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처럼 자란 덕혜옹주… 이우는 히로시마 原爆에 희생돼

    입력 : 2016.08.19 06:51

    [영화 '덕혜옹주'와 다른 조선왕조 마지막 후예들의 실제 삶]

    영화 '덕혜옹주' 관객 수가 420만 명(17일 기준)을 넘었다. 흥행엔 성공했지만 "실제로는 아무런 힘도, 민족의식도 없었던 대한제국 황실을 지나치게 미화한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영친왕과 덕혜옹주가 임시정부가 있는 중국 상하이로 망명을 시도한다거나, 덕혜옹주가 일본의 조선 어린이들을 위해 한글학교를 세우고 일본에 강제 징용된 조선 노동자들 앞에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온다"고 연설하는 장면은 모두 허구다. 조선왕조 마지막 후예들의 실제 삶은 어땠을까.
    일본 아이처럼 자란 덕혜옹주
    고종의 자녀 중 어른으로 성장한 이는 순종, 영친왕, 의친왕, 덕혜옹주 등 3남1녀뿐이었다. 특히 덕혜옹주는 고종이 환갑이 되던 해에 얻은 고명딸로 고종의 지극한 사랑을 받았다. 영화에선 덕혜옹주가 기모노 입기를 거부했다고 나오지만 사실 어린 그녀는 일본에 반감이 없었다. 만 네 살 때부터 덕수궁에 설립한 유치원에서 일본인 교사에게서 배웠고, 일본인 가정교사가 있었으며, 소학교 2학년부터는 일본인 귀족 자제들이 다니는 일출소학교(日出小學校)로 편입했다.
    상궁 김명길이 쓴 책 '낙선재 주변'에 이런 기록이 있다. "덕혜옹주는 '게다'를 신고 '하오리(일본 의상)'를 걸치고 통학하셨다. 집에 돌아오셔선 학교에서 배운 노래라며 '호타루 찬가' 등을 부르시곤 했는데 그 모습이 일본 아이들과 똑같아 섬뜩했던 기억이 난다." 고종시대 연구자인 장영숙 상명대 교수는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독립적이거나 주체적 자각이 발달할 수 없었던 상태였을 것"이라고 했다.
    1931년 덕혜옹주와 쓰시마 백작 소 다케유키의 결혼식 사진. /푸른역사

    덕혜옹주 국내서도 日학교 다녀
    "생모는 日유학 반겼다" 기록도

    의친왕 장남 이건은 일본 귀화
    이우, '조선인'이란 의식 강해

    일제강점기 대한제국 황손들은 정책적으로 일본 유학이 추진됐다. 덕혜옹주도 1925년 3월 일본으로 강제 유학을 떠났다. 옹주의 일본 유학이 결정되자 생모인 양귀인이 반겼다는 기록도 있다. 
    '마지막 황태자(푸른역사)' 시리즈를 쓴 송우혜씨는 "옹주는 일본에서 오빠인 영친왕 이은의 집에서 같이 살기로 돼 있었기 때문에 다음 왕위에 오를 분과 가깝게 지내는 것을 의미했다. 양귀인으로서는 일본 유학이 덕혜옹주의 생애에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하고 기뻐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덕혜옹주의 정신병은 결혼 이전에 발병했다. 18세 때인 1930년 '조발성 치매증' 진단을 받는다. 덕혜옹주는 1931년 쓰시마 백작 소 다케유키(宗武志)와 결혼했다. 신명호 부경대 사학과 교수는 "말을 잃고 정신 이상이 됐다는 건 현실을 부정하는 것 아니겠나.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하지는 못했지만 일본에 적응할 수도 없는 소극적 저항으로 봐야 한다"고 했다.
    의친왕 아들 이우는 히로시마 원폭에 희생
    영화에는 덕혜옹주뿐 아니라 영친왕, 의친왕의 두 아들인 이건과 이우가 등장한다. 영친왕 이은(1897~1970)은 1907년 황태자에 책봉됐으나 바로 일본에 끌려간다. 철저한 일본식 교육을 받았으며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거쳐 육군 중장까지 지냈다. 그는 상하이 망명을 시도한 사실이 없다. 영화에 등장하는 영친왕 망명 작전은 그의 이복형인 의친왕 이강(1877~1955)의 망명 기도 사건을 각색한 것으로 보인다. 1919년 11월 의친왕은 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로 탈출하려고 압록강 건너 안동까지 갔다가 일본 경찰에게 잡혔다.
    1935년 5월 의친왕 차남 이우와 박영효 손녀 박찬주의 혼인식 사진. /푸른역사
    의친왕 장남인 이건(1909~1991)은 일제가 의도한 대로 살았던 인물이다. 영화에서도 그가 "임시정부에 가봐야 여기만큼 우리를 대우해주지 않는다"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일본에 유학해 일본 육군 장교가 되는 정통 엘리트 코스를 밟았고, 일본인으로 귀화해 일본에서 삶을 마감했다.
    영화에서 고수가 열연한 이우(1912~1945)는 의친왕 차남으로 일찍이 '얼짱 왕자'로 알려졌다. 황실 후예 중 드물게 민족의식이 강하고 일본의 조종에 따르지 않으려 했던 사람이다. 그의 일본인 동기생은 훗날 히로시마 지역 TV 프로그램에 나와 "(이우는) 무슨 일에서든 일본인을 앞서려고 노력했고 조선인이라는 의식이 강했다. 화가 나면 조선말을 써서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었다"고 증언한 바 있다. 이우는 일본 황족과의 결혼을 거부하고 박영효(1861~1939)의 손녀인 박찬주와 결혼했다.
    영화에선 이우가 독립운동을 주도한 것으로 나오지만 이를 증명할 수 있는 자료는 없다. 송우혜씨는 "이우가 정신적으로 민족의식을 갖고 있었던 건 맞지만 구체적으로 '행동한 건' 없다"고 했다. 김문식 단국대 사학과 교수는 "대한제국의 왕실 가족들은 일본 왕실을 관리하는 궁내부에서 철저하게 직접 관리하는 존재들이었기 때문에 행동반경이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이우 역시 육군사관학교를 거쳐 육군대학을 졸업했다. 그는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서 원자폭탄에 희생됐다. 사망 당시 국적이 일본인이었다는 이유로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됐다는 사실이 2007년 알려져 논란이 됐다.
    "덕혜옹주는 천재 시인"… 영혼의 기록 찾아 나선 일본인
    부산서 불과 2시간, 광복후 이승만이 그토록 되찾으려 했던 이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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