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표 세상 교육 ‘대듀케이션’

일에 통째로 삶을 헌납하는 걸 당연시하던 한국 아빠들이 변하고 있다.
남의 눈을 의식해 뒷전으로 했던 아이 얘기를 당당히 꺼낸다.
자신만의 아빠표 세상 교육, ‘대듀케이션(DADucation)’을 하는 아빠도 늘고 있다.

    입력 : 2016.07.19 19:38

    ‘체험 놀이’ 직접 만들어 행복한 삶 가르치는 요즘 아빠들
     

    “아빠, 다음 주 스케줄 어떻게 돼요?”

    마누라 잔소리가 아니다. 열한 살 환희(서울 정목초 5학년)가 아빠 퇴근 시간에 맞춰 일주일 공부 계획을 짜려고 일요일 저녁마다 아빠 이상호(44·대기업 차장)씨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데이트룩을 맞춰입고 광화문 사거리 횡단보도에 나란히 선 이상호(44·오른쪽)·이환희(11) 부자가 서로를 응시하며 밝게 미소짓고 있다. “학교에선 ‘지식’을 배우고, 가정에선 ‘세상’을 배운다”는 이상호씨. 책상머리 교육에 맞선 우리 아이 ‘세상살이 교육’, 그 중심에 아빠가 있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대한민국에서 사회생활하는 직장인이 저녁 약속을 아예 안 잡는 건 불가능하죠. 일주일 최대 두 번만 잡고 다른 날은 ‘칼퇴’해 숙제 봐주기로 아이와 약속했어요. 5년째 하고 있답니다.” 저 멀리 ‘스칸디 대디’(자녀와 시간 많이 보내는 북유럽 아빠)만 있는 게 아니다. 우리 사정에 맞춘 ‘서울 아빠표 교육’이 여기 있다.

    “선행학습? 그런 건 없어요. 학교에서 배우는 걸 재미있게 공부하자→재미있으려면 잘 해야 한다→잘 하려면 노력해야 한다→노력하면 재미있어진다. 공부해야 하는 이유를 논리적으로 설명해 줘요.”

    부자(父子)에겐 3년째 하는 둘만의 ‘미션 놀이’도 있다. ‘만원의 행복’. 놀러 갈 목적지를 정하고 환희에게 용돈 1만원을 준다. 환희는 이 돈으로 스스로 지하철로 목적지를 찾아가고 점심을 해결해야 한다. 아빠의 미션은 간섭하지 않기. 한걸음 뒤에서 묵묵히 지켜본다. 교과서에 나오는 지역을 둘러보는 ‘꽃보다 가족’, 새로 뜨는 명소에 가보는 ‘핫트렌드 체험’ 프로그램도 있다. 아빠는 일기 쓰듯 블로그(sanjolee.com)에 아이와의 체험을 소복하게 모아뒀다.

    “혹시, 싱글대디?” 이쯤 되면 묻는 이 여럿일 테다. 아니다, 아내 정민경(40·수입문구온라인몰 운영)씨는 환희의 경제 교육 담당이다. 환희에게 ‘급여통장’을 만들어 주고, 가끔 엄마 회사에 와서 일을 도우면 시간당 300원을 입금해준다. “돈이란 게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게 아니구나 배우는 것 같아요. 직업 체험 테마파크 안 부럽죠?(웃음)”

    강원 강릉시 경포해수욕장에서 아빠와 아들이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다. /김경목 기자

    교육학 전공자도 아닌 직장 생활 18년차 평범한 샐러리맨 상호씨. 유머 감각 빼어난 그는 싱글 적 회사 술자리엔 늘 불려나가는 분위기 메이커였다. ‘모범 아빠’로 180도 바뀐 이유가 궁금해졌다.

    “우리 자랄 땐 좋은 대학(그는 명문 사립대 출신이다)이 행복을 보장해준다고 믿었죠. 이젠 명문대 나와도 취직은 어렵고, ‘좋은 직장’ 개념도 달라졌어요. 책상머리 교육보다 세상살이 교육이 아이에게 필요하다 싶었어요. 세월호 사건을 보며 아이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얼마나 중요한지 생각도 하게 됐고요.”

    칼릴 지브란이 말했던가. ‘어른은 활, 아이는 화살’이라고. 그 사이 온갖 사교육 동원해 활 시위 끊어질 듯 팽팽하게 당겨온 ‘엄마표 교육’에 아빠들이 반기를 든 걸까. 아이라는 화살이 거친 세상 뚫고 갈 수 있도록 든든히 받쳐주는 아빠표 세상 교육, ‘대듀케이션(DADucation·dad(아빠)와 education(교육)을 합친 말)’이 서서히 기지개 켜고 있다.

