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넬 캡모자·디올 반팔 티… 명품, 길거리 감성을 입다

명품 패션이 스트릿 패션과 손을 잡았다.
스트릿 패션의 젊은 감성은 잃지 않으면서 명품의 묵직한 무게감으로
젊은 명품 소비층의 요구를 충족시키고 있다.

    입력 : 2017.02.14 17:47

    [Fashion: 길거리 패션과 손잡은 명품]
     

    지난 5일 막을 내린 2017년 가을·겨울 파리패션위크는 ‘루이비통’으로 시작해 루이비통으로 끝났다. 콧대 높은 프랑스 럭셔리 브랜드 루이비통이 미국 스트리트 패션 브랜드, 그것도 스케이트 보더용 옷으로 출발한 비주류 브랜드 ‘슈프림(Supreme)’과 손잡아 화제의 중심에 올랐다. 더구나 슈프림은 2000년 루이비통 로고를 무단 도용해 법정 고소까지 갔던 브랜드가 아니던가! 식상했던 루이비통 로고가 슈프림 스타일의 빨간색 봄버 재킷 위에, 빈티지한 데님재킷 위에 새겨졌다. 클래식한 여행용 트렁크 가방은 빨간색 슈프림 로고와 만나 스케이트보드 트렁크로 재탄생됐다.

    루이비통, 스케이트보더 패션
    ‘슈프림’과 협업제품 만들어

    ‘보그’ ‘GQ’ 등 패션지들은 루이비통의 남성복 패션쇼를 인스타그램에서 생중계했고, 전 세계 패션 피플들은 열광했다. 루이비통이 협업으로 주목받는 건 2002년 일본 팝아트 작가 무라카미 다카시와의 협업 이후 오래간만이다. 주춤했던 루이비통의 인기가 복권되는 조짐마저 보인다.

    SPA 이어 스트리트 패션과 손잡은 명품

    지드래곤의 베트멍 ‘추리닝’ 패션. /Getty Images 이매진스

    2000년 전후 ‘아트 컬래버레이션’이 등장하면서 명품과 예술, 타 브랜드와의 협업은 유행처럼 번져갔다. 그중에서도 2004년 H&M이 처음 샤넬과 손잡았을 때 패션업계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저가 패션’인 SPA 브랜드가 명품과 손잡았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화제가 됐다. 몇 년 지나자 이것도 시들해졌다. H&M은 매년 이자벨 마랑, 발망 등 명품 브랜드와 협업 제품을 선보이고 있으나 신선함이 예전만 못하다. 연례행사처럼 되면서 H&M의 협업 제품 출시 날이면 패션 피플보다 재판매로 부가 수익을 노리는 판매업자가 줄을 더 많이 선다.

    새로움을 찾아 명품의 협업 파트너가 SPA 브랜드에서 스트리트 패션으로 자연히 옮겨 갔다. 시작은 ‘베트멍(Vetements)’이었다. 언뜻 들으면 ‘배트맨’과 헷갈릴 정도로 대중에게 익숙지 않던 브랜드 베트멍은 2014년 뎀나 바잘리아(36)를 중심으로 프랑스 파리의 디자이너 7명이 의기투합해 만들었다. 베트멍은 불어로 ‘옷’이라는 뜻. 선보이는 패션마다 파격이다. 대표 제품은 늘어진 후드 티, 얻어 입은 듯한 맨투맨티 등인데 가격은 황당하리만큼 비싸다. 늘어진 후드 티 하나에 100만원이 넘는다. 재질도 좋지 않다. 오죽하면 ‘짝퉁’ 제품들이 소재가 더 좋을 수 있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온다.

    그런데도 열광하는 건 주류 문화를 비꼬는 이들의 자유로운 반항 정신이다. 뎀나 바잘리아는 구(舊) 소련이 붕괴될 무렵 조지아(옛 그루지야)에서 태어나 예술·음악·정치 운동 등 당시 문화 세례를 한꺼번에 받았다. 자본주의를 조롱하는 거친 언어를 옷에 새겨 폭발적인 지지를 받게 된다. 2015년 발렌시아가가 이 천재 패션 디자이너를 데려갔다. 명품 패션과 스트리트 패션의 경계가 무너졌다.


