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환의 시간여행] [35] 히트작 상영관마다 암표상 100여명… '빠삐용' 암표 팔아 집 한 채 사기도

    입력 : 2016.09.07 07:35

    1957년 말 신문에 '올해 새로 생긴 직업' 한 가지가 소개됐다. '인기 영화를 상영 중인 극장 앞에 모자를 푹 눌러쓰고 나타난 소년들'이 그 주인공이었다. 이들은 티켓이 매진돼 난감해하는 관객들에게 다가와 "좋은 자리 있어요"라고 속삭이며 500환짜리 표를 800환에 사라고 내밀었다. 극장 암표상의 등장이었다. 소년들의 하루 수입은 무려 1만환(오늘의 물가로 약 13만원)씩이나 됐다(경향신문 1957년 12월 28일자). 1960~1970년대가 되자 암표상은 중년 여성들로 교체됐다. 이렇다 할 오락거리가 없던 때여서 영화관은 주말마다 미어터졌고, 암표상도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났다. 예매 시스템도 없이 현장에서만 표를 팔던 때여서, 주말에 인기 있는 영화는 암표를 사지 않고는 보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국도, 대한, 명보극장 등 '일류 극장'마다 암표상은 80~100명씩 진을 쳤다. "극장 앞은 법외(法外) 지대냐"는 시민 원성이 튀어나왔다.
    ‘암표 사지 말자’는 문구를 대문짝만 하게 넣은 1974년의 영화 ‘빠삐용’ 광고(위·조선일보 1974년 9월 29일 자)와 극장 암표상이라는 ‘신직업’의 탄생을 알린 1957년 신문 삽화.

    1978년 조선일보 취재 결과 서울 개봉관 히트작의 표는 40~70%까지 암표상들 손에 넘어간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1300원짜리 영화표 한 장을 4000원(오늘의 약 2만3000원)까지 올려 받는 것도 예사였다. 암표상 한 명이 하루 10만원(오늘의 약 57만원)의 수입을 거뜬히 올렸다. 10년 동안 수억대의 돈을 번 암표상이 10여명쯤 됐다(조선일보 1978년 11월 5일자). 특히 1974년 추석 대목에 개봉된 '빠삐용'이 명동의 한 영화관에서 87일간이나 상영될 정도로 대히트를 하자 암표도 덩달아 대히트를 했다. '빠삐용' 암표 하나만 팔아 집 한 채를 산 어느 암표상의 사례는 충무로의 전설이 됐다. 암표상들의 주말은 흐뭇한 하루였는지 몰라도, 모처럼 기분 전환하러 나온 시민에게는 기분 잡치는 하루가 됐다. 1978년 '영화표 사기에 지친' 중년 남자는 아예 영화 구경을 포기하고는 "택시 타기도 어렵고 표 사기도 어렵고, 어디를 가나 이 모양이니 이젠 밖에 나오는 것도 진절머리가 난다"고 고개를 저었다.

    당국은 60년간 끊임없이 암표상 소탕을 외쳤다. 1967년 경찰은 암표상을 '비시민적 제악(諸惡)' 중 가장 질이 나쁜 행위로 규정하고 대대적으로 단속했다. 이듬해인 1968년 말엔 '불도저 시장'이라 불린 김현옥 서울시장이 90여개 극장 대표들을 모조리 집합시켜 놓고 '암표가 또 나돌면 극장에 행정 조치를 취하겠다'고 경고했다. 그 덕택인지, 그해 연말 극장가에서 해방 후 처음으로 암표상이 사라졌다. 그러나 그 효과는 일 년도 못 갔다.

    검찰도 경찰도 뿌리 뽑지 못한 극장 암표상을 몰아낸 건 온라인 예매 시스템이다. 1990년대 말 등장한 멀티플렉스 영화관이 온라인 예매를 도입하면서 암표상들이 설칠 공간은 사라졌다. '암표'라는 바이러스 자체가 사라진 건 아니다. 암표상은 아이돌 그룹 공연장이나 프로야구장 등으로 활동 공간을 옮겼다. 최근 폐막한 리우올림픽에서도 아일랜드 IOC 위원이 암표를 팔다가 적발돼 국제적 망신까지 당했다. 미국의 월터 블록 박사 등 시장경제 신봉자들은 암표 거래야말로 수요공급의 법칙을 보여주는 교과서적 사례라며 제한적 옹호론을 펴기도 했다. 그러나 티켓을 빼돌려 암표로 판 행위 때문에 차례대로 줄을 선 사람의 권리가 침해됐으니, 암표 판매란 소탕해야 할 부당한 상거래인 것만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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