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도 ‘콤프로마트’ 덫에 걸려들었나

지난 1월 10일 미국의 온라인 매체 버즈피드는 '러시아의 FSB가 미국 대통령 도널트 트럼프의 성관계 동영상을 확보했다'며 X파일 전체를 공개했다.
미국 정보기관들은 트럼프 X파일의 진위판단을 유보했지만, 여전히 논란은 증폭되고 있다.
또한 트럼프가 러시아 정보기관의 '콤프로마트' 수법에 걸려들었다는 가능성도 들려오고 있다.

  • 이장훈 국제문제애널리스트 
  • 편집=오현주

    입력 : 2017.02.03 07:25

    미국 인터넷 매체 '더 데일리비스트'가 지난해 7월 30일 게재한 러시아 콤프로마트를 풍자한 일러스트레이션 /주간조선

    지난해 4월 2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정적 중 한 명으로 꼽혀왔던 미하일 카시야노프 인민자유당 당수가 개인비서인 나탈리아 펠레바인과 성관계를 갖는 동영상이 방송을 통해 적나라하게 공개됐다.

    두 사람이 나눈 민망한 성적 대화들뿐만 아니라 분열된 야권의 다른 인사들에 대한 독설이 방송을 타고 나왔다. 카시야노프 당수는 2000년부터 2004년까지 총리를 맡았지만 러시아 최대 석유기업이었던 유코스에 대한 푸틴 대통령의 탄압을 비판한 괘씸죄로 축출돼 야당 인사로 변신했다. 카시야노프 당수는 2008년 대선 때 선거관리위원회가 아예 후보 등록조차 거부해 출마도 못 했다. 극작가 겸 연기자로 활동한 적도 있었던 펠레바인은 푸틴 대통령의 무리한 진압 명령으로 수백 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모스크바극장과 베슬란학교 인질사태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만들기도 했다. 외국 방송에 단골 출연해 유창한 영어로 푸틴 대통령을 비판해온 펠레바인은 크렘린궁이 가장 미워하는 여성이다. 두 사람이 모스크바의 한 아파트에서 은밀하게 성관계를 가진 장면을 생생하게 공개한 방송사는 러시아 NTV다. 민영방송이었던 NTV는 2015년 최대 국영 가스기업인 가스프롬에 인수됐다. 가스프롬은 회장을 비롯해 이사들이 모두 푸틴에게 충성해온 인사들이기 때문에 NTV는 푸틴의 개인 방송사라는 말까지 들어왔다. 동영상이 NTV를 통해 방영된 것은 푸틴의 눈엣가시인 이들을 제거하기 위한 정치적 의도가 분명했다. 실제로 동영상은 누군가가 이들이 올 것을 알고 사전에 설치한 몰래카메라로 촬영된 것이었다. NTV는 동영상의 제공자가 누구인지를 전혀 밝히지 않았다. 이후 인격적으로 ‘살인’을 당한 카시야노프 당수는 정계에서 사실상 퇴출됐다.

    그런가 하면 2010년 4월 러시아 야당 및 반체제 인사 6명이 모델로 추정되는 여성과 성관계하는 동영상을 한 시민단체가 인터넷에 공개해 망신을 당하기도 했다. 이 동영상에는 푸틴 대통령을 반대하는 글을 써온 자유주의 성향의 풍자 작가인 빅토르 셴데로비치, 활동이 금지된 전국볼셰비키당의 창립자 에두아르드 리모노프, 반체제 운동가인 알렉산드르 벨로프 등이 예카테리나 게라시모바(일명 카챠)라는 여성과 각기 다른 날 같은 침실에서 성관계를 갖는 장면이 담겨 있었다. 동영상에는 이들 중 일부 인사가 성관계 뒤 마약을 투약하는 모습도 있었다. 동영상은 여러 대의 몰래카메라로 촬영했는지 화면이 다양한 각도로 등장하는 데다 배경음악이 깔리고 코미디 프로그램 같은 장면이 삽입되는 등 교묘하게 편집돼 있었다.

