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시각] 강남역의 추모와 분노

    입력 : 2016.05.23 06:37 | 수정 : 2016.05.23 08:32

    정상혁 디지털뉴스본부 기자

    지금 대한민국에서 가장 뜨거운 곳이라면 서울 지하철 강남역 10번 출구일 것이다. 지난 17일 강남역 인근 화장실에서 한 남성의 흉기에 23세 여성이 목숨을 잃은 뒤 추모의 장소가 됐다. 애도 포스트잇 수천장이 출구 벽면에 나붙었다. 지난 21일 이곳을 찾았다.

    현장엔 '여성이라 죽었다' '나도 희생자가 될 뻔했다'는 공분이 메아리쳤다. 그런데 몇몇 여성 단체가 분노의 방향을 '한국 남자'로 틀기 시작했다. '잠재적 범죄자'로 규정된 남성들이 발끈하면서 점차 남녀 성(性) 대결로 번졌다. 현장을 찾은 진선미 의원은 그걸 보고 "왜 우리는 자꾸만 분열해서 이렇게 생각할까"라고 한탄했다. 화해 제스처를 취하는 남성도 있었다. 이날 한 남성은 마이크를 들고 "남자로서 미안하다… 싸우지 말자"고 연설했다. '남녀 편 가르기 그만하자'는 피켓을 들고 침묵시위를 한 남성도 있었다. 그때마다 일부 여성이 몰려가 둘러싸고 "남자가 죽였다"고 소리쳤다. 몸싸움이 벌어지자 현장에 대기 중이던 경찰이 제지하고 나섰다.

    그간 범죄 앞에서 여성으로서 겪어야 했을 불안과 설움 등을 고려하면 이 정도 흥분을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다. 여성이 범죄에 노출되지 않고 안심할 수 있는 사회를 반드시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현장의 열기는 정상적인 추모를 비켜나고 있었다. 증오가 현장을 뒤덮자 시민들은 이내 등을 돌렸다. 인터넷 여론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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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일 오후 서울 강남구 서울지하철 2호선 강남역 10번 출구에 '강남 묻지마 살인사건'의 성격을 놓고 '여성혐오 범죄' 측과 '묻지마 범죄' 측이 대치하고 있다. /뉴시스
    돌이켜보면 어떤 비극 이후의 추모는 대개 비슷한 흐름이었다. 희생자를 위한 애도가 적(敵)을 향한 증오의 불길로 바뀌었다. 최근 세월호 추모가 대표적일 것이다. 표적은 명확하지 못했다. 대통령에서 정부·여당으로, 대한민국으로 창끝이 벌어지다가 끝내는 추모 현장에서 태극기를 불태우는 막가파까지 나왔다. 이성이 빠져나간 자리에 증오가 자리 잡았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이 등을 돌렸다. 분노한 목소리는 스스로 힘을 약화시켰다. 추모는 분열됐고, 상처는 여전하다.

    책 '분노하라'로 유명한 레지스탕스 출신 작가 스테판 에셀은 분노가 끓어 넘치는 상태를 '격분'이라고 정의하고 '도에 넘치게 분노해서는 안 되며 격분은 희망을 부정하는 행위'라고 했다. 상대를 물어뜯기만 하려는 태도는 문제 해결의 희망을 없앤다는 지적이다. 추모는 슬픔의 힘을 바탕으로 현실 개선의 의지를 충전하는 일이어야 한다. 분노하느라 왜 분노했는지 잊어서는 안 된다.

    죽음을 기억하려는 의지는 세상을 바꾸기 위한 법(法)이 되기도 한다. 지난 19일 '신해철법'이 통과됐다. 2년 전 가수 신해철씨가 의료 과실로 목숨을 잃었을 때 지인들은 모든 의사를 적으로 돌리지도 않았고, 무리한 구호를 앞세우다 여론과 멀어지지도 않았다. 유족·동료·팬들은 추모 콘서트를 열고 국회의 문을 두드리며 "억울한 의료 사고 피해자를 돕자"고 호소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 토대가 마련됐다. 슬픔이 분노와 상처로 끝나지 않았다. 이번에도 그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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