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푸드 30년, 발상지 피에몬테를 가다

글로벌리즘에 반발해서 일어난 운동 중에 우리에겐 익숙한 것이 있다.
바로 20세기 말에 나타난 슬로푸드 운동이다.
이탈리아 북부 피에몬테에서 시작된 슬로푸드 운동을 만나보자.

  • 유민호 퍼시픽21 소장 
  • 편집=김혜인

    입력 : 2017.02.13 07:43

    [Idea&Trend: 슬로푸드의 발상지 피에몬테]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등장과 함께 반(反)글로벌리즘이 표면화될 것이라고들 한다. 트럼프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지만 사실 역사적 흐름으로 판단한다면 트럼프의 등장은 한참 뒤늦은 것인지 모른다.

    지구를 하나의 기준으로 묶어 버리려는 글로벌리즘에 대한 반발은 이미 20세기 말 나타났다. 1986년 탄생한 슬로푸드(slow food) 운동도 그중 하나다. 이탈리아 북부 피에몬테 지방에서 시작된 새로운 식(食)문화 운동으로, 1950년대부터 미국에서 본격화된 패스트푸드에 대한 대항 논리였다. 슬로푸드는 현지에서 생산된 농산물을 재료로 한 수제요리를 의미한다. 화학재료를 배제하고, 공장에서 만드는 대량생산품이나 냉동음식을 부정하는 식문화다. 냉장고나 전자레인지 사용도 가급적 피한다.

    슬로푸드 운동의 기원이 된 이탈리아 피에몬테 지방은 슬로푸드의 천국인 동시에, 맛을 즐기는 사람이라면 가슴이 설레는 미식의 고장이기도 하다. 슬로푸드의 기점이 된 피에몬테 지방 일부가 201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선정됐다는 얘기는 너무도 당연하게 와닿는다.

    구체적으로 슬로푸드 발상지는 피에몬테의 랑게-로에로-몬페라토(Langhe-Roero and Monferrato·이하 LRM)를 잇는 거대한 지역으로, 이탈리아 최고 수준의 와인 생산지로도 유명하다. 이탈리아 최고급 와인의 대명사인 바롤로(Barolo)와 바르바레스코(Barbaresco)의 생산지이기도 하다.

    슬로푸드 종합 매장이자 이탈리아 소프트파워의 첨병인 잇탈리(Eataly) 밀라노점. 올해 창립 10주년을 기념하는 갖가지 행사가 전 세계 지점을 통해 진행되고 있다. /유민호 소장

    LRM은 2014년 세계문화유산 선정 이전에도 이미 두 차례나 방문했던 곳이다. 당시에는 와인에 빠져들던 시기였기에, 슬로푸드에 대해서는 특별한 관심을 갖지 않았었다. 세계문화유산 선정 소식을 알았을 때 슬로푸드라는 키워드를 통해 LRM을 재음미해 보자는 생각을 굳혔다. 모든 것이 그러하듯, 어떤 안경을 쓰는지에 따라 세상이 달리 보인다.

    LRM 방문은 지난해 12월 31일부터 시작된 여정이었다. 1월 1일 신년 첫날 피에몬테 지방의 수도 격인 토리노(Torino)의 두오모(Duomo)에 들러 신년인사를 한 뒤, 곧바로 LRM으로 달려갔다. 토리노 남동쪽에서 50㎞ 떨어진 아스티-바롤로-바르바레스코-카부르(Cavour)-몬페라토-바르베라(Barbera) 등을 돌아봤다. 구석구석 관찰하는 동안 사흘이 흘러갔다. LRM의 전체적인 인상은 조용하다. 겨울이어서 관광객도 거의 없다. 포도밭이 끝없이 펼쳐져 있고, 어딜 가나 작은 산이 보인다. 파노라마로 펼쳐지는 비슷비슷하지만 넉넉한 풍광이 마음을 푸근하게 만든다. 산 사이의 계곡은 하루 종일 옅은 운무(雲霧)로 뒤덮여 있다. 일교차가 심하다는 의미다. 포도가 자라기에 좋은 기후와 지형이다.