    인터넷에 동영상을 올린 곳은 실체가 모호한 ‘도덕성 및 법과 시민합의를 존중하는 시민위원회’라는 단체였다. 이들 6명은 모델이라고 자신의 신분을 소개한 푸른 눈의 카챠에게 넘어가 성관계를 가졌다고 고백했다. 이 동영상을 몰래 촬영한 배후로는 옛 소련 시절 국가보안위원회(KGB)의 후신인 러시아 연방보안국(FSB)의 소행인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카챠는 FSB의 요원일 가능성이 높다. 동영상 공개 이후 카챠의 정확한 신원이나 행방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카챠는 러시아 사회의 어두운 면을 고발해온 미국 시사주간지 뉴스위크 러시아판의 편집장 미하일 피슈만과도 성관계를 가졌다. 두 사람의 동영상도 인터넷에 공개됐다. 피슈만은 “FSB의 미인계(honey trap)에 당했다”면서 “FSB가 자국 정부에 유리하게 보도하라고 압력을 가하기 위해 미모의 스파이를 이용했다”고 주장한 바 있다.

    푸틴, 미인계 통한 정적 제거

    2010년 미국에서 체포됐다 추방된 러시아 스파이 안나 채프먼의 러시아판 맥심 표지 사진. /주간조선

    2009년 8월에도 모스크바 주재 미국 대사관의 2등 서기관 카일 해처와 영국 대사관의 부영사 제임스 허드슨이 러시아 여성들과 성관계를 맺은 동영상이 인터넷에 공개되기도 했다. 동영상에는 유부남인 두 외교관이 매춘부로 추정되는 여성들과 밀회를 즐기는 모습이 몰래카메라로 촬영돼 있었다. 이들은 외교관 신분을 가장한 정보요원들이었다고 한다. 서방 외교관들은 이들의 동영상을 찍은 배후는 FSB로 추정된다고 밝히기도 했다. KGB는 외국 정보요원이나 외교관들에게 미인계를 이용해서 자국에 협조하길 강요하는 방법을 사용하곤 했다.

    과거 KGB 요원이었던 푸틴 대통령도 미인계와 섹스 동영상을 통한 협박 등을 통해 정적을 제거하는 데 탁월한 솜씨를 발휘했다고 한다. 푸틴은 1996년 보리스 옐친 초대 러시아 대통령의 눈에 들어 대통령 총무실 부실장으로 임명된 뒤 이런 수법을 통해 경쟁자와 정적들을 없애고 3년6개월 만에 후계자인 총리로 고속 승진했다고 알려져 있다. 실제로 1999년 당시 검찰총장이었던 유리 스쿠라토프가 모스크바의 한 아파트에서 두 명의 매춘부와 목욕하는 장면이 담긴 비디오테이프가 국영 TV를 통해 방영돼 러시아 국민을 깜짝 놀라게 만든 적이 있었다. 당시 스쿠라토프는 대통령 측근을 포함한 고위층의 부패를 파헤치는 수사를 총지휘하고 있었다. 이 비디오테이프 역시 FSB의 작품으로 추정됐다. 당시 FSB의 국장은 푸틴이었다. 이후 스쿠라토프는 사임해야만 했고, 부패 수사는 흐지부지됐다. 옐친은 푸틴을 총리로 승진시켰고, 푸틴은 옐친에 이어 국가 최고지도자가 됐다.

    KGB가 분리 해체된 후 1995년 발족한 FSB는 초기에는 마피아 등 폭력조직 정보수집과 치안과 대테러 임무에 주력했기 때문에 고유의 정보활동은 제한적으로 수행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푸틴의 대통령 취임 이후 FSB는 현재 러시아에서 가장 강력한 권한을 행사하고 있다. FSB 국장은 장관급이자 현역 육군 대장 신분이며, 자체 특수부대를 운영하고 있고, 법적으로 다른 기관의 감독을 받지 않는 특권도 지닌다. FSB의 예산과 인원 규모는 비밀이지만 정규요원만 50만명으로 추정된다. FSB는 또 범죄를 저지를 여지가 있다고 판단되는 인물을 영장 없이 무조건 소환해 조사할 권한도 있다. 푸틴이 일과를 시작할 때 가장 먼저 보는 게 FSB의 국내 정세 보고서일 정도로 두터운 신뢰를 받고 있다. 실제로 푸틴이 장기 집권하고 있는 것은 FSB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FSB는 그동안 푸틴의 통치에 걸림돌이 되는 인물들을 제거해왔다. 푸틴이 정권을 잡은 이후 피살된 정적들과 언론인들이 지금까지 30여명이 넘지만, 범행 동기나 배후가 제대로 밝혀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과거 모스크바의 한 호텔에서 섹스 파티를 하던 장면을 찍은 동영상을 FSB가 가지고 있다는 이른바 ‘트럼프 X파일’ 의혹이 제기되면서 미국은 물론 국제사회가 상당한 충격을 받고 있다. 트럼프 X파일이 만들어진 것은 2013년인 것으로 보인다. 당시 트럼프는 모스크바에서 열리는 미스유니버스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러시아를 방문해 5성급 호텔인 리츠칼튼호텔에 묵었다. 트럼프는 1996년 미스유니버스 조직위원회를 인수해 매년 미스유니버스, 미스USA 등 미인대회를 주관해왔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가운데)과 외교안보 장관들. 왼쪽 옆이 보르트니코프 FSB 국장. /크렘린궁 사이트

