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옛 大邱를 걷다… 진골목 '마당 깊은 집'을 지나 金光石을 만나다

  • 김우성 여행작가 
  • 편집=최원철

    입력 : 2016.06.07 18:43

    또 하루 멀어져 간다… 청춘이 머물지 않듯, 그래서 지금 김광석 거리로 간다

    문득, 그곳 김광석 만나고 100년전을 걷는 대구

    문득, 기차를 타고 싶었다. 하루면 다녀올 수 있는 곳. 대구가 만만했다. 배낭엔 김원일 소설 '마당 깊은 집'과 김광석 앨범을 구겨 넣었다.

    철로에 비가 내렸다. 대구가 고향인 선배는 "거기 뭐 볼꺼 있노?" 했으나, 이미 KTX 표를 끊은 뒤였다. 같은 대도시지만 대구는 부산 혹은 광주와 전혀 다른 색깔을 지닌 도시였다.

    김광석 길엔 요즘도 주말이면 수천 명 여행객이 찾아온다고 했다. 근대문화골목은 CNN이 한국에서 꼭 가봐야 할 명소로 꼽았던 곳이다. '마당 깊은 집' 무대인 종로통, 약전골목을 거슬러 계산성당 지나 청라언덕을 오르다 보면 서늘한 역사의 기억과 마주한다. 한국전쟁 당시 33일간 대한민국 임시 수도로 기능했던 이 도시에 피란민들은 여러 모양의 흔적을 남겼다. 교회 종소리에 하늘로 푸드덕 날아오른 저녁새를 바라보니 마음에 한줄기 평화가 찾아왔다.

    하루를 뭉텅 베어 떠난 대구, 그곳으로의 시간여행이다.

    비오는 날 대구 근대문화골목은 더욱 운치 있는 산책길이 된다. 맨 왼쪽은 김원일 소설 '마당 깊은 집' 무대인 진골목 입구. 다음이 계산성당이다. 이상화 고택에 들러 툇마루에 쉬었다 가도 좋겠다.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약전골목·미도다방·90계단… 이상화 고택 툇마루서 한숨 고르고

    대구 근대문화골목으로 떠나는 시간여행

    미도다방의 문을 여는 순간, 1980년대에 불시착한 기분이었다. 자줏빛 소파가 널찍한 공간을 채웠고 경음악이 흘러나왔다. 비 오는 날에도 회색 양복에 중절모를 쓴 멋쟁이 할아버지들이 여기저기서 담소를 나눴다. 3000원짜리 쌍화차를 시키자 한끼 식사로도 넉넉할 전병이 함께 나왔다.

    시인 전상열이 "진골목 미도다방에 가면/가슴에 훈장을 단 노인들이/저마다 보따리를 풀어놓고/차 한 잔 값의 추억을 판다"고 노래했던 미도다방은 한때 대구 문인들 아지트였다. 소설가 김원일도 이곳을 자주 찾았다. 그의 소설 '마당 깊은 집'(1988)을 들고 대구 중구의 근대문화골목 일대를 찾아 나선 길이었다. 내용의 "9할쯤이 생생한 경험담"이라는 이 장편소설에서 작가는 자신의 유년 시절을 회상했다. 한국전쟁 직후인 1954년, 고향 땅 김해 진영에서 할머니와 단둘이 살았던 길남이는 어머니의 부름으로 대구로 올라온다. 중학교에 입학할 줄 알았지만 길남이는 약전골목과 종로통을 누비며 신문을 판다.

    대구 문인들의 아지트인 '미도다방' (맨 위)엔 여전히 손님들이 북적인다. 소설 '마당깊은 집' 무대인 종로에서는 소설 속 막내를 업고 길남이를 기다리는 어머니 동상(가운데)을 볼 수 있다. 약전골목엔 은은한 약재향이 넘실댄다.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그로부터 60년이 훌쩍 지났으나 소설 무대인 장관동 일대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미도다방이 있는 진골목도 마찬가지다. '긴 골목'의 경상도 발음으로 '진골목'이 된 이 거리는 종로의 샛골목이다. 북적이는 종로에서 한 블록 멀어졌을 뿐인데 사위가 고요하다. 군데군데 덩굴이 감싼 붉은 벽돌담이 낮게 이어진다. 대구 최초의 양옥 이층 건물이라는 정소아과 의원도 이 골목에 있다.

    종로 초입에 자리한 화교소학교에서 '마당 깊은 집' 한 대목이 떠올랐다. 김장을 앞둔 한겨울, 어머니가 말한다. "길남아, 니가 이모댁 물지게 빌려가꼬 중국학교로 가서 물을 길러온나. 그게 폼뿌물이 잘 나온다 카더라. 양철통 가득은 힘에 부칠 낀게 반줌씩만 지고 오너라. 세 분은 댕겨와야 김장을 할 수 있을 끼라." 길남이는 꾀를 내어, 배달하고 남은 신문을 수위에게 주고 물을 받아온다. 그러나 물을 나를 때 필요한 건 꾀가 아니라 몸이다. "찬바람에 귀는 닭볏이 되어 아렸고" "손가락이 석고로 변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아파왔지만, 혹시나 어머니가 밥을 굶길까 길남이는 어떻게든 물을 옮긴다.