    레스토랑 ‘라 피오라’

    슬로푸드는 ‘슬로 라이프’가 탄생시킨 결과물이기도 하다. LRM의 특징이지만 서두름이나 바쁨과는 거리가 먼 동네들이 이어진다. 시간이 멈춘 곳이라는 표현이 잘 어울리는 곳이다. LRM 지역의 집들은 대부분 산꼭대기에 들어서 있다. 이탈리아 도시의 풍경은 어디에 가도 비슷하다. 교회를 중심으로 관청·병원·도서관·학교가 하나로 연결돼 있다. LRM 도시들의 또 다른 공통점 중 하나는 동쪽을 향해 서 있는 전사자 기념비다. 동네마다 산꼭대기 한가운데에 기념비가 들어서 있다. 2차대전서 패한 전범국이지만 희생자를 잊지 않고 이름 하나하나를 전부 기록해 마을 한복판에 세워두는 나라가 이탈리아다.

    현장 체험은 슬로푸드의 의미를 알기 위한 기본이다. 바로 레스토랑 탐방이다. LRM를 돌아다니면서 슬로푸드의 면면을 하나씩 살펴봤지만, 가장 눈에 띈 곳은 알바(Alba)에서 들른 레스토랑 ‘라 피오라(La Piola)’였다.

     

    라 피오라는 슬로푸드 지역 전체를 통틀어 인기 정상을 달리는 곳이다. 연일 만원이어서 미리 예약을 하지 않으면 자리를 잡을 수 없지만, 갑자기 다른 손님의 예약이 취소되면서 운 좋게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가을부터 겨울에 걸쳐 슬로푸드를 대표하는 음식은 송로버섯인 트러플(이탈리아어로는 타르투포)이다. 트러플은 화이트·블랙 두 종류가 있다. 블랙 트러플만으로도 감지덕지하지만 미식가라면 화이트에 매달린다. 맛이 아니라 향이란 측면에서 화이트는 블랙의 비교 대상이 될 수 없다. 크기에 따라 가격도 대략 5배 정도 차이가 난다. 라 피오라는 1월의 화이트 트러플을 즐길 수 있는 몇 안 되는 레스토랑이다. 필자가 찾은 날, 손님들 대부분도 30유로나 하는 화이트 트러플 파스타를 먹으러 온 사람들이었다.

    메뉴를 보면서 주목한 부분은 달팽이 문양과 함께 새겨진 ‘슬로푸드 프레시디아(Presidia)’라는 글귀였다. 피에몬테 브라(Bra)에 본부를 둔 세계 슬로푸드협회(www.fondazioneslowfood.com)가 벌이고 있는 ‘특수농산물 생산자 보호’를 위한 문양이다. 특별한 생산자가 키운 특별 재료로 만들어진 요리라는 의미다. 달팽이 문양이 상징하는 전 세계 특수농산물 생산자는 1만3000여명이라고 한다. 라 피오라 메뉴판에서 달팽이 문양을 발견했다는 것은 이곳이 슬로푸드 협회 소속 레스토랑이라는 말이기도 하다. 현재 슬로푸드협회는 이탈리아를 비롯해 전 세계적으로 7만8000여명의 회원 레스토랑을 거느리고 있다.(2016년 기준) 슬로푸드는 지역성에 기초한 운동이지만, 참가자는 글로벌 차원이다. 보호 대상인 특수농산물 생산자 역시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아프리카나 남미, 아시아 농민들도 포함된다.

    슬로푸드의 파워는 전위병 역할을 하는 ‘메이드 인 이탈리아(Made in Italy)’ 먹거리의 총판을 통해 전 세계로 확산 중이다. 바로 ‘잇탈리(Eataly.com)’다. ‘먹다(Eat)’와 ‘이탈리아(Italy)’를 합성한 잇탈리는 이탈리아산 음식 백화점이자 슬로푸드 운동의 최대 성공작이라 할 수 있다. 국가의 개입 없이 철저하게 민간 비즈니스 차원에서 발전한 조직으로, 현재 이탈리아를 포함해 전 세계 9개 나라에 34개 매장을 가진 초대형 식품유통회사로 성장한 상태다.(2016년 기준) 한국은 이미 잇탈리가 진출한 9개 나라에 포함돼 있다. 규모가 작은 분점 스타일이지만, 2년 전 한 대형 백화점을 통해 서울에 진출해 있다.

