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선’ 속 디자인 공기업, 칼퇴근은 없어요

문화생활이 곧 직업인 사람들이 있다. DDP를 사옥으로 쓰는 ‘서울디자인재단’이
바로 그들의 직장이다. 밤샘 근무도 허다하지만 예술을 위해 일한다는
자부심으로 사원들이 높은 만족도를 보이고 있는 것 또한 눈에 띈다.

    입력 : 2016.11.22 17:11

    [남의 회사 구경하기: <8> DDP 운영하는 서울디자인재단]
     

    겉모습은 불시착한 우주선, 들어가면 고래 배 속 같은 건축물이 있다. 영화·방송의 단골 촬영지이면서 한국 방문한 전 세계 건축학도가 성지(聖地)처럼 다녀가는 곳. 재작년 MBC ‘무한도전’이 영화 ‘스타트랙’을 패러디한 ‘지구를 지켜라’ 특집을 방송했을 땐 ‘우주선’이란 이름값을 톡톡히 해냈다.

    귀 뾰족한 외계인 ‘스팍’으로 변신한 유재석은 영화 속 ‘엔터프라이즈호’를 연상시키는 우주선 앞에서 “지구를 정복하러 왔다!”고 소리친다. 은색 외관으로 천연히 빛나는 이 우주선의 이름은 ‘DDP’(동대문디자인플라자). 이라크 출신의 세계적인 여성 건축가 자하 하디드(Hadid)가 설계한 ‘환유의 풍경’을 옛 동대문운동장 터에 구현한 복합 문화시설이다.

    MBC ‘무한도전’은 ‘지구를 지켜라’ 특집을 DDP에서 촬영했다. /MBC

    디자인에 목숨 건 ‘동대문 터줏대감’

    세계 건축학도들의 聖地
    365일 전시 등 문화생활이 곧 일

    직원들 디자인에 목숨 걸어
    전자레인지·정수기도 빌트인

    공기업 ‘서울디자인재단’은 이 우주선을 사옥으로 사용한다. 365일 전시가 끊이지 않는 DDP를 운영·관리하고, 서울시의 디자인 정책을 연구·실행하는 것이 이들의 주 업무다. DDP 내 ‘살림터’ 3층에 마련된 집무실은 사무 공간보단 대형 전시실을 연상케 했다. 높은 천장이 인상적인 363㎡(약 110평) 남짓한 이 공간은 군더더기 없는 ‘네모’다. 사물함과 냉장고, 전자레인지, 정수기까지 전부 빌트인(Built-in·내장형)이라 벽 바깥으로 고개 내민 물건이 하나도 없다. 디자인 전공자가 넘쳐나는 회사라 “디자인은 더하기가 아니라 빼기”라는 미감(美感)이 사무실 곳곳에 배어 있다.

    직원 145명이 모두 DDP에서 일하는 건 아니다. 근무처는 동대문(흥인지문)을 중심으로 세 곳에 퍼져 있다. ‘서울패션창작스튜디오’를 관리하는 패션·봉제팀은 DDP에서 도보로 3분 거리인 유어스(U―US) 빌딩 4층에서 일한다. 동대문 성곽길에 위치한 ‘서울디자인지원센터’는 서울시 관련 디자인의 연구·기획·행사를 맡은 ‘디자인 경영단’의 거처. DDP의 전시·운영을 관리하는 ‘DDP 경영단’이 ‘살림터’를 사용하지만 전체 회의는 이곳에서 진행돼 사원들은 이곳을 ‘본진(本陣)’이라 부른다.

    우주선을 닮은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의 야경. /조선일보 DB

    3층에 자리한 회의실은 도서관과 강당이 결합한 형태다. 660㎡(약 200평) 남짓한 넓은 공간으로 들어서면 좌측은 디자인 서적 1만3000여권이 꽂힌 도서관, 우측은 계단식 강연장으로 꾸며놨다. 직선이 없는 DDP 외관 특성상 벽면은 비스듬히 둥글고, 곳곳에 뚫린 창문은 곤충의 눈처럼 보인다.

    한 층 아래 회의실도 굴곡진 벽면 전체가 책장이다. 원목(原木)으로 만든 책상과 의자엔 손바닥 크기만 한 ‘인증서’가 박혀 있다. 단순한 가구가 아니라 토마스 헤더윅(Heatherwick), 마크 뉴슨(Newson) 등 유명 디자이너들 ‘작품’이라서다. 김수정 전시팀장은 “수준 높은 인테리어 소품을 사용하다 보니 사원들의 전반적인 디자인 감각이 뛰어나다. 자신이 사는 집이 인테리어 잡지에 소개된 사원들도 많다”고 했다.