    출렁이는 물지게를 지고 휘청였을 길남이의 발걸음을 따라 종로를 걷는다. 곳곳에서 '마당 깊은 집' 인물들을 묘사한 동상과 마주친다. 벤치에 앉아 신문 뭉치를 내려놓고 숨을 고르는 길남이, 막내를 업고 길가에 나와 길남이를 기다리는 어머니를 가만 보고 있으면, 가슴 한구석이 아릿해진다. 전쟁통에 남편을 잃은 어머니는 '더러운 세월'이라 이 시절을 탓하며 장남인 길남이를 혹독하게 키웠고, 길남이는 어머니 속도 모른 채 가출을 감행한다. "종로통으로 나서자 길거리는 밝았고 사람들의 내왕이 잦았다. 크리스마스 캐럴이 거리에 넘쳤다. 나다니는 사람들은 추위에 아랑곳없이 모두 행복에 겨워 보였고 외토리는 나 혼자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시절을 회상하는 작가의 목소리가 늘 힘겹지만은 않다. 종로의 끄트머리에서 마주치는 염매시장은 행복의 순간과 맞닿은 몇 안 되는 장소다. 신문팔이에서 신문배달원으로 어엿하게 직장을 바꾼 길남이 소식에 어머니는 처음으로 활짝 웃고는, "졸라매는 줄이 달린 검정 운동화 한 켤레"를 사 준다. "새 신발을 신고 포도를 걷는 (길남이의) 발걸음은 날아갈 듯 가벼웠다."

    약전골목엔 약재 향이 은은했다. 그 향을 따라 조금만 걸음을 옮기면 '마당 깊은 집' 주무대가 된 집터가 나온다. 길남이가 살았던 집은 허물어지고 없으나 새로 들어선 건물 벽엔 원래 집을 묘사한 그림이 그려져 있다. 길남이네 가족이 다른 세 가구와 함께 살던 이곳 아래채는 당시 혼란스럽던 한국 사회의 축소판이었다. 퇴역 장교 상이군인 가족을 비롯해 월북을 시도하다 체포된 정태, 미군 부대에서 근무하다 미군과 결혼하는 미선이 등 아래채 식구 14명은 전후가 아니라면 모이지 않았을 인물들이다.

    여기까지 온 걸음, 근대문화골목을 안내하는 표지판을 따라 내처 걸어도 좋겠다. 걸을수록 시간은 더욱 멀어져 일제강점기에 가닿는다. 장관동을 빠져나오면 가장 먼저 제일교회가 보인다. 대구·경북 지역에 처음 설립된 개신교 교회다. 빌딩 숲 사이 한껏 웅크린 듯 아담한 이상화 고택과 서상돈 고택이 가까우니 고택 툇마루에 앉아 잠깐 쉬었다 가자. 박정희 대통령이 결혼식을 올렸다는 계산성당을 지나 일명 '90계단'으로 불리는 3·1운동 만세길을 걸어오르면 청라언덕이다. 이은상이 지은 시에 박태준이 곡을 붙인 '동무생각'의 무대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 선교사들이 살던 서양식 주택이 그때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한때 대구를 내려다보았을 이 동산을 둘러싸고 건물들이 높게 들어서서, 이제는 언덕이 아니라 아늑한 비밀의 정원 같다.

    '청춘, 그 빛나는'이라는 물구 때문일까. '김광석 다시 그리기 길'에는 20~30대 젊은이들이 각지에서 찾아온다. 우산 쓰고 지나가는 여성들 너머 활짝 웃고 있는 김광석 모습이 그의 목소리만큼이나 해맑다.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350m 벽화골목서 온 얼굴에 주름 지으며 웃는 歌客

    김광석 다시 그리기 길

    "마흔 살이 되면 오토바이 사고 싶어요. 할리 데이비슨, 멋있는 걸로."

    창에 빗방울이 부딪혔다. 창밖으로 풍경이 번졌다. 때 이른 폭염주의보 끝에 찾아온 비 소식이었다. 대구로 가는 기차에서 김광석의 앨범을 들었다. 공연 실황을 담은 이 앨범은 노래 사이사이, 그가 공연장에서 들려줬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빗소리처럼 나직한 목소리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옆자리에 앉아 그가 속삭이는 것만 같다.