    필자가 잇탈리에 주목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슬로푸드라는 측면과 함께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소프트파워의 본보기란 점에서다. 음식을 국가 차원의 소프트파워로 활용하는 이탈리아인의 지혜와 전략을 잇탈리를 통해 절감할 수 있다. 이탈리아의 소프트파워를 느낄 수 있는 잇탈리는 과연 어떤 곳일까? LRM을 돌아본 직후 잇탈리 현장으로 발길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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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1 알바 근처 산 정상에서 바라본 피에몬테 풍경. 02 냉동식품이 드문 나라가 이탈리아다. 프로슈터처럼 자연건조한 음식이 일상화돼 있다. 03 1g에 5유로 하는 송로버섯 화이트 트러플은 오직 주인만이 만질 수 있다. 04 1년에 한 번씩만 먹을 수 있는 슬로푸드의 대명사 화이트 트러플 파스타. 30유로 정도로, 한국에서의 가격은 이탈리아 현지 가격의 최소한 10배 정도다. 05 슬로푸드는 결코 싸지도 비싸지도 않다. 산지에서의 트러플 가격은 보통 사람들도 즐길 수 있는, 모두가 납득할 수준의 가격이다. 06 슬로푸드의 발상지 토리노 주변은 유네스코가 선정한 세계문화유산이다. 07 잇탈리에서 파는 와인은 1L당 대략 3유로 선이다. /유민호 소장

    슬로푸드 첨병 ‘잇탈리’ 10주년
      
    올해는 잇탈리 창업 10주년이다. 전 세계 매장을 통해 10주년 행사가 연초부터 열리고 있다. 필자가 찾아간 곳은 잇탈리의 핵심 본부 격인 밀라노 중심가 스메랄도(Smeraldo) 매장이다. 패션만이 밀라노의 전부는 아니다.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이탈리아 최신 트렌드는 대부분 로마나 피렌체가 아닌, 북부 밀라노에서 시작된다. 먹거리도 마찬가지다. 로마는 역사, 밀라노는 첨단이다. 연초라 밀라노 전체가 한산하지만, 잇탈리 매장 주변은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10주년 기념으로 나온 할인상품들을 구입할 겸 쇼핑에 나선 사람들이 주류다. 1유로에 구입할 수 있는 상품 50여종에 관한 광고가 입구에 걸려 있다. 안으로 들어가자 먹거리가 아닌 책들과 먼저 마주쳤다. 음식 소개, 요리 비법, 영양 관련 서적 코너가 입구에 바로 붙어 있다.

    지방 특산 요리나 요리 방법에 관한 책은 이탈리아인 모두가 관심을 갖는 만년 베스트셀러다. 서점만이 아니라 길거리 곳곳에 진열돼 팔린다. LRM 내 레스토랑을 돌아다니면서도 현지에서만 볼 수 있는 수많은 요리책들을 접할 수 있었다. 이탈리아 가정집 어디에 가도 요리법이나 요리에 관한 책들이 수두룩하다. 고속도로 휴게소에도 ‘반드시’ 현지 요리 제조법 관련 서적이 전시돼 있다. 맛보기로 한두 권 정도 선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통 10종류 이상이 전시돼 있다. 유명한 셰프도 있지만, 보통은 평범한 할머니가 설명하는 식의 요리책들이다. ‘움부리아 특산재료를 통한 버섯 요리’ ‘토스카나 육류를 활용한 스테이크 요리 30가지’ ‘나폴리인들이 즐기는 피자와 파스타 요리법’ 등의 제목을 단 컬러판 서적들로, 가격은 보통 10유로 전후다.

    잇탈리는 단순한 음식 백화점이 아니라 먹거리 테마파크로 느껴졌다. 이탈리아인이 제공하는 먹거리 관련 갖가지 아이디어가 넘쳐난다. 각각의 음식에 담겨 있는 다양한 지방색으로 무장한 스토리텔링은 그중 가장 흥미로운 부분이다.

    잇탈리 매장에서 가장 큰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와인은 스토리텔링의 대표주자다. 블라인드 테스트(Blind Test)로 와인 맛을 결정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도 없을 듯하다. 맛만이 와인의 전부가 아니다. 와인 소유주의 배경, 와인을 둘러싼 역사, 와인 제조법에 관한 비밀, 와인을 마신 수많은 사람들의 기억들을 하나로 엮은 스토리텔링의 결과가 바로 와인의 수준을 가늠한다. 칠레나 호주 와인이 아무리 맛있다 해도 프랑스·이탈리아 입장에서 보면 2류, 3류에 불과하다.

