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여덟 살에 경험한 3일간의 전쟁이 내 인생을 바꿨다."

    입력 : 2016.07.29 07:39

    [주간조선: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참전한 해럴드 엘런스 목사]
     

    66년 만의 귀환이었다. 노병(老兵)은 인천상륙작전 기념관의 인천 앞바다 모형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공중에서 엄호하는 전투기와 바다 위에 늘어선 함선, 해안에 정박한 상륙정까지 인천상륙작전을 실제와 흡사하게 재현해놓은 디오라마(diorama)였다. 노병이 보고 있는 건 자신의 인생을 바꾼 사흘이었다.

    지난 7월 8일 연세대 교정에 있는 상남관에서 만난 해럴드 엘런스씨는 약간 흥분한 듯 보였다. 전날 인천상륙작전 기념관을 돌아본 여운이 아직 가시지 않은 듯했다. 인사를 하며 내민 손 위로 녹색 에메랄드가 박힌 반지가 보였다. 왼손엔 빨간색 보석이 박힌 반지가 있다. “녹색 반지는 박사가 되었을 때, 루비 반지는 군대에서 각각 받았지요.” 엘런스씨는 7월 3일부터 6일까지 연세대에서 열린 2016 국제성서학회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을 찾았다. 양손의 반지는 그의 다채로운 이력을 잘 보여준다. 신학자이자 개신교 목사인 그는 대령으로 예편한 퇴역군인이다. 그의 첫 전장(戰場)이 바로 한국이었다.

    “1950년 7월 16일, 제 열여덟 번째 생일날이었습니다. 징집 통지서가 날아왔어요. 그때 저는 대학교 2학년에 재학하고 있었습니다. 일찌감치 성직자가 되겠다고 마음을 정했던 참이었지요. 통지서를 받아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 저에게 왜 이러시는 겁니까.’”

    6주간의 훈련을 마치고 배치된 곳은 미 해병1사단. 보직은 M2중기관총 사수였다. 엘런스씨가 한순간 원망하며 찾았던 하나님, 혹은 운명은 그를 한국전에서 가장 결정적인 전장으로 데려다놨다. 1950년 9월 15일의 인천이었다.

    지휘함에서 상륙 상황을 지켜보는 맥아더 장군(가운데)과 알몬드 장군(오른쪽). /주간조선

    북한군은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38선 일대에서 일제히 남침 공격을 감행했다. 북한군은 나흘 만에 수도 서울을 함락한 뒤에 파죽지세로 낙동강 전선까지 밀고 내려왔다. 탱크 하나 없던 국군은 속수무책으로 밀려 내려갔다. 낙동강 방어선이 무너지면 대한민국은 북한 공산군의 수중에 떨어지는 순간! 수세에 몰린 연합군이 택한 타개책이 바로 크로마이트 작전(Operation Chromite), 즉 인천상륙작전이었다.

    인천은 상륙지점으로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가장 큰 문제는 조수간만의 차였다. 밀물과 썰물 때 조수의 차가 최고 9m, 최소 7m가량이었다. 바닷물이 빠지면 수백m의 갯벌이 드러났다. 이 말은 선봉으로 상륙한 병력이 다음 물때까지 최소 9시간 이상 추가 지원 없이 버텨야 한다는 걸 의미한다. 발을 옮기기도 힘든 갯벌에 병사들을 내려놓을 수는 없으니 말이다. 잘못하면 병력이 차례로 괴멸될 수도 있는 위험한 작전이었다.

    또 다른 문제는 방파제였다. 안전하게 육지에 오른다 해도 견고한 방파제를 넘어야 했다. 나무 사다리를 걸쳐놓고 오르는 동안 적군에게 무차별 공격을 받을 가능성이 다분했다. 그럼에도 연합군사령관 맥아더는 인천을 고집했다. 성공만 하면 적군의 병참로를 단번에 끊을 수 있는 교두보가 확보되기 때문이었다. ‘성공 확률은 5000분의 1도 안 된다’는 해군 내의 격심한 반대 속에 작전이 수립됐다.