    당시 러시아의 부동산 재벌인 아라스 아갈라로프는 트럼프에게 2000만달러를 주고 모스크바에서 처음으로 미스유니버스대회를 개최했었다. 트럼프는 푸틴에게 초청장을 보내기도 했지만 푸틴은 참석하지 않았다. 리츠칼튼호텔은 옛 소련 시절 인투리스트호텔이었는데, 벨보이부터 청소부까지 모두 KGB를 위해 일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정보기관들이 좌지우지하던 호텔이었다. 어쨌든 이 호텔의 스위트룸에 투숙한 트럼프는 매춘부들을 불러 자기 앞에서 골든샤워(golden shower·오줌싸기) 등 음란한 짓을 시키면서 즐거워했고, 이를 FSB가 차후 트럼프를 협박할 무기로 쓰기 위해 몰래 촬영해 남겨놓았다는 것이다.
      
    트럼프 X파일 작성자는 1990년대 러시아에서 2년간 활동했던 영국 대외정보국(MI6) 요원이었던 크리스토퍼 스틸이다. 2009년 MI6을 떠난 스틸은 현재 영국 런던에서 사설 정보업체인 ‘오르비스 비즈니스 인텔리전스’를 운영하고 있다. 스틸은 2015년 9월 미국 정보업체 퓨전GPS로부터 트럼프와 러시아의 관계를 캐달라는 의뢰를 받았다. 퓨전GPS는 공화당 대선 경선 주자 가운데 하나였던 젭 부시 전 플로리다 주지사의 한 지지자가 돈을 댔다고 한다. 하지만 공화당 경선에서 트럼프의 승리로 끝난 뒤 돈이 끊겼고 대신 민주당 쪽에서 자금이 들어왔다. 이후 자금 지원이 아예 끊겼지만 스틸은 의무감에 계속 정보를 수집했다고 한다. 스틸은 지난해 9월 정보를 MI6과 미국 연방수사국(FBI)에 제공했다. 존 매케인 공화당 상원의원도 지난해 11월 앤드루 우드 전 러시아 주재 영국대사로부터 X파일을 입수해 FBI에 이를 넘겼다. 제임스 클래퍼 국가정보국(DNI) 국장을 비롯해 제임스 코미 FBI 국장 등 미국 정보기관 수장들은 지난 1월 6일 당시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트럼프 당선인, 의회 지도부에 러시아의 해킹 등 미국 대선 개입 의혹에 대한 기밀보고서를 보고하면서 X파일에 담긴 자료 2쪽을 첨부해 제출했다. 이때 정보기관 수장들은 X파일은 어디까지나 참고자료로 정보의 신빙성은 아직 확신할 수 없다고 밝혔다.

    호텔 객실 423개 중 60개에 도청

    트럼프와 세 번째 부인인 슬로베니아 모델 출신 멜라니아. /위키피디아
    X파일의 내용을 가장 먼저 폭로한 언론은 미국의 온라인 매체 버즈피드였다. 버즈피드는 지난 1월 10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의 성관계 동영상을 러시아의 FSB가 확보했다’면서 35쪽 분량의 X파일 전체를 공개했다. 버즈피드는 “미국 국민들이 스스로 판단할 수 있도록 전체 문건을 공개한다”면서 “다만 이 문건은 미확인 상태로 기업 이름을 잘못 쓰는 등의 명백한 오류도 있다”고 밝혔다. 그러자 CNN을 비롯해 뉴욕타임스 등도 X파일 의혹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트럼프는 지난 1월 11일 당선 이후 가진 첫 기자회견에서 “전혀 사실이 아니다”라면서 펄쩍 뛰었다. 트럼프는 언론들이 자신에게 불리한 ‘가짜 뉴스’를 내보내는 등 ‘정치적 마녀사냥’을 하고 있다면서 CNN과 버즈피드를 향해 “수치스럽다” “실패한 쓰레기 더미”라고 직격탄을 날리기도 했다. 트럼프는 자신을 조심스러운 사람이라고 표현하면서 설마 자신이 모스크바에서 그런 경솔한 행동을 했겠느냐고 반박했다. 하지만 사실이라면 세계 최강의 권력을 지닌 미국 대통령이 러시아에 코가 꿰인 꼭두각시가 됐다는 것인 만큼 자칫하면 탄핵 얘기가 나올 것이 분명하다.

