폼나는 청소기 들여놨어요 남자라서 행복해요~

가전제품이 여자만의 전유물은 옛말이다.
남자들도 가전제품에 눈 독을 들이기 시작했다.
기능보단 디자인을 중시하는 추세까지 이어지며 그들만의 가전열풍이 시작됐다.

    입력 : 2017.01.24 17:30

    [Trend: '관상용 가전'에 빠진 남자들]
     

    “여자라서 행복해요.”

    2000년대 초반만 해도 냉장고를 보면서 “행복하다”고 말하는 건 여성이었다. 카피계의 전설로 남은 이 광고에서 냉장고는 가사(家事)를, 배우 심은하는 여성을 상징했다. 하지만 20여년이 흘러, 이 카피는 수정이 불가피해졌다. 비혼(非婚)이 증가하고, 남녀 초혼 연령이 30세를 넘어서는 등 1인 가구 500만 시대가 도래하면서 ‘살림하는 남자’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작년 한 해를 강타한 방송계 트렌드 ‘쿡방(요리방송)’은 남성이 주도했다. 여성 문화로 익숙하던 요리에 본격적으로 남성이 끼어들기 시작한 것이다. 요리뿐만이 아니다. 토스터나 전기 주전자, 공기청정기 같은 생활가전에서도 남성 구매력이 커지고 있다. 이제는 “남자라서 행복해요” 말하는 시대다.

    1)발뮤다 전기주전자 ‘더 팟’2)다이슨 공기청정기 겸 선풍기 ‘퓨어 핫앤쿨 링크’ 3)다이슨 드라이어 ‘슈퍼소닉 헤어드라이어’ 4)발뮤다 선풍기 ‘그린팬 S’ 5)발뮤다 ‘더 토스터’6)발뮤다 밥솥 ‘더 고한’. /다이슨·발뮤다코리아 제공

    인테리어 소품이 된 생활가전

    정장효(31)씨는 올겨울 휴가를 밥솥 출시일에 맞췄다. 일본 브랜드 ‘발뮤다’의 ‘더 고한(ごはん·밥)’이라는 제품이다. 다음 달 말 도쿄로 ‘원정 구매’를 떠난다. “한국 정식 수입이 9월이라 오래 기다리기 싫었다”는 그는 전셋집 곳곳을 고가의 가전제품으로 꾸미는 재미에 푹 빠져 있다. 100만원 넘는 공기청정기와 무선 청소기, 날개 없는 선풍기를 인테리어 소품처럼 전시한다. “기능도 기능이지만, 관상(觀賞)이 목적이에요. 잘빠진 가전제품을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져요.” 일본서 사오려는 밥솥은 매끈한 도자기를 닮았지만, 보온 기능이 없다.

    단순함과 간결함을 추구하는 ‘미니멀리즘’ 트렌드도 가전제품의 인테리어화에 한몫했다. 결혼 3개월차 신동천(33)씨의 신혼집은 “비울 대로 비운 공간”이지만 집안 곳곳 디자인 가전제품을 들여놨다. 거실 한편에 세워둔 영국 브랜드 ‘다이슨’의 무선청소기는 130만원대, 화장대에 얹어놓은 헤어드라이어는 60만원대다. 가격 비싸지만 디자인 빼어난 제품으로, 신씨가 결혼하기 전부터 쓰던 물건들이다. “아무리 비우더라도 일상생활에 필요한 가전은 들여놓아야 하죠. 다른 가구가 별로 없으니 생활가전은 집 안을 꾸미는 중요한 인테리어 소품이 돼요. 청소기라고 먼지만 잘 빨아들이면 되는 게 아니라 장식품 역할까지 소화해야 하는 거죠.”

    가성비보다 ‘디성비’

    남성 소비를 대변하는 단어는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였다. 하지만 최근 소비 경향은 ‘디성비(디자인 대비 성능)’. ‘더테이블’이 지난 17일부터 나흘간 ‘생활가전 구매 경험이 있다’는 20대 이상 남성 382명을 설문한 결과, ‘가전제품 구매 시 가장 고려하는 항목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145명(37.9%)이 ‘디자인’, 80명(20.9%)이 ‘기능’이라고 답했다. 이어 ‘가격’(66명·17.2%), ‘가전 트렌드’(35명·9.2%), ‘편의성’(15명·3.9%) 등이 꼽혔다.

    ‘디자인’을 선택한 145명 중 절반이 넘는 74명(51%)은 그 이유로 ‘가전제품을 인테리어의 일부로 생각해서’라고 답했다. ‘제품 간 성능 차이가 미비해서’(58명·40%), ‘방송·영화 등 PPL 영향’(8명·5.5%), ‘한번 사면 오래 사용해서’(5명·3.4%)보다 높았다. 선혜연 발뮤다코리아 마케팅팀장은 “여성 문화로 치부하던 홈·리빙 분야에 관심을 보이는 남성이 늘면서 제품 구성에도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면서 “제품을 홍보할 때 ‘디자인’과 ‘과학적 성능’ 두 가지를 강조해 남성 소비자의 이목을 끌고 있다”고 말했다.

    “디자인 최우선” 외치는 중·장년층도

    뒤늦게 생활가전에 빠진 중·장년층 남성도 있다. 이들은 2030세대보다 더 구매력 있는 소비층이다. 다이슨이 분석한 ‘홈쇼핑 채널 시청률 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10월 20일 오후 9시 30분부터 10시 30분까지 방송한 ‘롯데홈쇼핑―최유라쇼’의 수도권 시청자 수는 남성이 1621명, 여성이 536명이었다. 전국 시청자 수도 남성이 2610명, 여성이 1875명으로 남성 수가 월등히 많았다. 이날 판매한 제품은 130만원대 ‘다이슨 V8 플러피 무선청소기’였다. 김효은 다이슨 홍보담당은 “디자인·가격·실용성 등을 복합적으로 고민하는 여성과 달리, 남성 소비자는 디자인과 성능만 갖추면 가격에 크게 구애받지 않는다”면서 “구매자 중 남성 비율이 날로 높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은퇴 후 요리를 배우는 김승윤(56)씨는 지난달 초 70만원대 공기청정기 한 대를 샀다. 스탠딩 에어컨을 10분의 1 크기로 줄여놓은 듯한 모양이다. 종편의 한 생활정보 프로그램에서 ‘요리 매연이 폐암을 유발한다’는 이야기를 듣고서 인터넷을 뒤져 “가장 폼나는 모양”으로 샀다. 김씨는 “20~30년간 썼던 가전제품을 보면 내 인생과 닮았다는 생각을 한다”고 했다. “자식들 키우면서 늘 제겐 인색했어요. 가전제품도 무조건 저렴한 것, 튼튼한 것만 고집했죠. 은퇴하고서 좋아하는 일 하는 지금은 조금 사치를 부려도 되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그는 달궈진 프라이팬 위로 가자미 한 마리를 올렸다. 껍질이 붙어 있는 한쪽 면이 노릇하게 구워지는 동안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고, 그 옆에선 하얀 공기청정기가 쉴 새 없이 매연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추억까지 버릴 수 없어… 옷장 정리하다 포기한 ‘최소한의 삶’
    [The 테이블] “노력의 복리법칙…땀 한 방울의 차이가 연봉 2배로”
    살림에 재미 붙인 남자들
     
  • Copyright ⓒ 조선일보 & Chosun.com
  • 이전 기사 다음 기사
    기사 목록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