    미 제7사단이 인천항에 상륙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장면. /국가기록원 제공

    디데이(D-day)인 9월 15일, 미 10군단이 조용히 서해를 거슬러 올라갔다. 연합군 7만5000여병력의 어깨에 한반도의 명운이 짊어져 있었다. 10군단 예하에는 미 해병 1사단과 미군 7사단이 소속되어 있었다. 해병 1사단은 제1해병연대와 제5해병연대로 이뤄져 있었다. 간척사업의 결과 지금은 해안선이 거의 일직선 형태지만 당시 인천은 반도 모양이었다. 가장 바깥쪽에 위치한 월미도는 가느다란 다리로 육지와 연결되어 있었다. 인천에 상륙하려면 반드시 월미도 해안을 거쳐야 했다. 제5해병연대가 월미도 상륙을 맡았다. 5연대가 1연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전투 경험이 많았기 때문이다.

    새벽 5시 월미도 해안에 로켓이 퍼부어졌다. 상륙 예정 시각은 6시30분. 전투기의 공중 엄호를 받으며 5연대 3대대가 해안으로 향했다. 도착한 시각은 6시33분. 연합군이 거짓 정보를 흘린 탓이었는지, 북한은 인천에 추가 병력을 보내지 않았다. 5연대 3대대는 북한군의 저항을 뚫고 월미도를 점령했다. 지휘함으로 공식 보고가 들어간 시각은 8시. “오늘만큼 해병대가 자랑스러운 적이 없었다.” 맥아더 장군의 일성이었다. 이제 관건은 다음 물때까지 월미도와 육지 사이를 가로막는 것이었다. 인천 시가지 쪽에서 월미도로 추가 병력이 오는 걸 막기 위해서였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파도의 방향이 육지를 가리켰다. 17시30분, 나머지 병력이 상륙주정에 옮겨 탔다.

    엘런스씨는 1해병연대 소속이었다. 해변에 무사히 닿은 다음엔 상륙 거점(beach head)을 확보하기 위해 움직였다. 그는 5명의 기관총 사수로 이뤄진 분대의 분대장이었다.

    “그때 저는 열여덟 살이었습니다. 해안을 향해 다가가는 배 안에 앉아 과연 오늘 밤이 올 때까지 내가 살아 있을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을 느꼈지요.”

    해럴드 엘런스 목사. /염동우 영상미디어 기자

    ‘소년들의 전쟁’

    인천상륙작전 기념관 야외에는 방파제를 오르는 병사들을 재현한 조형물이 있다. 엘런스씨는 조형물을 보고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고 했다.

    “슬픔이 되살아났습니다. 그날 어린 군인들은 너머에 뭐가 있을지도 모르고 공포와 싸우며 나무 사다리를 올랐어요. 앞으로 갈 수도 없는데 뒤로 갈 수도 없었어요. 전쟁의 본질을 그대로 보여주는 조형물입니다.”

    같은 시각, 상륙부대를 엄호하기 위해 인천항 내항까지 들어간 구축함에 적의 포탄이 쏟아졌다. 사망자가 나오기 시작했다. 연합군은 디데이 3일 전부터 인천 해안을 포격했다. 참호 깊숙이 숨어 있는 적군과 엄폐된 해안포까지 없앨 순 없었다.

    엘런스씨가 번뇌와 싸우며 인천으로 향했던 그날, 경상북도 영덕군에서도 또 하나의 상륙작전이 펼쳐졌다. ‘장사상륙작전’이다. 한국 학도병으로 구성된 772명이 9월 15일 부산을 떠나 영덕군 장사리로 향했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을 위한 일종의 교란작전이었다. 당시 영덕군은 북한군 점령지였다. 장사상륙작전에서 학도병 200여명이 죽거나 다쳤고 나머지는 행방불명됐다.

    여든넷의 노병은 잠시 열여덟 살의 소년으로 돌아간 듯했다.

    “국가가 아이들을 제물로 바친 겁니다. 그들은 열여덟, 열아홉 살짜리를 그저 전장으로 내몰았을 뿐입니다. 만약 마흔 살 이상의 군인만 전쟁에 참전하게 했다면 전쟁이 일어났을 것 같습니까.”

    연합군은 북한군 인천경비여단과 18사단, 31사단을 격파하고 인천을 되찾았다. 미군의 피해는 예상보다 작았다. 9월 15일 당일 전사한 병력은 21명, 1명이 실종되고 174명이 부상당했다. 대승이었다. 크로마이트 작전이 한국전쟁사 아니, 세계전쟁사에 길이 남을 주요 상륙작전으로 기록되는 순간이었다. 한국전쟁 전체 전세가 순식간에 역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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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륙작전이 성공한 다음 날인 9월 16일 대형 상륙함 4대에서 물자가 하역되고 있다. /주간조선

    군목이 되어 다시 전장으로

    다음 날 한강진격작전이 시작됐다.