    소파 귀신 아빠가
    아들 귀신 됐어요


    아이와 함께 책·영화 보고 운동하고… 사회성 길러줘
    “주말 새벽 골프 연습장 나가면 애 깨기 전에 돌아와요”

    ‘대듀케이션’ 실천하는 아빠들

    지난 3월 시카고 화이트삭스 베테랑 타자 애덤 라로쉬(LaRoche·37)의 은퇴 소식으로 미국이 들썩였다.

    시카고 화이트삭스 타자 애덤 라로쉬와 그의 아들 드레이크. /Getty Images

    연봉 155억원을 포기하고 그가 돌연 야구를 관둔 이유는 구단이 아들 드레이크(14)의 라커룸 출입을 제한했기 때문이다.

    라로쉬는 트위터로 팬들에게 고별인사를 하면서 “#Familyfirst(패밀리 퍼스트·가족이 최우선)”란 의미심장한 해시태그를 달았다.‘일’보다 ‘아이’가 우선. 이젠 물 건너 얘기만이 아니다. 일에 통째로 삶을 헌납하는 걸 당연시하던 한국 아빠들이 변하고 있다. 남의 눈 의식해 뒷전으로 했던 아이 얘기를 당당히 꺼낸다. 자신만의 아빠표 세상 교육, ‘대듀케이션(DADucation)’을 하는 아빠도 늘고 있다.

    아빠 열명 중 일곱, 교육 관심 많다

    ‘더 테이블’이 지난 11일부터 5일간 자녀를 둔 30~50대 남성 100명을 설문한 결과 “자녀교육에 관심이 있느냐”는 질문에 ‘매우 관심 있다’가 29%(29명), ‘관심 있는 편이다’가 41%(41명)이었다. ‘관심 없는 편이다’는 6%(6명)에 그쳤고, ‘전혀 관심 없다’고 말한 응답자는 없었다. “회사동료나 친구들과 자녀와 관련된 이야기를 얼마나 나누는 편인가”라는 질문엔 ‘많이 하는 편이다’가 14%, ‘하는 편이다’가 37%였다. ‘안 하는 편이다’(10%)보다 훨씬 많았다.

    직장에서 집안 얘기, 자녀 얘기는 금기시하던 시절과 격세지감 느낄 만큼 달라졌다. 3살배기 아들 아빠 이진영(33·회사원)씨는 “친구들은 주말에 골프 연습장 가면 ‘무조건 애 깨기 전까지 끝내기’가 원칙”이라며 “직장에서, 혹은 친구들 사이 육아 얘기는 이제 자연스러운 일상”이라고 했다.

    소파와 물아일체? 아빠가 변했어요!

    ‘나는 아이와 이렇게 시간을 보낸다(중복선택 가능)’는 설문에 1위는 ‘TV를 보거나 오락을 한다’(30.2%)였다. 그러나 나만의 소소한 ‘대듀케이션’을 찾는 아빠도 적잖다.

    대기업 19년차인 김원재(45)씨는 주말마다 초등학생 딸 아영(8)이와 서점에 간다. 아이가 읽고 싶은 책을 한 권 고르면 일주일 동안 함께 그 책을 읽고 토요일 오전 집 근처 카페에서 감상을 서로 얘기한다. “딸이 처음 배운 사자성어가 물아일체(物我一體)였어요. 주말에 소파에 착 달라붙어 있는 저를 보고 아내가 ‘물아일체의 경지에 다다랐네’하고 핀잔 줬거든요.” 그가 소파와 결별한 계기가 있었다. “시간 여행을 다룬 영화 ‘어바웃 타임’에서 주인공이 10살로 돌아가 아버지와 백사장을 걷는 장면을 봤어요. 문득 우리 딸은 나를 어떻게 기억할까 겁이 나더군요.”