    잇탈리 내 상품은 이탈리아 전역을 대표한다. 특정 지역이 아니라 이탈리아 전역에서 제공된 물건들이다. 꿀 제품 하나만 해도 남부 풀리아를 비롯해 북부 베네통·롬바르디아 지방의 제품까지 갖추고 있다. 전국의 생산자들에게 판매 기회를 주면서, 잇탈리를 통해 홍보를 도와준다. 각자의 상품이 어떻게 다른지 직원에게 물어보면 늘 전문가가 달려와서 답해준다. 상세하게 잘 알고 있고, 손님이 이해할 때까지 설명해준다. 물건의 위치를 물으면 ‘반드시’ 손님을 진열대 바로 앞까지 안내해서 데려간다. 먹거리 하나하나에 스며든 농가의 정성까지 보여주겠다는 태도다.

    잇탈리 내 상품을 보면서 인상 깊었던 것은 가격대다. 양만 따지면 비싸지만, 질적 수준에 견주자면 싸다는 느낌이 든다. 잇탈리의 주된 상품은 전국적 유통망을 가진 대형 회사 제품과는 무관하다. 잇탈리 지점이 들어선 현지 농가 생산품만을 판다. 권역 내 중소 규모 생산 농가가 제공한 고품질의 상품만을 엄선해 판매하는 식이다. 뉴욕 잇탈리는 이탈리아 밖에 있는 매장 가운데 가장 큰 곳이다. 2000명 수용이 가능한 초대형 공간으로, 직원만도 무려 300명에 달한다. 2010년 8월, 맨해튼 다운타운 메디슨스퀘어에 개장한 이래 뉴욕의 명물로 자리 잡았다. 뉴욕 현지 미디어는 뉴욕 잇탈리를 뉴요커들의 ‘식혼(食魂)’을 지배하는 곳이라 부른다. 필자도 가끔 들르지만, 사실 가격이 엄청나다. 두 명이 가서 와인을 곁들인 식사를 한 후 파스타 면이나 치즈를 조금 구입한다 해도 최소 100달러 정도가 필요하다. 그나마 주말에 가면 사람들로 터져 나가 앉을 곳도 없다. 5달러 선의 냉동피자에 비해 무려 4배나 비싼 20달러대의 피자를 파는 곳이지만 이탈리아 재료로 현장에서 직접 만들어주는 피자란 점에서 초인기다. 파스타나 피자에 사용하는 치즈나 토핑용 제품들도 전부 ‘메이드 인 이탈리아’다. 밀라노 현지의 잇탈리 상품 가격은 대략 뉴욕의 절반 이하다. 파스타용 제노베세 소스의 경우 뉴욕이 8달러 선인 데 비해 밀라노에서는 4달러 선이다. 4달러도 엄청 고가지만, 뉴요커들에게는 대환영을 받을 가격이다. ‘메이드 인 이탈리아’이기 때문이다. 두 배 이상의 가격이라도 깐깐한 뉴요커를 매료시킬 질을 갖추고 있다.

    밀라노 잇탈리 매장은 전부 3층이다. 1층은 과일·채소·육류·생선과 같은 원재료에서부터 파스타·치즈·프로슈터·꿀·올리브 같은 먹거리를 판매한다. 2층과 3층은 와인·맥주와 같은 알코올류와, 잇탈리 재료를 통해 음식을 만드는 레스토랑들이 들어서 있다. 음식의 경우 파스타·피자·고기·생선요리처럼 분야별로 차별화해서 운영하고 있다. 속이 출출해서 2층 피자집에 들렀다. 부팔로(Buffalo) 모차렐라 피자와 밀라노산 맥주를 시켰다. 이탈리아인에게서 배웠지만, 피자에 어울리는 음료는 맥주다. 맥주가 입속의 치즈 기름기를 씻어주기 때문이다. 사실 이탈리아 청년들은 와인보다 맥주를 더 즐긴다. 이탈리아 음식은 ‘절대’ 미리 만들어두지 않는다. 냉동 재료를 통한 패스트푸드와는 격이 다르다. 주문하는 순간 요리에 들어간다.

    세계문화유산인 LRM 5개 도시에서 처럼 테마파크 잇탈리에서의 시간도 천천히 흘러간다. 슬로푸드와 이탈리아 소프트파워의 진수는 자신을 잊고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에 대한 경종(警鐘)으로 울려퍼지는 듯하다.

    <본 기사는 주간조선 2442호에서 발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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