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석 → 8석 → 51석… 여의도 물들인 '핑크 파워'

20대 총선은 역대 최다 여성 당선자 수를 기록하며 여성 정치사에 한 획을 그었다.
지역구에서는 역대 최다 당선자인 26명을 배출했고, 여성 다선(多選) 시대의 포문도 열었다.
국민들의 바람대로 그들은 한국 정치판에 새 바람을 불어 넣을 수 있을까?

    입력 : 2016.06.28 18:21

    역대 最多 국회 입성… 그녀들이 털어놓은 속마음
     

    #임영신(1899~1977)은 대한민국 첫 여성 장관이자 국회의원이다. 여자가 상공부 장관이 되었다고 해서 간부들이 뒤에서 쑥덕거렸다.“ 서서 오줌 누는 사람이 어떻게 앉아서 오줌 누는 사람에게 결재를 받느냐.” 임영신이 듣고 호통을 쳤다. “내가 비록 앉아서 오줌을 누지만 나라를 세우기 위해 서서 오줌을 누는 사람 이상으로 활동했다. 내게 결재받기 싫으면 당장 보따리를 싸라.”

    그래픽=김의균 기자

    #박순천(1898~1983)은 제2대 총선에서 정치1번지 서울 종로에 출마해 당선된 여성 국회의원 2호다. 어느 날 한 남성 의원이 인신공격을 했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 그러자 박순천이 되받아쳤다. “나랏일이 급한데 암탉 수탉 가리지 말고 써야지 언제 저런 병아리를 길러서 쓰겠느냐. 암탉이 낳은 병아리가 저렇게 꼬꼬댁 거리니 길러서 쓰려면 아직도 멀었다.”

    두 정치 여걸(겿傑)들이 살아 있었다면 격세지감을 느꼈을까. 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여성 당선자 수가 역대 최다(最多)를 기록했다. 이달 본격 활동을 시작한 20대 국회에 입성한 여성 의원들은 51명. 전체 의원 수의 17%로 19대(47명)보다 1.3% 포인트 증가했다. 1948년 제1대 제헌국회가 전원 남성 의원만으로 개원(임영신은 1949년 보궐선거로 당선)했던 풍경에 비하면 괄목할 만한 성장이다.

    최다 기록 말고도 20대 총선은 여성 정치사에 한 획을 그었다. 지역구에서 역대 최다 당선자인 26명을 배출했다. 15대에 처음 지역구로 2명이 당선된 이후 16대 5명, 17대 10명, 18대 14명, 19대 19명으로 꾸준히 늘다가 이번에 26명으로 급증했다. 지역구 여성 출마자는 98명으로 남성 출마자의 8분의 1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었지만, 26.5%에 해당하는 26명이 승전고를 울리며 여성 정치인의 저력을 보여줬다.

    여성 다선(多選)시대의 포문도 열었다. 추미애 의원은 지역구로만  5선이라는 기록을 달성했고, 나경원·박영선·조배숙 의원은 4선, 이혜훈·박순자·유승희·김영선·김상희·김현미·심상정 의원은 3선 반열에 올랐다. 3선 이상 중진 의원은 국회 상임위원장은 물론이고 당 지도부에 도전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17대 국회의원을 지낸 김명자 전 환경부 장관은 “정치의 심장 국회에서도 여성 파워가 커지고 있다는 걸 실감한다”면서 “신뢰를 잃은 한국 정치가 국민이 원하는 방향으로 새롭게 변화하는데 여성 의원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선배 여성 정치인, 아니 국민들의 바람대로 그들은 한국 정치판에 새 바람을 불어 넣을 수 있을까? 20대 국회 여성 의원 51명에게 그 가능성을 물었다.