    마흔 살에 할리 데이비슨을 타고 세계를 여행할 거라던 그는 1996년, 서른둘 나이에 우리 곁을 떠났다. 그 뒤로 20년이 흘렀다. 살아 있다면 "가죽 바지 입고 체인 막 감고" 떠난 세계일주 중에 "괜찮은 유럽 아가씨 있으면 뒤에" 태운 이야기를 들려줬을 것이다. 아쉬운 마음을 안고 대구로 간다. 대구엔 김광석을 그리워하는 이들이 전국에서 모여들고, 365일 내내 거리에서 그의 노래가 울려 퍼지는 곳이 있다. '김광석 다시 그리기 길'이다.

    통기타를 매고 노래하는 김광석을 형상화한 동상. 그의 미소는 묘한 위안을 준다.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김광석 길은 약 350m 길이의 벽화 거리다. 그가 어린 시절을 보낸 대봉동 방천시장 인근 골목에 2010년 조성했다. 인위적으로 만든 거리와 마을들이 쉽게 잊힌 것과 달리 김광석 길은 5년이 지난 지금도 주말이면 평균 5000명의 방문객이 찾아온다. 골목에 들어서서야 이 길의 매력을 깨달았다. 벽면을 가득 메운 그림과 설치예술은 단순히 김광석을 그리지 않는다. 우리 각자가 기억하는 김광석이 있고, 개인이 추억하는 김광석은 모두 다르다. 누군가는 포장마차에서 환히 웃으며 따뜻한 우동 한 그릇 건네는 김광석을 그렸고, 다른 누군가는 새장 속에 갇힌 친구들을 바라보며 키득대는 김광석을 그렸다. 노래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가 소박한 화분들로 빼곡한 선반으로 형상화된 모습, 노래 '기다려줘'의 가사가 빨간 공중전화 부스 옆 가로등 불빛으로 화한 모습 앞에서 한참이나 머뭇거리게 된다.

    나는 김광석이 세상을 뜬 이후 그의 노래를 처음 들었다. 앨범 '노래이야기'를 사서 워크맨에 넣고는, 테이프가 늘어질 때까지 들었다. 당시 수험생이던 내게 '일어나'도, '자유롭게'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마음을 흔든 건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들이었다. 진지하게 자유와 포기를 말하다 갑자기 짜장과 짬뽕 이야기를 꺼내 피식 웃음을 짓게 만들고, 파리를 쫓다 콧구멍으로 삼킨 에피소드를 말하다 "뜬금없이 찾아오는 외로움"을 이야기할 때 묘한 위로를 받았다.

    야외공연장 맞은편 카페 '바하의 선율'에 들렀다. 2층 창가에 앉아 거리를 내려다봤다. 비가 오는 평일 오후인데도 김광석 길은 북적였다. 우산 아래 손을 잡은 어린 연인들과 군인들이 소곤대며 걷고, 친구들끼리 사랑의 자물쇠 앞에 모여 깔깔거리며 사진을 찍는다. 김광석은 20년 전에 떠났지만 그의 노래는 현재진행형이다. 오디션 프로그램을 통해서든, 노래방에서든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김광석 노래를 만나는 순간이 찾아온다. 인생의 고비마다 또, 그의 노래가 들려온다. 나 역시 그랬다. 대학에 입학하며 그를 까맣게 잊었다가, 군 입대 전 찾은 노래방에서 누군가 '이등병의 편지'를 불렀다. 잊을 만할 때쯤 서른이 찾아왔고, 회사 동료들과 함께 노래방에서 '서른 즈음에'를 불렀다.

    한 친구가 말했다. 김광석의 노래는 가슴을 울리지만, 그의 노래를 부르는 남자들은 하나같이 찌질하고 청승맞다고.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김광석을 따라 부르다 보면, 촌스럽다고 생각해 꾹꾹 묻어놨던 감정들이 솟구친다. 낭만이나 편지, 사랑 같은 낡은 단어들이 새로 보인다. 카페 테이블에 놓인 방명록에 이런 글이 적혔다. '내가 찾는 낭만이여, 어디에도 없을 낭만이여, 광석이형을 그리워하는 낭만이여, 그는 낭만과 함께 잠이 들었소'.

    카페에서 나와 다시 걸었다. 김광석이 통기타를 뒤에 메고 할리 데이비슨에 탄 벽화 앞에 멈춰 섰다. 누군가 그랬다. 가수 김광석이 유명한 이유를 묻는 질문에 "이 사람 노래가 내 마음을 읽는다"고. 괜한 바람들이 머릿속을 어지럽힌다. 오후 7시, 골목 곳곳의 가로등에 불이 들어왔다. 거짓말처럼 비가 그치고 하늘이 갰다. 골목을 되돌아 김광석 길을 떠난다. 어슴푸레한 하늘을 올려다보며 거리에서 흐르는 그의 노래를 따라 흥얼거려본다. "거미줄처럼 얽힌 세상 속에서 바람에 나부끼는 나뭇가지처럼 흔들리고 넘어져도, 이 세상 속에 마지막 한 방울의 물이 있는 한, 나는 마시고 노래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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