 객원기자

    가볍고 튼튼한 신소재의 홍수 속에서도 여전히 알루미늄 여행 가방의 매력은 특별하다. 너무 차려입으면 오히려 촌스러울 수 있는 ‘공항 패션’에 포인트를 줄 수 있는 아이템으로 주목받기도 한다. 최근 서울 한 호텔에서 만난 가방 브랜드 투미(TUMI)의 빅터 산즈(Sanz)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는 “알루미늄 여행 가방은 좋은 가죽 재킷을 닮았다”며 “가짜(fake)가 아닌 ‘진짜’이고 보기 좋게 낡아간다는 점이 그렇다”고 했다. 그는 투미가 작년 말 처음으로 선보인 알루미늄 여행 가방 컬렉션 ‘19디그리(degree)’ 홍보차 한국을 찾았다.

    산즈 디렉터는 “알루미늄 가방 사용자 중에는 쓸수록 늘어나는 사용 흔적까지도 여행의 기억으로 간직하고자 하는 이가 많다”며 “방문했던 도시·나라를 상징하는 스티커를 알루미늄 가방에 잔뜩 붙이는 것도 비슷한 이유”라고 말했다. “신제품 출시를 앞두고 출장길에 시제품을 들고 다니며 테스트했습니다. 1년에 4~5개월씩 외국 출장을 다니는 저도 어느새 공항에서 스티커를 사고 있더라고요.”(웃음)

    디자인 역시 “여행의 모든 순간에 즐거움을 줄 수 있도록” 신경을 썼다. 예컨대 이름표를 다는 고리는 금속을 섬세하게 깎아 반지나 장신구 같은 느낌을 냈다. 가방의 잠금 장치를 열 때도 ‘철컥’ 하는 금속성 소리보다 훨씬 묵직하고 부드러운 소리가 난다. 산즈 디렉터는 “레스토랑에 갈 때, 음식의 맛뿐 아니라 들려오는 소리, 풍겨오는 냄새까지도 즐거움을 준다는 걸 생각해보라”고 말했다.

    산즈 디렉터는 이번에 네 번째로 한국을 찾았다. 늘 일정에 쫓겨 업무만 보고 떠났지만 이번엔 이틀 정도 여유를 내서 명동, 삼청동,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와 같은 서울 명소를 둘러봤다. 그는 “여러 아이템을 독창적 방식으로 매치하는 젊은이들 감각이 신선했다”며 “50만~60만원은 족히 돼 보이는 가방을 들고 수수한 운동화를 신는 식”이라고 말했다. 그는 서울에서 받은 이런 인상을 “프레시(fresh)”라는 한마디로 압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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