    女의원들이 말했습니다
    “집에선 70점짜리 엄마”


    “우리가 추진력을 보여줘도 ‘드세다’고 말할 때 속상해
    여성 의원이 남성보다 공감력 뛰어나… 메르켈 가장 존경”

    “20대 국회 女의원들의 생각·포부

    자력으로 국회에 입성한 26명 지역구 여성 의원들을 포함해 51명의 20대 국회 여성 의원들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 ‘더 테이블’이 야심차게 의정활동을 준비하고 있는 여성 의원들에게 정치 포부부터 자녀교육까지 다양한 질문을 던졌다. 51명 중 35명의 의원이 답변을 보내왔다.

    여성 의원의 강점은 ‘공감력’

    ‘여성 의원이 남성 의원에 비해 지닌 강점이 무엇일까’라는 질문에 절반에 가까운 여성 의원들은 “공감 능력”(17명)이라고 답했다. 국민들이 원하는 바를 더 섬세하고 정확하게 짚어낸다는 뜻이다. “청렴함”과 “통합조정 역할을 할 수 있는 온화함”이 뒤를 이었다.

    ‘역대 여성 국회의원 중 가장 의정활동을 잘한 사람’을 꼽아달라는 질문에는 이미경(5명), 전재희(3명), 박영선·박영숙·심상정(각 2명) 순으로 나왔다. 1위에 꼽힌 이미경 전 의원은 20대 총선에는 공천을 받지 못했지만, 그가 활동했던 국토교통위원회에 출석한 강호인 국토교통부 장관이 19대 마지막 전체 회의에서 “항상 따뜻하게 질책해주셔서 저희도 정책을 펴는 데 많은 교훈을 얻었다”며 눈물을 보였을 만큼 의정활동을 열정적으로 해온 의원으로 평가받는다. 여성계 최대 숙원이었던 호주제 폐지를 위한 민법 개정안을 처음 발의한 주역도 이미경 전 의원이었다.

    20대 국회 여성 의원들이 국내외 통틀어 가장 존경하는 여성 정치인은 독일 앙겔라 메르켈 총리(18명)가 압도적인 표를 얻었다. “합리성과 원칙을 기반으로 한 리더십” “명확한 방향 제시와 소통 능력, 통합의 리더십”을 그 이유로 꼽았다. 2위는 영국의 마거릿 대처 수상(5명), 3위는 미얀마의 아웅산 수치(1명)와 여성 최초로 대한민국 야당 당수를 역임한 박순천 전 의원 등이 꼽혔다.

    “빈부 격차·입시 교육 개선하겠다”

    ‘여성 의원으로 의정활동을 펼칠 때 가장 자주 느끼는 세간의 편견’을 묻는 질문에는 “추진력을 보여줘도 ‘드세다’는 평가를 받을 때”(17명)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다음으로 “여성 의원은 끈끈한 의리가 없다고 생각할 때”(6명), “능력보다 외모가 더 주목받을 때”(5명), “‘여자라서 그래’라는 말을 들을 때”(2명)가 뒤를 이었다. ‘가정에서 여자라는 이유로 차별받은 경험이 있느냐’는 질문엔 모든 의원이 “그렇다”고 했다. “‘여자가 무슨 정치냐’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8명), “결혼 후 직장을 그만두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4명)고 했고, 절반 이상이 “일과 가정을 양립하는 데 부담이 컸다”고 응답했다.

    자녀교육에는 “바빠서 신경 쓰지 못한 편”(8명)이라는 답변이 가장 많았고, “학원·과외 도움 없이 최대한 스스로 공부하도록 독려했다”(7명), “자녀가 요청할 때만 학원을 보냈다”(7명)는 의원도 있었다. ‘워킹맘으로서 자녀에게 몇 점짜리 엄마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는 80점대(7명), 90점 이상(5명)이라고 자부한 의원들도 있었지만 70점대 이하(12명)에 손을 든 엄마 의원들이 가장 많았다.