    후드 티·캡 모자… 럭셔리에 스며든 스트리트 스피릿!

    발렌시아가는 줄무늬 비닐
    시장가방을 가죽으로 만들어 ‘히트’

    발렌시아가는 2016년 가을·겨울 컬렉션에서 태국 야시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줄무늬 비닐백을 연상시키는 쇼퍼팩을 내놓았다. 뎀나 바잘리아의 ‘작품’이었다. 이 가방은 나온 지 1년도 안 돼 발렌시아가의 대표 백이 됐다.

    한때 성장 정체에 허덕였던 구찌도 스트리트 감성을 품으며 날개돋친 듯 팔리고 있다. 지난해 구찌가 내놓은 호랑이와 뱀 자수 패치가 달린 청재킷과 청바지는 역으로 스트리트 패션을 장악했다. 스타일을 따라 한 ‘미투(me too)’ 디자인이 허다하다.

    ❶ 태국 시장의 쇼퍼백을 연상시키는 발렌시아가의 바자 핸드백. ❷ 로큰롤 분위기를 담은 베르사체의 ‘스타더스트백’. /발렌시아가, 베르사체

    디올은 길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흰색 반팔 티셔츠를 럭셔리 패션으로 끌어올렸다. 지난해 새롭게 디올의 수장이 된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는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돼야 한다”는 슬로건을 담은 티셔츠를 2017년 봄·여름 컬렉션으로 선보였다. 일명 ‘페미니즘 티셔츠’는 리한나 등 ‘트렌드세터’로 통하는 유명 스타들이 입으며 티셔츠 신드롬을 만들어냈다. 여성용인데 요즘 하이엔드 스트리트 패션에서 영향력 있는 힙합 뮤지션 에이셉 로키도 입었다. 국내에선 이달 말부터 팔리는데 벌써부터 사전 주문이 쇄도한단다.

    샤넬은 힙색으로 인기를 끌더니 이번에는 캡 모자다. 2017년 봄·여름 컬렉션에 트위드 소재의 캡 모자를 메인으로 내세웠다. 호화로운 럭셔리를 추구하던 베르사체도 이번 시즌 변신을 시도했다. 메두사 얼굴 장식이 달린 고풍스러운 가방 대신, 로큰롤 분위기를 담은 스터드(징) 장식의 스타더스트백을 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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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캡 모자로 스트리트 분위기를 연출한 샤넬. /샤넬

    젯셋족 라이프 스타일, X세대 향수 적중

    명품에 길거리 감성 입혀…
    식상하고 지루하다는 이미지 탈피

    고가의 하이엔드 패션에 목말라 하던 이들이 대척점에 있을 법한 스트리트 패션과의 만남을 반긴다. 명품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은 로고가 크게 박힌 제품이나 시그너처(대표) 백을 고르지만, 진짜 명품 소비층들은 그렇지 않다. 비슷한 디자인의 명품 백은 방 안에 넘쳐난다. 식상하고 지루하다. 젊은 층은 명품을 들어도 ‘쿨’하게 보이길 원한다. 젊고 과감한 디자인을 소화하는 중년층도 늘었다. 젊은 층의 스트리트 패션 모티브를 따왔으면서도 명품의 묵직한 무게감을 잃지 않은 협업이 이들의 요구를 충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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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으로 스트리트 패션을 장악한 구찌의 동식물 자수 청재킷(왼쪽).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돼야 한다”는 메시지로 흰색 반팔 티를 럭셔리 패션으로 끌어올린 디올. /구찌, 디올

    ‘비욘드 클로젯’의 고태용 디자이너는 “루이비통과 슈프림의 컬래버레이션은 럭셔리와 매스 시장의 벽이 완전히 무너진 것을 의미한다”며 “패션 전공자와 비전공자의 경계도 사라지면서 요즘엔 유명 스타가 직접 옷을 만들거나 모델 출신이 패션 브랜드를 출시하는 게 다반사가 됐다”고 말했다.

