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래와 박태준의 예외적인 상대 평가

  • 문갑식 월간조선 편집장 
  • 편집=최원철

    입력 : 2016.04.10 13:01

    [문갑식 기자의 기인이사(奇人異士)(45):벌교 홍교와 조정래의 태백산맥(中)]
     

    <上에서 계속>

    조정래(趙廷來)는 1943년 8월 17일 선암사에서 태어났습니다. 부친 조종현은 승려이자 시조 시인으로서 만해 한용운이 조직한 승려들의 비밀결사 만당(卍黨)의 재무위원을 맡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왜 승려가 결혼을 했는지가 궁금할 것입니다.

    당시 조선불교는 총독부가 시행한 일본불교와의 통합정책 때문에 “승려들도 결혼하라”는 압력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조종현 역시 결혼을 해 4남4녀를 낳았는데 조정래는 그중에 넷째였습니다. 조정래의 부친은 해방 후 죽을 뻔한 위기를 맞기도 했습니다.

    소설가 조정래와 그의 아내인 시인 김초희.

    토지 분배 문제를 놓고 당시 선암사 주지와 대립했는데 주지가 여순(麗順)반란 사건 때 조종현이 좌익이라고 모함해 죽을 뻔 한 것이지요. 이 대목은 소설 속에 법일 스님이 지주의 착취로 가난한 소작농 편을 들다 고초를 겪는다는 이야기로 나옵니다.

    조정래는 1949년 순천 남국민학교에 입학한 후 충남 논산으로 이사했는데 1년 뒤 6·25가 터지자 피난지에서 소작제의 모순을 알게됐다고 훗날 회고했습니다. 그가 벌교로 온 것은 1953년으로, 아버지 조종현이 벌교상고의 국어교사로 취직했기 때문입니다.

    광주 서중에 진학한 조정래는 1959년 서울로 와 역시 아버지가 근무하던 서울 보성고에 입학했습니다. 그는 원래 이과(理科)반이었는데 5·16이 터지자 국문과로 진학하겠다는 뜻을 세우고 1962년 동국대 국문과에 입학했습니다.

    1966년 대학 졸업 후 군에 입대한 그는 1967년 같은 대학 같은 과를 나온 시인 김초혜와 결혼한 뒤 동구여상 국어교사로 근무하던 1970년 월간 ‘현대문학’ 6월호에 단편 ‘누명’이 추천되면서 등단했습니다.

    소설가 조정래의 캐리커쳐다.

    그는 1972년 중경고로 전근했는데 정부를 비판한 작품이 문제가 돼 학교 교장과 마찰을 빚자 교직을 그만뒀습니다. 1973년 월간문학 편집장이 된 그는 1976년 포켓용 문예 월간지 ‘소설문예’를 인수해 1977년 10월호까지 발간했습니다.

    이때 연재를 맡은 집필진 중에 친일파 연구로 훗날 유명해진 임종국이 있습니다. 그는 원래 “직접 경험한 것을 소설로 써선 안된다”는 지론을 갖고있었지만 1980년 5월 광주사태가 일어나자 소신을 접고 소설 ‘태백산맥’을 집필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조정래는 좌익일까, 이런 의문을 가진 분이라면 조정래가 한 언론과 나눈 다음과 같은 말을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인용해봅니다. 그는 “북한의 현체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가장 비인간적인 체제입니다. 봉건주의가 무너진 이유는 비인간성 때문입니다. 봉건주의의 비인간성은 권력의 세습, 양반·상놈 차별하는 계급주의로 나타납니다. 그러한 비인간성 때문에 인간들은 봉건주의를 무너뜨리기 시작한 것 아닙니까? 거기에 대한 반동으로 민주주의와 사회주의가 나온 것인데 사회주의를 표방한 북쪽이 권력세습을 했으니 더 말하여 뭣하겠습니까. 다른 건 말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조정래는 미당(未堂) 서정주(徐廷柱·1915~2000)의 제자였지만 훗날 사제관계는 불화로 끝났습니다. 조정래가 ‘친일파 인명사전’을 만들 때 문학계의 친일 행각을 정리하는 데 중심 역할을 한거지요. 그는 한 매체를 통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서정주는 내 스승이자 내 아내를 등단시킨 사람이고 우리 결혼식 주례도 섰다. 하지만 작가적 삶에서 서정주와 황순원은 대조되는 인물이다. 미당이 친일시를 쓸 때 순원은 붓을 꺾었고 미당이 전두환을 칭송할 때 순원은 전두환이 폐간시킨 잡지의 복간을 위해 싸웠다. 미당은 (춘원) 이광수처럼 수십년에 걸쳐 비판받아 마땅하다. 미당이 내 아버지라도 그건 어쩔 수가 없다. 인간의 3대 발명품은 종교, 정치, 문학이다. 그중 문학은 인간을 위해 옳은 일만 하라고 발명한 것이지 불의와 타협하라고 발명한 게 아니다.” 어떻습니까, 그의 퍼런 서슬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저는 소설가 조정래를 만나보진 못했지만 또다른 대목에서 그의 인간됨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벌교읍 제석산 바로 밑에는 소설 태백산맥 문학관이 있고 그 옆에는 소화의 집, 현 부잣집 등의 건물이 복원돼있습니다. 태백산맥 문학관에는 이채로운게 있지요.

    소설 태백산맥 문학관 옆에 있는 현부잣집이다. 대문의 2층 누각이 위풍당당하다.
    본인이 쓴 육필 원고 외에 아들과 며느리가 200자 원고지 1만5700매를 그대로 베낀 것이 전시돼있는데 여기엔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즉 “내 사후(死後), 너희(아들과 며느리)들이 내 책을 멀고 살 것이니 태백산맥을 일일이 베껴라!”
    소설 태백산맥 문학관에는 조정래가 쓴 육필원고가 보존돼있다. 200자 원고지로 1만5700매로 웬만한 성인 키를 능가한다.

    놀랍게도 며느리는 한달여 만에 1만5700장을 모두 필사했습니다. 미심쩍은 조정래가 “혹시 대충 베낀게 아닌가”하고 일일이 검사했는데 원고는 한자의 틀림도 없었다는 저이요. 조정래는 지금도 컴퓨터 대신 펜으로 육필(肉筆)을 고집한다고 합니다.

    조정래가 우파 인사들을 무작정 비판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고(故)박태준 포철 명예회장을 1990년대 쓴 소설 ‘한강’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했으며 자신의 아동용 위인전집 15권 가운데 박태준을 신채호-김구-안중근-한용운과 동급반열에 올려놓았지요.

    박태준 역시 조정래를 좌파가 아닌 민족주의자, 그것도 투철한 민족주의자라고 평가했고 소설 ‘태백산맥’이 이적성(利敵性) 표현물 시비에 연루됐을 때 반대의견을 내기도 했습니다. 박태준은 조정래의 태백산맥 기념관 사업을 지원하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조정래의 박태준 인물평을 들어볼까요? “박태준이라는 인물은 한국사회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인물이에요. 우리 근현대사에서 그처럼 뒷모습이 깨끗한 기업인이 있었나요? 모르는 사람들은 박 회장을 개발독재의 주역이라고 말하지만 개발독재의 주역은 독재로 인해 권력을 누리고 그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독재를 행사한 사람들을 지칭하는 거예요. 박회장은 순수한 기업인일 뿐이었어요.”

     
    [다시 보기] 박정희의 과(過)에 박태준이 연루되지 않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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