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백산맥으로 다시 재조명 받은 벌교천 虹橋

  • 문갑식 월간조선 편집장 
  • 편집=최원철

    입력 : 2016.04.10 13:00

    [문갑식 기자의 기인이사(奇人異士)(45):벌교 홍교와 조정래의 태백산맥(上)]
     

    ‘뗏목을 엮어 만든 다리’를 벌교라고 합니다. 이 보통명사가 고유명사가 된 유일한 사례가 있습니다. 전남 순천시에 인접한 벌교읍(筏橋邑)입니다. 왜 시냇가의 뗏목 엮은 다리가 이곳의 지명이 됐는지를 알려면 읍을 관통하는 벌교 천을 가봐야 합니다.

    벌교 천은 상당히 육지 안쪽까지 바닷물과 민물이 교차한다고 하지요. 바로 그 지점에 무지개를 연상시키는 돌다리가 있습니다. 길이 27m, 높이 3m의 홍교(虹橋)입니다. 여기서 ‘홍’이라는 한문 자체가 ‘무지개’라는 뜻이라는 것을 유념해주시기 바랍니다.

     

    벌교천의 명물인 홍교(왼쪽)에 현대식 석조다리를 이어붙여놨다.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304호로 지정된 이 홍교와 비슷한 다리가 인근에 있습니다. 순천시 승주읍 선암사(仙巖寺)를 가본 분들은 이곳 명물 승선교(昇仙橋)가 벌교의 홍교와 흡사하다는 사실을 알아챌 것입니다. 승선교 역시 보물 400호로 지정됐지요.

    벌교는 숙종 44년인 1718년, 뗏목다리 형태로 건설됐습니다. 그런 다리가 10년 뒤인 1728년, 전남을 덥친 대홍수로 무너졌습니다. 백성들이 고생을 한다는 소식을 접한 선암사의 초안선사(楚安禪師)는 1년 후 돌다리를 세워주기로 마음먹지요.

    돌다리는 1734년 완공됐는데 지금같은 세칸의 무지개 형태가 된 것은 4년 뒤인 1737년이라고 합니다. 지금은 세칸의 무지개 형태 홍교에 화강암으로 만든 새 돌다리가 덧붙여져있습니다. 이것들은 1981년부터 1984년까지 보수공사를 하며 만든 것들입니다.

    벌교에는 이외에도 몇 개의 다리가 있습니다. 지금도 기차가 다니는 철교가 바닷가쪽으로 있고 내륙쪽으로 소화다리, 홍교가 있지요. 그중에서 소화다리는 예전 좌우대립 때 벌교천으로 떨어진 시체가 바닷물에 쓸려갔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있습니다.

    벌교천을 가로지르는 소화다리다. 좌우대립이 심할 때 사람들은 주검을 소화천 아래로 버렸다. 썰물 때면 죽은이들의 검정고무신만 남고 시체는 바다로 떠내려갔다고한다.

    그런 이 홍교가 다시 유명해진 계기가 있습니다. 1980년대를 대표하는 소설 ‘태백산맥’ 때문입니다. 소설 ‘태백산맥’은 1983년 9월 월간 ‘현대문학’에 연재되기 시작한 전 10권짜리 전집으로 원고량이 200자 원고지 1만5700매나 되는 대작입니다.

    말이 1만5700장이지 글로 먹고사는 저로서도 이러한 분량은 놀랍습니다. 제가 최근에 낸 ‘여행자의 인문학’(도서출판 다산3.0) 역시 700매를 약간 웃도는 수준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조정래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1959년 서울에 올라와 1960년대 후반까지 수도가 없는 성북동 산동네에서 살았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대학 4년 졸업하고 군대 가기 전까지 7년 동안 물지게를 졌습니다. 엄동설한에 눈이 내린 날은 물 길러 가기가 정말 싫습니다. 추운 날 산동네 비탈길을 물지게를 짊어지고 올라오는 일이 보통 지겹고 힘든 게 아니에요. 이불 속에서 꾸물꾸물하다가 한 10분 지나버리면 30∼40명이 줄을 서요. 게으름을 떨치고 빨리 일어나면 가장 먼저 도착해서 금방 물을 담아 돌아올 수 있어요. 인생이 별것 아닙니다. 남들보다 5분 빠르게 움직여 부지런을 떨면 항상 내가 앞에 갈 수 있다는 깨달음을 물지게질을 통해 얻었습니다.”

    저는 이 소설을 대학생 때 읽었는데 지금도 당시 느꼈던 흥분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소설은 일제의 식민통치에서 해방된 한반도에서도 남쪽의 벌교읍을 무대로 펼쳐지는 좌우파 간의 사상대립을 그렸습니다. 줄거리를 잠깐 요약해볼까요.

    소설의 초반부는 숯장수 염서방의 아들인 염상진이 민중을 착취하던 지역유지를 처형하는 등 좌파 기질을 보이며 시작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염상진의 동생인 건달 염상구는 빨갱이라면 물불을 가리지않는 우파 청년단의 중심 인물로 그려집니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은 대개 좌파입니다. 초등학교 교사출신의 이지숙은 야학교사로 계급투쟁 의식을 고취시키고 염상진은 남로당 보성군당 위원장으로, 하대치는 그의 동조자로 나옵니다. 반면 계엄군 사령관으론 심재모 중위가 나오지요.

    이들이 대립하는 가운데 6·25가 터지고 염상진은 빨치산 투쟁을 전개하지만 토벌대에게 포위돼 비참한 최후를 맞습니다. 반면 김범우는 민족의 단합을 강조하는 중도 지식인으로 극좌파 염상진과 극우파 선우진 두쪽에서 모두 공격을 받게 됩니다.

    벌교천의 명물인 홍교를 건너면 왼쪽편으로 김범우의 집이 보인다.

    일제 강점기에 학병으로 징집됐다가 버마에서 탈출해 미군 정보기관 OSS에서 훈련받은 김범우는 귀국 후 미국 통역, 순천중학 교사, 남로당 공작원 등 다양한 행로(行路)를 걷다가 6·25 때 미군에게 포로로 붙잡힌 뒤 반공 포로로 석방됩니다.

    아마 영화 ‘태백산맥’을 보신 분이라면 안성기가 맡은 김범우 역할이 생각날 것입니다. 소설 속 김범우의 집은 지금도 벌교천 홍교 맞은편 언덕에 보존돼 있습니다. 김범우의 부친은 김사용으로 다른 지주들과 달리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인물이었습니다.

    김범우의 집 현관이다. 대낮인데도 괴괴한 느낌이 든다.
    심지어 염상진마저도 김사용을 계급과 서열 때문이 아니라 진정 존경할만하다고 해 ‘어르신’이라고 부르지요. 그는 일제시대 막대한 재산을 독립운동에 썼으며 그 스스로는 검소한 생활을 했습니다. 그런 이 집은 지금 거의 폐허처럼 방치돼있었습니다.
    김범우의 집 마당이다. 지금은 방치돼있다.

    저는 감히 20세기 한국을 대표하는 소설로 홍명희의 ‘임꺽정’, 황석영의 ‘장길산’과 함께 조정래의 ‘태백산맥’을 꼽습니다. 박경리 선생의 ‘토지’나 이문열의 ‘변경’ 등도 대단하지만 제게 끼친 영향은 이 세명의 소설가가 더 컸다고 생각합니다. <中편에 계속>

    Photo by 이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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