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보식이 만난 사람

사이공 함락 당시 美 공사의 탈출 권유에도 교민 보호하다 체포돼

    입력 : 2016.06.07 14:06

    [6·25와 베트남전 두 死線을 넘다… 이대용 전 駐越 공사(下)]
     

    <上편에서 계속>

    물론 이런 약속이 지켜질 리 없고, 조중훈 회장은 저세상 사람이 됐다. 2년 전 이 스토리를 알게 된 한 작가가 한진그룹에 알리자, 하와이에 거주하고 있는 동생 조중건 전 부회장이 찾아와 감사를 표시했다고 한다.

    ―베트남 근무를 마치고 1년도 안 돼 또다시 대사관 공사로 나갔더군요.

    "돈 싸들고 인사를 안 다니니 사단장 시켜줄 리 없었지요. 한직(閑職)에 보냈어요. 군복을 벗어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을 무렵, 직속 사령관이 불러 골프를 치러 갔다가 박 대통령을 만났어요. '이 장군, 요즘 어디 있나?'고 물어요. 내가 소속을 말하자 의아스럽다는 표정을 짓고 가다가, 되돌아와서 '왜 보직을 받지 못했지?' 물었습니다. 며칠 뒤 국방장관이 나를 불러 '소장으로 승진 예편시키고 주월대사관 부(副)대사로 발령내라는 게 각하의 지시'라고 했어요.(하지만 그는 경제공사로 발령났고 결국 진급을 못 하고 준장으로 예편함)"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베트남 行
    교민 보호하다 월맹군에 체포돼

    남베트남 패망 이틀 전 1975년 4월 28일 주월 한국대사관은 폐쇄됐다. 그는 교민 철수 작전 책임을 맡았다. 사이공 외곽에서 포성이 들렸다. 상황은 급박했다. 그는 그때까지 탈출 못 한 잔류 교민 175명을 데리고 프랑스 정부에서 운영하는 병원(치외법권 지역)으로 들어갔다. 다음 날 사이공은 함락됐다.

    ―결국 체포돼 감옥에 갇혔는데, 그때 선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내가 미 대사관에 갔을 때 미국 공사가 '지금 혼자 옥상에 올라가 헬기를 타라'고 권했어요. 교민들을 버려두고 혼자 떠날 수는 없었어요. 6·25 때 다들 죽었는데 나는 지금껏 살았으니 무슨 여한이 있겠나 생각했어요. 그때 잔류 교민들을 인솔하지 않았으면 다음 날 사이공에 진입한 월맹군에 의해 거의 다 사살됐을 겁니다."

    그는 햇볕이 안 들어오는 감방에 갇혔다. 297일 만에 일광욕을 할 수 있었다. 그의 몸무게는 78㎏에서 46㎏으로 줄었다.

    ―북한노동당 공작요원 3명이 파견돼 직접 심문을 하고 '북한 망명 자술서'를 강요했다면서요?

    "나를 북으로 데려가 정치적으로 활용하려고 했지요. 나는 결코 항복하지 않았어요."

    그의 석방 안건을 놓고 한국과 베트남, 북한 3자 비밀협상이 진행됐다. 북측에서는 '남한에 수감된 남파 간첩 450명과 교환하자'고 요구했다. 협상이 지지부진하자, 한국 원자력 사업과 인연이 있었던 유대계 거상(巨商) 아이젠버그가 해결사로 나섰다. 그러던 중 궁정동 안가(安家)에서 박 대통령이 피격되는 10·26이 발생했다.

    이대용 공사가 풀려난 것은 1980년 4월 12일이었다. 그는 아이젠버그의 개인 전용기를 타고 들어올 수 있었다. 4년 7개월간 수감을 포함해 베트남 억류 5년 만이었다.

    1964년 주월남 무관이었던 이대용 전 공사가 월남군 장군을 접견하는 모습. / 이대용 제공

    국제사회서 영원한 적·아군 없어
    베트남서 심문한 경찰,
    한국에서 대사 신분으로 만나

    ―그 시절 국내 상황은 어수선했지요. 우리 정부에서는 어떻게 대접했습니까?

    "최규하 대통령이 청와대로 불러 '박 대통령이 살아있었으면 크게 치하했을 텐데 청와대 금고가 바닥이 났다'며 봉투를 하나 줘요. 300만원이 들어있었어요."

    ―베트남에서 장군님을 심문했던 '안닝노이찡(특별경찰)' 3인방 중 한 명이 나중에 주한 베트남 대사로 부임했다면서요?

    "악명 높았던 즈엉징특이었어요. 그는 김책공대와 김일성대학에서 유학해 우리 말을 잘했어요. 평양 주재 베트남 대사를 한 뒤 2002년 주한 베트남 대사로 왔어요."

    ―부임 소식을 전해들었을 때 어떠했습니까?

    "세상 요지경이다 싶었어요. 하지만 복수한다는 것은 조국에 큰 누를 끼치는 거라, 표가 안 나는 복수 방법이 없을까 생각했지요."

    ―그해 9월 신라호텔에서 '베트남 수교 10주년' 행사에서 조우를 했다고요?

    "그는 긴장한 채 기다리고 있었어요. 나를 만나자 '당시 심문을 받을 때 국제관계에서는 영원한 적도 친구도 없다고 말하던 장군님의 선견지명에 놀랐다'고 했어요. 서로 총을 겨누던 관계가 국교정상화로 우방이 됐으니까요. 나는 '그때 당신은 당신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했고 나는 우리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했다'고 답했어요. 그 뒤 우리는 친구처럼 가끔 만났어요. 원한의 외나무다리에도 꽃은 피구나 생각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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