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수웅의 르네상스人

"'자본가의 하수인' 아버지 미워했지만…"

    입력 : 2016.05.11 14:33

    [詩人 박노해 아내 김진주씨]
     

    전시관을 지나치던 초등생 두 명이 신기한 듯 아는 체한다. "어, 아줌마 어젯밤 TV에서 봤는데." "이게 라디오라는 거구나."

    광화문 옆의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5층. 투명 유리 안에 국산 1호 라디오 '금성 A-501'(1959)이 있다. '아줌마'로 불린 김진주(61)씨가 환하게 웃으며 대답한다. "그래. 이게 바로 우리 아버지가 만든 라디오야."

    아버지가 만든 라디오가 등 뒤에 있다. 국산 1호 라디오 금성A-501. 대한민국역사박물관 5층 전시실에서 김진주씨는 "감옥에 사는 동안 나는 아버지의 시대를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게 되었다. 엔지니어로서 얼마나 고뇌에 찬 나날을 고군분투하며 살아왔던가를 이해하게 됐다"고 했다. /김지호 기자

    열 살 남짓 소년들은 김진주라는 이름도, 라디오라는 기계장치도 처음 듣는다는 표정. 단지 5월 5일 밤 방송된 KBS 과학 다큐 프로그램에서 잠깐 등장한 'TV 나온 사람'을 기억할 뿐이다. 대한민국 최초의 라디오를 만든 엔지니어 김해수(1923~2005)의 딸로 출연한. 당연히 그녀 남편 박노해의 이름도, 산업화 세대와 민주화 세대의 갈등과 화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이 집안 사정도 알 턱이 없다.

    "아버지는 4남매 중 고명딸인 나를 무척 아꼈어요. 하지만 난 아버지를 '군사독재와 자본가의 하수인' '비겁한 친일 협력자'로 미워했죠. 물론 대놓고 표현은 한 번도 안 했지만."

    이화여대 약대 졸업, 구로공단 미싱사로 취직. '얼굴 없는 노동자 시인' 박노해와의 결혼, 이후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 중앙위원 활동과 체포, 4년 간의 감옥 생활(1991~1995)….

    김진주씨(왼쪽)와 남편 시인 박노해. /김지호 기자·조선일보 DB

    한국 전자 산업의 선구자와
    근대화의 주역인 딸,

    산업화 세대와 민주화 세대의
    갈등과 화해

    지금의 40대 이상 세대에게 이 부부는 익숙하다. 하지만 그녀의 부친이 '조국 근대화의 주역'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늙은 아버지 옆에서 그의 삶을 받아 적었던 2004년까지만 해도 딸 역시 구체적인 내용은 잘 몰랐으니까. 아버지가 육필로 적고 딸이 정리한 '아버지의 라듸오'(느린걸음 刊)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산업포장' 훈장을 받았던 대한민국 1세대 엔지니어 김해수의 파란만장 일대기다. 경남 거창에서 태어나 일본 유학 시절 전기 기술을 배웠고, 1958년 금성사(지금의 LG)가 공채 엔지니어를 처음 뽑을 때 수석으로 합격했으며, '국산 라디오 1호' '국산 TV 1호'를 만든 한국 전자 산업 초창기의 주역이자 선구자. 하지만 영광의 산업화 무대 뒤에서는 딸과 사위, 그리고 막내아들까지 민주화 운동으로 구속되는 걸 지켜봐야 했던 비운의 아버지. 2016년 지금 시점에서 궁금했던 건 그 대목이었다. 부녀의 화해는 어떻게 가능했을까.

    "평생 손찌검이라고는 모르던 아버지가 나를 밤새 때린 적도 있어요. 펑펑 눈물을 흘리면서 말이죠. 그래도 변하지 않았던 내 생각이 바뀐 건 결국 감옥에서였어요."

    그녀의 수감 기간은 1991~1995년. 말 그대로 세계사의 격변기였다. "내가 실제로 이룬 건 뭔가 반성했어요. 굳게 믿었던 사회주의가 무너지는 걸 지켜보면서, 모든 걸 다시 생각했죠. 사람 관계가 계급으로만 나눌 수 있는 건 아니구나. 운동도 예전과 같은 방식으로는 안 되겠구나. 혁명적 계급투쟁 말고 문화적으로 할 수 있는 운동이 있겠구나…."

    시인 박노해에 대한 인물·인맥 검색
    아버지가 만든 라디오 앞에 앉아 있는 김진주씨. /김지호 기자

    아버지 역시 자신의 신념만을 고집하지 않았다. 석방되어 집에 돌아왔을 때, 딸은 아버지가 그렇게 자랑스러워했던 거실의 박정희 대통령 산업포장이 사라진 것을 발견했다. 아버지는 이렇게 회고했다. "서랍 속에 고이 모셔두기로 했다. 우리 세대는 위대했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민주주의를 위해서 희생당했다는 고통을 외면해온 죄를 짓기도 했다."

    아버지의 라디오가 있는 박물관 3층 찻집에서 딸은 담담하게 말했다. "결국은 아버지의 사랑이 먼저였던 것 같아요. 그때부터 빚진 마음으로 아버지와 그의 생애를 돌이켜봤습니다."

    '국산 라디오 1호를 만든 엔지니어의 이야기'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책 '아버지의 라듸오'는 결국 그 힘들었던 화해의 여정이기도 하다.

    그녀를 산업화 세대와 민주화 세대를 극복한 르네상스인으로 명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부녀의 사례와 달리 세대 간의 화해는 완성되지 않았고, 게다가 2016년은 '산업화'나 '민주화'를 넘어선 새로운 가치가 필요한 시기니까. 하지만 대안까지는 아니더라도, 이 부녀의 고투(苦鬪)와 생애가 새로운 젊은 세대에게 어떤 힘과 에너지가 될 수는 있지 않을까.

    그녀는 지금 구순의 노모(老母)를 모시고 경남 거제의 한 사찰에서 살고 있다. 생전의 아버지가 자신의 누이를 위해 지어줬던 작은 절. 이제는 절의 주인이었던 고모도, 대처승이었던 고모부도 세상을 떠났다. 따로 떨어져 글을 쓰고 있는 박노해 시인 역시 명절이나 제사 때만 찾는다는 조용한 절집의 삶이다. 학창 시절 전공을 살려 일주일에 3~4일 출근하는 요양병원 '월급 약사'로 생계를 꾸린다.

    그는 "무엇보다 젊은 세대가 행복한 인간으로 살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행복하려면 먼저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해요. 그런데 이건 아무도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죠. 자기가 직접 배울 수밖에. 그런데 한국 남자들은 사랑하는 능력이 부족한 것 같아(웃음). 사랑하면 자기도 남도 다 행복한데 말이죠. 비싼 밥 사주고, 멋진 곳 데려가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자기 손으로 집 청소하고, 아이들과 함께 조금 더 놀아주고. 그런 남자가 좋은 남자예요."

    국산 라디오의 선구자 김해수씨의 스토리는 금성사에서 시작돼
    "나는 左도 右도 中道도 아니다… 나눔과 사랑 꿈꾸는 혁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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