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혈병 환자 생명 구하기 나선 장병들

백혈구 성분헌혈은 일반 헌혈에 비해 절차가 까다롭고 시간이 오래 걸린다.
전남 화순 503-6대대에서는 백혈병을 앓는 환아들을 위해 기꺼이 팔을 걷었다.
자진해서 성분헌혈에 동참한 장병들을 만나고 왔다.

    입력 : 2016.10.19 10:12

    [Top Class: 육군 31사단 이운섭 의무대장·김태준·김주완·임향섭·장민재]
     

    생명을 살리는 한 걸음은 멀리에 있지 않다. 전남 화순 503-6대대에서는 아픈 아이를 위해 팔을 걷었다. 백혈병을 앓는 환아들을 위해 백혈구 성분헌혈에 동참한 것이다. 백혈구 성분헌혈은 일반 헌혈에 비해 절차가 까다롭고 시간이 오래 걸린다. 하지만 생명을 살리는 데 즉각적인 도움을 줄 수 있다.

    올해 우리나라 헌혈 보유 현황이 비상사태다. 2016년 1월 7일 기준, 적혈구제제는 2.1일분만 보유 중이다. 혈액 보유량의 적정 수준은 5일분이다. 2일분은 경계와 심각 단계다. 메르스 발생 이후 미뤄졌던 수술 및 치료가 2015년 하반기에 몰리면서 혈액 사용이 늘어나 생긴 현상이다. 일부 병원에서는 혈액 수급이 되지 않아 수술 당일 수급하는 경우도 많아졌다. 대한적십자사 홈페이지에는 ‘헌혈 참여 호소문’이 올라 있다.

    애가 타는 건 환자들이다. 백혈병 환자의 경우, 백혈구 수치가 떨어지면 치명적인 상황에 노출된다. 백혈구가 모자라면 면역력이 떨어져 합병증에 노출될 수 있다. 지난 8월 1일 전남 화순에 있는 전남대병원에서 긴급 SOS가 왔다. 백혈병을 앓고 있는 11개월 영아가 위독하다는 전갈이었다.

    “소아과 담당 의사들의 간절함이 느껴졌습니다. 일단 가장 가까운 화순부대에 연락을 넣었습니다. 지원자가 없으면, 다른 부대에 도움을 요청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503-6대대에서 9명의 장병이 헌혈을 하겠다고 나왔습니다.(이운섭 의무대장)”

    (가운데) 이운섭 의무대장. /김선아

    제가 의무병과 장교로
    복무하면서 느끼는 건
    ‘세상에 우연히 던져진
    존재는 없다’는 것입니다.

    특히 환자들을 볼 때
    그들의 눈에서 생명에
    대한 간절함을 읽습니다.

    그들을 위해 기꺼이
    도움의 손길을 내민
    장병들이 귀한 이유이지요.

    이운섭 의무대장

    영아의 혈액형은 O형, 부대 내 장병 중 9명의 O형 병사가 병원으로 향했다. 백혈구 성분헌혈은 일반 헌혈보다 좀 더 까다롭다. 혈액 중에서 백혈구만 따로 추출해 내야 하기 때문에 먼저 적합도 검사를 받은 뒤 백혈구 촉진제를 맞는다. 그리고 다음 날 2시간여에 걸쳐 혈액을 뽑는다. 적어도 3일 정도는 여유를 내야 가능한 과정. 백혈구 헌혈이 환자의 지인들이나 가족에게 집중 부담이 지워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화순부대에서 자원한 9명의 장병 중 7명의 장병이 조건이 맞는 것으로 확인됐다. 이 중 분대장인 김태준 상병이 환아에게 백혈구 성분헌혈을 실시했고, 다행히 영아의 상태가 호전됐다.

    생명을 구하는 3일

    “전남대병원에서 채혈을 하고, 제가 적합도가 높아서 바로 촉진제를 맞으러 갔습니다. 병원에서 아기를 봤는데 너무 작고 어려서 애처로웠습니다.”(김태준 상병)

    장병들은 자진해서 성분헌혈에 동참했다. 지난해 헌혈에 참가한 인원은 166만 8000명. 우리나라 헌혈 인구 중 10~20대 젊은 층과 군인의 비율은 압도적이다. 헌혈이 주로 단체나 집단 위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만성 혈액보유 부족에 시달리는 우리나라의 경우 백혈구 성분헌혈은 더욱 참여가 미미하다. 환자와 가족들에겐 은인을 만난 셈인데 장병들의 반응은 도리어 담백하다.