    칼퇴근? 새벽에 퇴근할 때도 많아요


    일년 내내 행사가 끊이지 않다 보니 야근도 잦은 편이다. 사원들은 “공기업 다닌다고 하면 ‘칼퇴’할 거라 생각하지만 오산”이라고 했다. 동대문 쇼핑몰과의 상생도 DDP 역할이라 늦은 밤 활기 띠는 동대문 거리를 활보해야 하는 날도 많다. 다들 ‘동대문 전문가’라 자부할 만큼 쇼핑몰 개·폐장 시간부터 동대문 시장 맛집, ‘이 물건은 어딜 가면 싸다’ 같은 쇼핑 정보를 줄줄 꿴다. 6월부터 10월까지 5개월간 매주 금·토 자정까지 진행했던 ‘밤 도깨비 야시장’과 ‘심야 미술관’ 행사 땐 부서 가리지 않고 새벽 퇴근이 일상이었다.

    '밤도깨비 야시장'은 6월부터 10월까지 매주 금·토 DDP에서 열렸다. /조선일보 DB

    밤새 일한다고 월급 더 받는 것도 아닌데 사원들 업무 만족도는 시(市)에서도 최상위권이다. 유성자 마케팅팀장은 “디자인과 가까이 일하던 사람들에게 DDP만큼 매력적인 직장은 없다. 예술은 지척이고, 서울 시민을 위해 일한다는 뿌듯함까지 더해져 다들 즐겁게 일한다”고 했다. 사옥을 방문한 지난 15일도 사원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배움터’ 2층에서 진행된 ‘간송과 백남준의 만남―문화로 세상을 바꾸다’ 전시를 둘러보고 왔다. “전시 관람도 일의 일부이니까요.”(시설운영팀 박오름 선임)

    사무실 곳곳에 세워진 손바닥 크기의 사진 액자들도 눈에 띄었다. 유명 인사가 방문할 때마다 함께 모여 찍은 사진들이다. 이탈리아 디자인의 대부로 불리는 알렉산드로 멘디니(Mendini), 건축가 자하 하디드 같은 거장들부터 촬영차 이곳을 찾은 ‘무한도전’팀, 배우 소지섭, 미술평론가 유홍준 교수도 보였다. 김윤희 패션팀장은 “일만 열심히 해도 문화적 소양이 절로 쌓인다. 이 직장에 다니지 않았다면 평생 만나볼 기회가 없었을 유명인과 사진 찍고 악수하는 것도 소소한 즐거움 중 하나”라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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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디자인재단이 신진 패션 디자이너를 발굴·지원하기 위해 운영하는 ‘서울패션창작스튜디오’. MBC ‘복면가왕’의 ‘가면 제작자’로 유명한 디자이너 황재근도 이 스튜디오에서 신인 시절을 보냈다.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서울디자인재단의 목표는 영국의 ‘디자인 카운슬(Design Council)’ 같은 세계적인 기관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것. 해외 유학도 적극 추천하는 분위기다. 장시간 특정 분야에 오래 몸담는 준(準)공무원 특성상 전문성을 인정받아 국제기구 유관기관에 임시직으로 고용되면 3년까지 휴직할 수 있다. 이 복지는 ‘주어진 것’이 아니라 사원들이 적극 의견을 내 ‘쟁취한 것’이다. 매달 첫주 열리는 월례조회 ‘아이엠(I am)’이 소통 창구다. 전 사원이 무기명으로 회사에 바라는 점을 적어 의견함에 넣으면 대표는 이에 대해 답변을 마련해야 한다.

    여성이 60% 남짓이라 출산·육아 관련된 복지가 잘 갖춰져 있다. 육아휴직 2년은 남녀 사원 상관없이 눈치 보지 않고 사용한다. 불임이나 난임 진단을 받으면 60일간 병가도 낼 수 있다. ‘주 5일 근무’는 의무적으로 지키는 편. 주말 근무가 발생하면 3주 이내에 대체휴가를 반(半) 강제로 써야 한단다. 오전 9시 출근해 오후 6시 퇴근이 기본이지만, 아이가 있는 사원은 유연하게 출퇴근 시간을 조정할 수 있다. 공예디자인팀 남상훈 선임은 지난달 육아휴직을 마치고 업무에 복귀했다. “육아휴직을 적극 권장하다 보니 일반기업 다니는 대학 동기들이 특히 부러워해요. 아내도 잔소리하죠. ‘너만 보면 이직 욕구가 샘솟는다!’”