    버즈피드는 지난 1월 10일
    '도널트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의 성관계 동영상을
    러시아의 FSB가 확보했다'면서
    35쪽 분량의 X파일 전체를
    공개했다.

    미국 정보기관들은 트럼프 X파일에 대한 진위 판단을 유보했지만, 미확인 정보들이 미국과 영국 등에서 언론보도를 통해 급속히 불거지면서 논란은 더욱 증폭되고 있다. 특히 FSB 등 러시아 정보기관들은 그동안 ‘콤프로마트(kompromat)’라는 수법을 종종 사용해왔기 때문에 트럼프 X파일이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을 수도 있다. 콤프로마트란 도청장치, 몰래카메라 등을 동원해 유명 정치인·기업인들이 매춘부 등과 놀아나는 장면을 촬영한 뒤 협박을 가하는 형태의 공작을 말한다. 콤프로마트는 또 옛 소련 시절 정적들을 제거하기 위해 수치스러운 성적 행위를 폭로하거나 혐의를 뒤집어씌우는 수법으로도 사용돼왔다. 일종의 약점 잡기 또는 평판 흠집 내기 공작을 말한다. 콤프로마트가 가장 많이 사용된 곳은 인투리스트호텔이었다. KGB는 소련 곳곳에 있던 인투리스트호텔들에 도청장치, 몰래카메라 등을 설치해 운영해왔다. 물론 상당한 숫자의 고급 매춘부를 고용했을 뿐만 아니라 자체적으로 훈련시킨 미녀와 미남 요원들을 투입하는 등 미인계까지 동원했다. 소련 시절 스파이 장비를 전시하는 에스토니아의 탈린에 있는 박물관 운영자인 피프 에하살루는 “당시에는 인투리스트호텔의 423개 객실 중 60개에 도청 장비가 설치돼 있었다”면서 “KGB가 노골적인 사진을 찍어 가족에게 보내겠다고 협박하면 웬만한 인사들은 협조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고 밝혔다. 콤프로마트는 소련 시절 사진과 비디오가 주로 이용됐지만 지금은 컴퓨터를 해킹해 공격 대상의 추잡한 행위를 조작하는 등 훨씬 복잡해지고 있다. 러시아에서 영국으로 망명한 반체제 인사 블라디미르 부코프스키의 경우 아동 포르노물을 만들고 소유한 혐의로 영국에서 재판을 받고 있다. 부코프스키는 러시아 해커가 자신의 컴퓨터에 아동 포르노물을 심어 놓았다면서 새로운 방법의 콤프로마트라고 주장하고 있다.

    트럼프 X파일의 진위 여부는 앞으로 쉽게 밝혀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신빙성은 있다. 펠레바인은 영국 BBC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트럼프가 FSB의 콤프로마트에 걸려들었다는 증거는 없지만 과거의 경험에 비춰 보면 FSB가 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무리도 아니다”라고 밝혔다. 물론 FSB가 미국 정치권을 혼란에 빠뜨리기 위해 역정보를 흘렸을 가능성도 있다. 아무튼 영화는 아니지만 영화와 같은 트럼프 X파일 사태의 승자는 진위 여부를 떠나 푸틴이 될 듯하다.

    <본 기사는 주간조선 2442호에서 발췌했습니다.>

    안갯속 트럼프 시대 재테크 제1원칙, “흩어져야 산다”
    “트럼프, 대만 총통과 통화로 중국 외교 어려워질 듯… 美 보호무역 기조에도 한·중·일 협력 강화 쉽지 않아”
     
  • Copyright ⓒ 조선일보 & Chosun.com
  • 이전 기사 다음 기사
    기사 목록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