    “특별히 대단한 생각을 한 건 아닙니다. 위험에 처한 아이가 있다고 해서 이런 거라도 도와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장민재 일병)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이고, 도울 수 있다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신청했습니다.”(임향섭 일병)

    “11개월 된 아기를 봤는데, 너무 애처롭고 작더라고요. 다음 일곱 살 아이에게 요청이 왔을 때는 꼭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김주완 일병)

    백혈병 환자의 경우 골수이식을 받으면 완치될 확률이 높다. 그때까지는 백혈구 수치를 정상적으로 유지하는 게 관건이다. 골수이식의 경우에는 수여자와 공여자를 비밀에 부친다. 이번 백혈구 헌혈이 남달랐던 것은, 자신들의 혈구가 어떻게 환자를 도왔는지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름도 알고 얼굴도 아는 아이이다 보니까 더 각별했죠.”(김태준 상병)

    “생명을 살리는 데 직접적인 도움을 주었다는 게 신선했습니다.”(김주완 일병)

    백혈구 촉진제를 맞으면 사람에 따라서는 손 떨림, 발열, 쑤심이나 통증 등의 증상이 나타날 수 있다. 하루 이틀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 물을 많이 마시면 증상은 가라앉는다.

    “살짝 손이 떨리는 느낌이 있었는데, 금방 괜찮아졌습니다.”(임향섭 일병)
    “헌혈하는 데 15분 정도 걸리는데, 이번엔 2시간 정도 걸렸습니다. 헌혈할 수 있는 건강한 몸을 주셨다는 것도 감사했습니다.”(장민재 일병)

    김주완, 임향섭, 장민재 일병의 백혈구는 7세 여아에게 전달됐다. 2주가 지난 8월 16일, 병원에서 또 한 번의 구조 요청이 왔다. 다행히 같은 혈액형이라 추가 검사가 필요 없었다.

    “부대에서는 거의 매년 전반기, 후반기로 나눠서 헌혈을 합니다. 성분헌혈의 경우 절차가 까다롭기 때문에 사단의 승인이 있어야 진행이 가능했는데, 사단에서도 적극적으로 협조해주셨고요. 15명이 지원해도 한 명도 안 나오는 경우가 있는데 이번 경우에는 9명이 가서 7명이 참여했죠.”(이운섭 의무대장)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장민재·임향섭·김주완·김태준. /김선아

    이운섭 의무대장은 일주일 후 또 다른 백혈병 환자였던 여고생을 위해 팔을 걷었다. 여고생의 경우에는 골육종 암과 백혈병을 앓는 데다 패혈증이 동반된 상태라 상태가 위독했다. 당시 A형인 장병들과 함께 병원을 찾았다. 하지만 환자의 상태가 호전되지 않아 헌혈이 지속되지 못했다.

    “제가 의무병과 장교로 복무하면서 느끼는 건 ‘세상에 우연히 던져진 존재는 없다’는 것입니다. 특히 환자들을 볼 때 그들의 눈에서 생명에 대한 간절함을 읽습니다. 그런 이들이 완치되고 나면 더욱 강한 생명의 에너지를 가질 수 있을 겁니다. 그들을 위해 기꺼이 도움의 손길을 내민 장병들이 귀한 이유이지요.”(이운섭 의무대장)

    이전보다 넓어진 나를 만나는 곳

    병사들 역시 이번 헌혈을 통해 세상을 보는 시각이 달라졌다고 했다.

    “저는 몸무게가 안 돼서 헌혈을 못 해보다가 이번에 처음 해봅니다. 군대에 와서 7kg이 쪘거든요. 헌혈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했습니다. 원래 말이 없고 조용한 성격이었는데, 군대 와서 많이 활발해졌습니다. 이대로 제대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김주완 일병)

    김태준 상병에게도 이번 일은 여러 모로 새로운 경험이었다. 제주도에서 나고 자란 김태준 상병은 군대에 온 뒤 더 넓은 세상을 보게 되었다고 했다.

    “저는 제주도에서만 살아서 제주도 친구들밖에 없었는데, 군에 와서 다양한 친구를 만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좀 더 시야가 넓어지는 것 같았고요. 전국구 인맥이 생겼고요. 비슷한 사람들과만 어울리다가 다양한 사람을 만나서 다양한 삶을 알게 되어 좋았습니다.”

    그 다양한 삶 중에는 병실에서 호흡기에 의존해 가느다란 생명줄을 붙잡고 있는 어린아이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이미 그 아이의 삶과 생명의 끈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인터뷰를 마치기 전 이들은 헌혈을 준비하는 이들을 위해 실제적인 조언을 남겼다. 백혈구 성분헌혈은 일반 헌혈에 비해 까다롭지만 그만큼 보람도 크다고 했다.

    “헌혈하기 전에는 기름진 음식을 먹지 말고, 음주를 해서도 안 됩니다. 약물 복용도 당연히 안 되고요. 웬만하면 무리한 운동도 안 하는 게 좋습니다.”(장병 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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