    1해병연대와 5해병연대는 각각 경인국도의 북쪽과 남쪽으로 갈라져 서울로 진격했다. 한강변을 따라가던 엘런스씨의 분대는 강 너머의 북한군을 발견했다. 사격을 퍼붓자 위치를 파악한 북한군이 응사를 했다. 분대원 3명이 그 자리에서 숨졌다. 2명은 중상을 입었다. 엘런스씨는 물론 중상을 입은 쪽이었다.

    왼쪽 넓적다리 안쪽의 동맥이 끊어졌다. 멈추지 않고 콸콸 흘러나오는 핏줄기를 보며 엘런스씨는 마음속으로 절규했다. ‘하나님 당신이 어떻게 저에게 이러실 수 있습니까?’ 죽음이 실체를 갖고 다가오고 있었다. 이때 의무병이 그를 찾아냈다. 즉시 병원선으로 옮겨졌다. 배 안에서 받은 수술은 다행히 성공적이었다. 9월 18일 그는 한국을 떠났다. 일본의 미군기지를 거쳐 고국으로 돌아갔다. 미국의 퇴역군인 병원에서 한 달간 치료받은 뒤 전역 명령을 받았다.

    영흥도에 있는 해군전적비. /박종인 기자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한국에서 제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 말입니다. 전쟁에 대해 떠드는 사람은 그곳에 있어본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정말로 그곳에 있었던 사람은 전쟁에 대해 얘기하지 않습니다. 전쟁에는 인간성 혹은 생명 같은 건 없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내가 그곳에서 어떤 생각을 했는지 얘기하려 해도 제대로 전달할 방법이 없습니다. 말을 꺼내는 순간 전쟁터에서 느낀 고독이 되살아날 뿐입니다.”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목사가 된 그는 고독 속으로 되돌아가기로 했다. 군목(軍牧)의 길을 택한 것. 1953년의 일이다. “두 가지 이유에서였습니다. 하나는 외롭게 고통받는 병사들에게 성직자가 얼마나 필요한 존재인지 알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가정환경이었습니다. 제 형제들이 전쟁터에 있었습니다. 제가 한국전에 참전했을 때 제 남동생은 독일에서 정보요원으로 복무하고 있었어요. 제 형제들과 그 아들들이 복무한 기간을 합치니 170년이 되더군요. 제 결심을 더욱 공고하게 한 건 베트남전입니다. 1955년 베트남에서 전쟁이 시작되고, 1964년부터 50만명의 젊은이들이 미국을 떠나 전쟁에 투입됐습니다.”

    일반에게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한국전쟁에도 성직자들이 참전해 죽음에 맞선 병사들의 영혼을 지켰다. 제1기병사단 소속이었던 에밀 카폰 신부가 그 예다. 중공군에 포위되자 퇴각 명령을 뒤로하고 부상병의 곁을 지켰던 그는 1951년 서른다섯의 나이에 벽동 포로수용소에서 병사했다. 약을 훔쳐 다른 포로들을 살리고, 죽기 직전까지도 동료 군인들의 고해성사를 들은 그의 행적은 뒤늦게 알려졌다. 2013년 오바마 미 대통령은 카폰 신부에게 명예훈장(Medal of Honor)을 추서했다. 미국 군인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무공훈장이다.

    인천 월미도 앞 바다에서 율곡이이함 장병들이 전몰장병과 호국 영령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해상 헌화를 하고 있다. /해군 제공

    10년간 육군 군목으로 복무한 엘런스는 베트남, 파나마, 베이루트 등 미군이 가는 곳에 함께했다. 대령으로 예편한 후에는 예비역으로 군이 부를 때마다 달려갔다. 군목을 교육하는 일도 그의 몫이었다. 덕분에 한국도 서너 번 방문했다. 주한미군에 소속된 100여명의 군목을 교육하기 위해서였다.

    군목에게 필요한 자질이 무엇인지 물었다. “군대는 ‘독재가 허용되는’ 조직입니다. 군목은 명령의 위계 사이를 잘 넘나들며 각각의 군인에게 다가가야 합니다.”