    김성현(39·중소기업 운영)씨는 아들 승준(8)이와 매달 실천해야 할 목표를 3가지씩 세우고, 달성하면 상장을 만들어 나눠갖는다. 부상(副賞)은 외식. 지난달 승준이가 세운 목표는 ‘세수할 때 물 받아서 하기’ ‘하루 한번 다른 사람 칭찬하기’ ‘일주일에 한 번 설거지 하기’ 였다. 승준이는 아빠에게 세 가지를 제안했다. ‘11시 전에 집 들어오기’, ‘술 대신 물 마시기’, ‘일주일에 한 번 엄마 안마해주기’. “아들이 제안하는 ‘아빠의 목표’가 두려워요. 평소 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보이니까 심판받는 기분이에요.(웃음)”

    대기업에 다니는 백기형(41)씨는 딸 혜인(11)·아들 건우(9)와 틈나는 대로 요리를 함께한다. “애들은 어른이 되고 싶어하잖아요. 음식을 같이 만들다 보면 아이들이 어른 일에 ‘동참’했다는 뿌듯함과 성취감을 맛보는 것 같아요.” 미감(味感)도 생기고, 음식 맛은 결국 다양한 재료를 어떻게 쓴 결과물임을 보여주면서 과정의 중요성도 가르친다.

    IMF 겪은 아빠들이 대듀케이션 시작

    아빠 육아의 변화를 주도하는 연령은 40대 초중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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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롯데마트 구로점은 최근 남성을 위한 육아용품을 모은 '파파존'을 열었다.(위) 서울 용산구 백범김구기념관에서 열린 '100인의 아빠단 6기 발대식'에서 아빠와 자녀들이 화이팅을 외치고 있는 모습. /조선일보 DB·고운호 객원기자

    90년대 초중반 학번에 해당하는 이들은 풍요로운 대중문화를 경험한 X세대이면서, 1997년 IMF 외환 위기의 된서리 속에 ‘명문대=취직·출세 보장’이라는 방정식이 처음 흔들린 걸 경험한 세대다. 자유로운 사고를 가지고 있으면서 고도성장기가 끝난 뒤 취직난을 처음으로 겪었다.

    92학번으로 1998년 졸업한 이상호(44)씨는 “윗학번 선배들만 해도 ‘골라서 입사한다’ 했는데 우리 땐 뽑는 곳이 없었다. 운 좋게 취업 재수 끝에 대기업에 들어갔다”고 했다. 그는 “아들 세대는 지금보다 저성장이 더 심화되리라 본다”며 “학교 교육보단 세상살이 교육을 가르치고 싶다”고 했다.

    “아버지 세대와 달리 우린 맞벌이가 익숙한 세대예요. 그런데 요샌 이웃 간 소통도 없고 주변에 친척도 없이 부부 둘이 전적으로 애를 키워야 하는 상황이지요. 아이 교육을 애 엄마에게만 맡기는 건 무책임하다고 봐요.” 초등학교 1학년 아들을 둔 강성욱(41)씨 얘기다. 설문에서 “자신이 몇 점짜리 아빠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50대 아빠는 평균 66점, 40대 아빠는 71.48점, 30대 아빠는 72.76점을 줬다. 30~40대는 점수가 거의 비슷했지만 50대는 상대적으로 점수가 박했다. 50대의 자녀 교육 참여도가 그만큼 낮다는 얘기로 해석된다.

    아빠표 교육에 엄마들은 대환영이다. “아무래도 엄마들은 애 친구 엄마랑 만나면 귀가 얇아질 수밖에 없어요. ‘나만의 교육’이란 게 참 어려운데 아빠는 ‘엄마 네트워크’에서 멀어져 있으니 오히려 소신 있는 교육을 할 수 있어요. 결과가 성공일진 모르겠지만.(웃음)” 환희(11) 엄마 정미경(40)씨 얘기다.

    아빠 교육, 자녀의 사회성 발달시킨다

    전문가들은 엄마 교육과는 다른 빛깔의 아빠 교육이 아이의 균형적인 정서 발달에 도움을 준다고 입을 모은다. ‘아빠의 인성교육’ 저자 김범준씨는 “아빠표 육아는 ‘몸’으로 ‘함께’ 하는 놀이”라고 했다. “운동장에 공 하나 가지고 나가보세요. 뭐든 함께 해야 해요. 자기 점심값 아껴서 비싼 장난감 사줘도 같이 조립하지 않으면 의미 없어요.” 푸름이교육 신영일 대표는 “사회성 발달은 아빠의 몫”이라며 “도전하거나 좌절을 견디는 힘을 길러주는 게 아빠의 역할”이라고 했다.

    한국아동청소년심리상담센터 이향숙 소장은 양육을 운동 경기에 비유했다. “경기할 때 가까이에서 호흡하며 선수의 상태를 챙기는 건 ‘코치’, 보다 넓은 시야에서 큰 그림 그리고 적재적소 중요한 결정을 내리고 책임지는 역할은 ‘감독’입니다. 가정에서 코치는 엄마, 감독은 바로 아빠입니다.”