    신진 디자이너 발굴해 작업실 제공 등 지원
    “창작 활동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 만들어줘”

    서울패션창작스튜디오

    14일 오전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옆 유어스(U―US)빌딩 5층. 9.9㎡(약 3평) 남짓한 공간 40여개에서 패션 디자이너 30명이 작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이곳은 서울디자인재단이 운영하는 ‘서울패션창작스튜디오’. 패션 디자이너 유망주를 발굴해 작업 공간을 제공하고, 디자이너 브랜드의 홍보·마케팅을 지원해 자립시키려는 목적으로 2009년 설립됐다.

    선발 대상은 국내외 패션 디자이너 중 창업 연수가 5년 이내인 신인. 최대 지원 기간은 2년이고, 이 기간이 지나면 ‘졸업’하는 구조다. MBC ‘마이 리틀 텔레비전’에 출연해 자신을 “‘복면가왕’의 가면 디자이너’”로 소개하며 이름을 알린 디자이너 황재근도 이 스튜디오 출신. 업계에서 신인(信人)이 된 디자이너 계한희·이명신·윤춘호·박종우 등도 이곳에서 신인(新人) 시절을 보냈다. 유명 디자이너를 지속적으로 배출하면서 개원 당시 1.5대1이던 입주 경쟁률은 올해 10대1까지 상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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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랜드 ‘Joseph Ahn’의 안희철 디자이너.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졸업생들은 이 스튜디오의 장점으로 “창작 활동에 전념할 환경”을 꼽는다. 스튜디오에 소속되면 창작비 6000만원을 지원하는 품평회 개최를 비롯해 봄·가을 두 차례 열리는 ‘서울패션위크’ 참가, 룩북(Look Book)·E룩북 무료 제작, 연예인 및 잡지 협찬, ‘제너레이션넥스트―서울’ 참가, 온·오프라인 유통 채널을 통한 팝업 행사 등을 지원받는다.

    입주 전 연 매출액이 채 5000만원이 안 되던 브랜드 ‘Low classic’은 졸업 후 매출이 15억원까지 올랐고, ‘Salad bowls’는 5000만원에서 2억5000만원으로, ‘Be’는 1억원에서 21억5000만원으로 상승했다. 4층에 마련된 미싱 공간에선 디자이너 다섯 명이 재봉틀 앞에 앉아 옷감을 재단하고 있었다. 이곳의 이름은 ‘미남미녀’. ‘미싱하는 남자, 미싱하는 여자’의 줄임말이다. 지난해 입주한 조셉 안(Joseph Ahn) 디자이너는 “좁은 작업실에서 디자이너로서 성공을 꿈꿨을 선배들을 생각하면 없던 열의도 절로 생긴다”며 웃었다. 재봉틀의 규칙적인 박음질 소리가 그의 노랫소리처럼 들렸다.




    매년 11월 6급 공채… 1차 면접엔 평사원 전원이 참여

    “봉사 정신 중점적으로 평가”

    서울디자인재단은 11월 3일까지 하반기 신입사원 공개채용을 실시했다. /서울디자인재단

    서울디자인재단은 매년 11월 공개 채용으로 6급 신입사원을 선발한다. 이달 초 실시한 2016년 공채에선 20명 선발에 2100여 명이 지원해 105대1의 경쟁률을 기록했다.

    서류 심사 후 1차 면접은 6급에서 3급 사이의 평사원 전원이 면접관으로 참여한다. “함께 일하고 싶은 사람을 직접 선발하라”는 이근 대표의 지시 때문. 공기업이다 보니 채용에서 중점적으로 평가하는 요소는 ‘봉사 정신’이다. 김민희 인사팀장은 “시민이 주인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를 운영하려면 사익보다 공익을 추구해야 한다”며 “채용 과정에서 ‘이타심’을 진정성 있게 피력하면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근 대표는 스스로를 ‘3년 임기 계약직 축구 감독’에 비유했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구단주, 본부장 5명은 코치, 팀장·팀원은 선수입니다. 선수를 제외한 직책은 이들이 경기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해야죠. 구단주는 외압으로부터 축구팀을 지켜야 하고, 코치진은 팀장에게 객관적인 조언을 던질 수 있어야 합니다. 준(準)공무원 조직이라고 해서 결코 수직적이거나 딱딱하지 않습니다. 원활한 의사소통을 기반으로 이 축구팀을 우승시키는 것이 저의 목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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