    신을 섬긴다는 성직자가 전쟁을 인정할 수 있는 걸까. 단호한 답이 돌아왔다. “전쟁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러나 전쟁이 일어났을 때 하나님은 그 자리를 피하지 않았습니다. 전장으로 들어와 인간들을 구원하려 했습니다. 많은 시간이 흐른 후에야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은 말똥(더러운 것)을 이용해 꽃을 피우신다는 걸 말입니다.”

    ‘한국전쟁에도 그 얘기가 적용되는가’ 묻자 엘런스씨는 미소를 지었다. “오늘의 대한민국을 보세요. 잿더미에서 꽃을 피워내지 않았습니까. 절대적인 비극은 없습니다.”

    인터뷰 자리에는 엘런스씨의 지인인 이성일 연세대 영문과 명예교수가 동석해 있었다. 이 교수는 “(엘런스씨가) 다리가 불편하셔서 인천 자유공원의 맥아더 장군 동상을 못 보여드려 아쉽다”고 말했다.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4년부터 좌편향 세력들이 맥아더 동상을 철거하자는 주장을 계속해오고 있다. ‘우리민족연방제통일추진회의’(연방통추) 등의 단체다. 이들은 맥아더 장군을 가리켜 ‘점령군 두목’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 급기야 2006년엔 동상을 훼손하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이태식 전 주미대사는 “당시 헨리 하이드 미 하원 외교위원장이 노무현 당시 대통령에게 ‘맥아더 장군 동상을 훼손하느니 미국으로 돌려달라’고 편지를 썼다”고 지난해 열린 자신의 출판기념회에서 말했다.

    엘런스씨는 66년 전의 사흘을 마치 얼마 전에 겪은 것처럼 또렷이 묘사했다. 나무 사다리에 매달려 방파제벽을 오르는 소년들의 뒷모습을 그는 얼마나 자주 떠올린 걸까. 1950년 9월 15일 여명을 뚫고 해안에 상륙한 젊은이들이 없었다면, 2016년의 우리에겐 ‘장군님’을 비난할 자유도, 역사를 되돌아볼 권리도 없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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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인천상륙작전' 포스터. /주간조선

    한국전쟁을 다룬 영화들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함께 세계전쟁사의 주요 장면으로 꼽히는 ‘인천상륙작전’, 인해전술의 대명사로 기록된 ‘중공군 참전’ 등 드라마틱한 요소가 많아서인지 한국전쟁은 미국과 한국에서 꾸준히 영화화됐다. 휴전 얼마 후인 1955년엔 ‘원한의 도곡리 다리’가 제작됐다. 영화 ‘매쉬’(1970), 그레고리 펙이 맥아더 역을 맡아 그의 삶을 영화화한 ‘맥아더’(1977)도 있었다. 통일교에서 4000만달러 이상을 들여 인천상륙작전을 소재로 해 제작했지만 흥행엔 실패한 영화 ‘오 인천’(1981)에선 로렌스 올리비에가 맥아더 장군 역을 맡았다. 한국에서는 ‘태극기 휘날리며’(2003), ‘고지전’(2011) 등이 제작됐다.

    이번엔 ‘인천상륙작전’이다. 오는 7월 27일 동명의 제목으로 개봉한다. ‘내 머리 속의 지우개’(2004), ‘포화 속으로’(2010)의 이재한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 영화 ‘인천상륙작전’은 전투 장면 중심의 전쟁영화보다는 첩보영화에 가깝다. 인천상륙을 돕기 위해 비밀리에 대북 첩보작전을 펼친 이들을 중심으로 스토리가 전개된다. 북한군으로 위장해 인천 사령부로 잠입한 해군 첩보대위 ‘장학수’(이정재)와 그의 정체에 대한 의심과 경계를 늦추지 않는 북한군의 인천 방위사령관 ‘림계진’(이범수) 사이의 긴장이 주요 줄거리다. 맥아더 장군 역할은 배우 리암 니슨이 맡았다. 7월 13일 서울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그는 “맥아더 장군 역을 제안받고 이 전쟁이 얼마나 중요한지 흥미를 느꼈다”고 말했다. “맥아더를 연기하기 위해 조사를 많이 했다”며 “‘미국에서 가장 위험한 인물’이란 책을 읽고 맥아더 장군이 얼마큼 논란이 많은 인물인지 알 수 있었다. 이런 전설적인 인물을 연기하게 돼 영광”이라고도 했다. 영화 ‘인천상륙작전’은 8월 초 미국에서도 개봉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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