    육아에 푹 빠진 동갑내기 아빠 셋
    “아빠는 아이의 내적 면역을 키워줘야”


    육아에 푹 빠진 동갑내기 아빠 셋이 서울 광화문 한 카페에 모였다.

    ‘육아 고수(高手)’를 꿈꾸는 동갑내기 아빠들이 아이를 안고 환하게 웃었다. 왼쪽부터 본지 음식전문기자인 김성윤·동주 부자, 사진가 오재철·하란 부녀, 패션칼럼니스트 이헌·이재 부녀.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7개월 이재 아빠’인 패션칼럼니스트 이헌(42·이하 이), ‘14개월 아란 아빠’ 사진가 오재철(42·이하 오), ‘36개월 동주·10개월 동빈 아빠’이자 조선일보 음식전문기자인 김성윤(42·이하 김)이 여느 엄마들 부럽지 않은 입담을 펼쳤다.

    -‘남다른 아빠’라던데?

    오=엄마와 보내는 시간, 아빠와 보내는 시간이 다르다고 생각한다. 감정이입을 잘하는 편이라 아이 눈높이에서 즐거움을 찾아주려 노력한다. 놀이동산을 가더라도 어릴 적 내가 겪은 경험을 한 번 더 떠올려보고.

    이=자녀는 아빠가 운영하는 최고 기업이자, 최대 사명(使命) 아닌가. 엄마는 한없이 따뜻하지만, 아빠는 아이의 내적 면역을 키워줘야 한다. 아내도 ‘초보 엄마’다. 아빠가 관심 가져야 엄마 마음도 안정시키고, 아이 마음도 안정된다고 생각한다.

    김=아버지가 무척 가정적이셨다. 1980년대 초반 아들 운동회라고 월차 내고 참석할 정도였다. 우리집만 아버지가 오셔서 친구들이 혹 백수로 오해할까봐 민망하고 싫었다. 아이 아빠가 되어보니 행복한 추억이다.

    -육아를 하며 달라진 게 있나?

    이=감정적으로 풍부해졌다. 아이가 인식할 바깥세상이 눈에 더 들어오더라. 여름꽃이 이렇게 많이 보이긴 20대 이후 처음이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오=이해 폭이 넓어졌다. 사진이 혼자 하는 작업이라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하다. 공공장소에서 소란스런 아이들만 보면 ‘왜 저럴까’ 싶었는데 이제는 이해한다. ‘현재’만 중시하다가 아이가 살아갈 ‘미래’에 관심 생긴 것도 달라진 점이다.

    김=한정된 시간에 일과 육아 모두 감당해야 한다. 균형이 무너지면 일도, 육아도 힘들어 시간을 효율적으로 분배하는데 신경쓴다.

    -나만의 육아법이 있는가?

    오=사진가라 시각이 발달했다. 색감을 발달시켜 ‘감성’을 키워주려 한다. 고무깔판 하나를 사도 색(色)의 조화를 신경쓴다. 지식은 짧은 시간에 습득할 수 있지만 감성은 노력해야 기를 수 있다고 본다.

    이=디테일에 신경 쓴다. 일주일에 서너 번 아이와 산책하러 나가는데, 꽃 한 송이를 봐도 꽃말을 들려주려고 한다. 대상에 이야기를 더해 아이가 풍성하게 느끼도록 하고 싶다.

    김=오믈렛이나 프렌치토스트를 만들 때 아이에게 같이 해보자고 말한다. 풀어놓은 계란에 젓가락으로 서너 번 휘젓는 게 전부지만, 자기가 요리과정에 참여한 음식은 편식 없이 잘 먹는다.

    -어떤 아빠가 되고 싶나?

    이=다정한 아빠. 훗날 아이가 커도 고민이 생기면 스스럼없이 털어놓을 수 있으면 좋겠다.

    오=기다려주는 아빠. 아이는 앞에서 끌어주기 보단 뒤에서 지켜봐야 한다. 선을 넘지 않도록 안전망을 쳐주되, 아이가 스스로 모든 걸 선택하도록 하고 싶다.

    김=아버지는 당신 삶 전부를 아들과 함께 했다. 우리 아버지 같은 아빠가 되고 싶다.

    150억원 포기한 아빠의 선택
    강남할배 그들만의 ‘손자병법’
    [편집자 레터] 이번 휴가엔 싸우지 말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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