    ‘자녀 세대를 위해 가장 먼저 해결하고 싶은 문제’에 대해 여성 의원들은 “타고난 환경이 평생을 결정하는 한국 사회의 빈부 격차”(16명)를 일순위로 꼽았다. “하고 싶은 공부보다 입시를 먼저 생각해야 하는 교육 현실”(8명)을 해결하겠다는 포부가 뒤를 이었고, “야근·장시간 근로 등으로 삶의 여유를 즐기지 못하는 현실”(4명)을 개선하겠다고도 밝혔다.

    “가족 챙기듯 느슨하게 의정활동 해선 안돼”


    역대 최다 여성 의원들의 과제

    “여성은 모든 세기 동안 남성의 모습을 원래 크기보다 두 배로 부풀려주는 마술적이고도 입맛에 맞는 능력을 소유한 거울로 이바지해왔지요. 이 능력이 없다면 아마 이 지구는 여전히 늪과 정글 상태였을 겁니다.” 버지니아 울프의 고전 ‘자기만의 방’에 나오는 글이다. 울프는 “앞으로 100년이 지나면 여성은 보호받는 성이기를 그만둘 것이다. 필연적으로 그들은 한때 자신들에게 허용되지 않았던 모든 행위와 능력 발휘에 참여할 것”이라고 장담했으나, 100년이 지나도록 정치권에서의 성 평등은 아직 이뤄지지 않았다. 아직 17%에 불과하지만, 20대 국회에서 여성 의원 수가 역대 최다를 기록한 것은 그래서 의미 있다. 양적 성장이야말로 질적 성장을 견인해낼 토대가 되기 때문이다.

    지난 17일 여성의정이 주최한 ‘어울모임’ 행사에 전현직 여성 국회의원들과 정세균 국회의장이 참석해 파이팅을 외쳤다. /여성의정 제공

    김명자 전 환경부 장관은 “스웨덴 43.6%, 독일 36.5%, OECD 평균 28.5% 등 여성 국회의원 숫자는 선진국들에 비해 턱없이 적지만 감성, 직관, 공감력에서 남성들보다 뛰어난 여성들이 정치권의 변화, 정책과 제도의 개선을 주도할 수 있다는 점에서 고무적인 현상”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호주제 폐지나 가정폭력·성폭력 방지법, 성매매 특별법 제정 같은 법제도 정비는 여성의 정치권 진출이 가져온 큰 성과들이었다.

    /Getty Images

    여성 의원 숫자가 많아졌다고 샴페인만 터뜨릴 상황은 아니라는 시각도 있다. 여성학 박사인 조주은 국회입법조사처 입법조사관은 “여성비례대표 할당제가 적용된 17대부터 따지면 39·41·47·51석으로 증가율이 높다고 볼 수 없다”며 “여성 의원들 사이 당파를 뛰어넘는 통 큰 연대를 이뤄가는 동시에 남성들 못지않은 상임위원회 장악력과 네트워크, 리더십을 길러야 한다”고 지적했다.

    여성 의원들의 아마추어리즘도 여전히 지적받는 대목이다. 친인척 채용 논란에 휩싸인 서영교 의원, 공천 헌금 의혹을 받고 있는 김수민 의원 문제가 개원 초기부터 터져나온 것에 대해 조주은 박사는 “가족 챙기듯 느슨하게 의정활동을 해선 안 된다. 위계와 원칙, 엄격한 도덕성으로 무장해야 국회라는 거대한 정치조직에서 돌파력을 가질 수 있다”고 말했다.

    세(勢)를 형성하는 것도 관건이다. 3선 의원이었던 전재희 전 보건복지부 장관은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정치란 같은 가치를 가진 사람들이 집단의 힘으로 뭔가를 만들어내는 것인데, 나는 홀로 떨어져 낙도정치를 해온 셈이다. 여성 후배들은 내가 하지 못한 큰 정치를 해줬으면 좋겠다.”

    [The 테이블] 패션도 정치… 여성 의원 베스트 드레서 뽑아보니
    [The 테이블] “‘데미안의 새’처럼 공부도 정치도 죽을 힘 다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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