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 의열단 폭탄, 실제로도 터졌을까

    입력 : 2016.09.12 09:25

    [개봉 닷새 만에 200만 돌파, 영화 '밀정' 사실과 허구 가려보니]

    "영화의 방향은 선악의 구분처럼 이분법적인 역사관이 아니다. 붉지도 검지도 않은 색이다."

    영화 '밀정'에서 일제(日帝) 경찰 이정출 역을 맡은 배우 송강호는 시사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1923년 3월 의열단의 폭탄 반입 사건을 배경으로 삼은 '밀정'은 그의 말처럼 친일과 반일, 투쟁과 변절 사이의 복잡 미묘한 경계를 쉼 없이 넘나든다. 특히 영화는 후반부로 향할수록 대담한 상상력을 가미해서 역사와 허구가 뒤섞인다. 이 영화는 개봉 닷새 만에 관객 200만을 넘어서며 박스오피스 1위에 올라 있다. 어디까지 사실(史實)이고 어디서부터 상상일까. '한국 근대민족운동과 의열단'의 저자인 김영범 대구대 교수와 함께 영화와 실제 사건의 관계에 대한 궁금증을 정리했다.

    이미지 크게보기
    의열단의 폭탄 반입을 돕는 일제 경찰 이정출 역의 송강호. 영화 ‘밀정’은 1923년 의열단의 폭탄 반입 사건에서 착안했다. /워너브러더스코리아

    반입 사실 사전 발각, 폭탄 압수…
    '이정출' 모델 황옥은 실존 인물

    ①의열단이 반입한 폭탄은 터졌는가?

    X
    영화에서는 의열단이 반입한 폭탄이 우여곡절 끝에 고위 경찰들이 참석한 연회장에서 폭발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폭탄 반입 사실이 사전(事前) 발각되는 바람에 관련자 18명이 검거됐고 폭탄도 모두 압수됐다. 연회장 폭발 장면은 1920년 9월 의열단원 박재혁의 부산 경찰서장 폭살(爆殺) 사건이나 같은 해 12월 의열단원 최수봉의 밀양 경찰서 폭탄 투척 사건에서 힌트를 얻은 것으로 보인다.

    ②외국인도 의열단 폭탄 제조 참여했나?

    O
    1919년 임시정부 수립 직후부터 상하이에는 폭탄 제조 학습소가 비밀리에 설립됐다. 김원봉도 상하이에서 3개월간 합숙하면서 중국인 전문가에게 폭탄 제조와 조작법을 배웠다. 의열단은 거사 직전인 1922년에도 외국인 기술자를 초청해서 이전보다 성능과 위력이 뛰어난 폭탄을 제조했다. 헝가리·독일·러시아 등 외국인 기술자의 국적은 관련 자료마다 조금씩 다르다.

    ③폭탄은 중국 단둥(丹東)을 통해 국내 반입했나?

    O 상하이에서 제조한 폭탄은 여행 가방 등에 나눠 담아서 톈진(天津)을 거쳐 단둥(당시 지명 안둥·安東)으로 운반됐다. 당시 폭탄 반입을 위한 중간 거점이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원이었던 홍종우 조선일보 단둥 지국장의 집이었다. 인력거를 타고 국경을 통과한 뒤에도 조선일보 평북 지국원이었던 의열단원 백영무(1893~1971)의 신의주 집에 보관했다가 서울로 운반했다.

    ④송강호와 공유가 맡았던 역은 실존 모델이 있나?

    O 송강호가 연기한 이정출은 당시 이 사건에 비밀리에 가담했다는 소문이 나돌았던 황옥(黃鈺·1887~납북) 조선총독부 경기도경찰부 고등과 경부(警部)가 모델이다. 이 때문에 이 사건은 일명 '황옥 경부 사건'으로도 불린다. 황옥은 의열단원 김시현(1883~1966) 등과 함께 중국에서 서울로 폭탄을 반입했다. 김시현 선생은 영화에서 배우 공유가 맡았던 김우진의 실존 모델이다.

    이미지 크게보기
    의열단 폭탄 반입 사건 1차 공판을 보도한 1923년 8월 8일자 조선일보.

    ⑤황옥 경부는 독립운동가였나, 일제의 끄나풀이었나?

    모름
      황옥 경부는 조선총독부 경무국의 의열단 파괴 공작에 이용당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학계의 대체적인 견해다. 황옥은 검거 이후 재판 과정에서 "경찰 관리로서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노력했고 대대적인 성공을 거두면 경시(警視)로 승진도 시켜주리라고 믿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황옥이 석방 이후 일본 경찰로 활동한 기록이 없고, 친동생 황직연(1890~1943)도 사회주의 운동에 헌신하다가 대전형무소에서 숨진 이력으로 볼 때 '독립운동가 집안'이라는 반론도 있다. 1983년 서울대에서 민주화 시위 도중, 도서관 6층에서 추락해서 숨진 황정하(1960~1983)씨가 황옥 경부의 친손자다.

    ⑥독립운동가들과 일제 경찰의 첩보전은 그만큼 치열했나?

    O 1923~1924년 조선총독부 경무국의 첩보 보고를 보면, 의열단원 숫자를 200명 안팎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만큼 의열단 규모와 활동에 신경을 곤두세웠다는 의미다. 의열단 역시 밀정으로 의심받는 인사들을 암살하는 등 정보 유출을 막기 위해 단속에 나섰다. 1928년 임시정부 초대 외무총장을 지낸 박용만(1881~1928)을 총살해 독립운동 진영 내부에서 논란을 빚은 게 대표적이다.

    ⑦독립운동가 김시현 선생은 감옥에서 나오지 못했나?

    X 김시현은 1929년 석방된 뒤 다시 중국으로 건너가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1944년 베이징에서 재검거되어 서울로 압송 구금되어 있던 중에 광복을 맞았다. 광복 이후에는 민주국민당 소속으로 2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서 당선됐다. 1952년 '부산 정치 파동'이 일어나자 김시현은 이승만 대통령 암살 미수 사건을 일으킨 혐의로 복역하다가 1960년 4·19혁명 이후 석방됐다.

    ☞황옥 경부 사건

    의열단이 1923년 3월 조선총독부와 동양척식회사, 경찰서 등을 공격 목표로 삼고, 고성능 폭탄 36개를 중국에서 서울까지 반입한 사건이다. 거사 직전 폭탄 반입 사실과 은닉처가 발각되는 바람에 독립운동가 김시현과 경기도경찰부 소속의 황옥 경부를 포함해 18명이 모두 검거됐다.


    일왕 생일날에 일장기를 처박고 보통학교를 자퇴한 13세 소년
    [남정욱의 영화 & 역사] 영화 '인천상륙작전'은 너무 늦게 만들어졌다
  • Copyright ⓒ 조선일보 & Chosun.com
  • 이전 기사 다음 기사
    기사 목록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