    스트리트 패션의 인기는 복고 열풍과 함께 대중문화 핵심 축으로 다시 돌아온 ‘X세대’와 맞닿아 있다. 슈프림의 ‘보드 패션룩’은 1990년대 X세대가 휩쓴 청담동, 압구정동의 힙합 룩을 묘하게 연상시킨다. 20여년의 시간 차를 두고 유행이 돌고 돌아 해외발 스트리트 패션이 다시 상륙했다. 당시 힙합 문화의 추종자였던 20대는 이제 소비력을 갖춘 40대로 성장했고, 이들이 명품과 결합한 스트리트 패션에 묘한 향수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해외여행이 일상화된 젯셋(jet set)족이 많아진 것도 요인이다. 명품 브랜드가 이들의 라이프 스타일을 반영해 편한 패션을 고심하면서 스트리트 스타일을 수용하게 됐다. 발렌티노 같은 명품 브랜드에서 라운지 웨어(집에서 입는 옷)를 앞다퉈 내놓은 배경이다.



    스케이트 보더용 패션으로 1994년 뉴욕서 시작,
    한정판으로 유명세… 벽돌에 로고 찍어 팔아도 매진

    럭셔리가 된 길거리 패션 ‘슈프림’

    “요즘 슈프림(Supreme) 없이 뉴욕 남성복을 말할 수 없다.” 루이비통의 수석 디자이너 킴 존스가 슈프림과의 협업 때 한 이 말은 현재 패션계에서 슈프림의 위치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슈프림은 1994년 미국 뉴욕의 뒷골목에서 출발한 스트리트 패션 브랜드다. 창업자 제임스 제비아는 당시 10대 후반~20대 초반에게 인기 끌던 스케이트 보더용 패션으로 슈프림을 설립했다. 대표 제품은 빨간색 작은 박스 안에 브랜드명 ‘Supreme’을 넣은 흰색 티셔츠. 일명 ‘박스로고 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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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이비통과 슈프림의 콜라보레이션. /루이비통

    “절대 대중의 흥미에 맞추지 않겠다”며 철저히 비주류를 추구하던 슈프림이 오히려 대중이 열광하는 브랜드가 된 것은 아이러니하다. 초기엔 버버리, 루이비통, 구찌 등 럭셔리 브랜드의 로고를 무단 도용한 박스로고 티를 선보여 ‘패션계 무법자’로 악명을 떨쳤다. 그런데 ‘빵’ 터졌다. 한정판의 마력이었다. 빨간색 박스 모양의 슈프림 로고를 일관되게 유지하면서 세계적인 현대미술 작가 ‘데이미언 허스트’부터 국내 아웃도어 장비 브랜드 ‘헬리녹스’까지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드는 컬래버레이션(협업) 제품을 소량 선보였다.

    제임스 제비아는 “600개 완판이 가능하다고 해도 난 무조건 400개만 만든다”고 밝혔을 정도로 한정판의 생리를 잘 안다. 매장도 일부러 늘리지 않는다. 현재 슈프림 매장은 미국·일본·영국·프랑스 등 4개국에 10개 있을 뿐이다.

    /이뉴이트

    슈프림 자체로도 유명해지면서 최근에는 ‘슈프림은 아무거나 로고 찍어서 팔아도 팔린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다. 야외 벤치, 스피커, 권투 장갑 브랜드와도 협업했다. 지난해 9월에는 슈프림 로고를 찍은 붉은 벽돌<사진>까지 나왔다. 벽돌 한 장에 약 4만원인데 매진됐다. 최근 인터넷 사이트에선 프리미엄이 붙어 4배 이상 가격으로 거래된다. 이 때문에 슈프림 한정판 제품의 재판매로 이득을 노리는 ‘슈프림 테크’란 말까지 생겨났다.

    거부(巨富)가 된 힙합 뮤지션들도 슈프림의 인기에 한몫했다. 제이지, 지드래곤 등 유명 힙합 뮤지션은 자신의 구미에 맞는 새로운 럭셔리가 필요했고, 이는 자연스럽게 스트리트 감성을 담은 슈프림으로 이어졌다. 평범한 후드 티를 고가로 주고 사는 행위는 아무나 따라 하기 어려운 새로운 럭셔리 패션을 만들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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