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현우의 인간 正讀

"데뷔 44년 만에 첫 콘서트… 다들 와서 저 좀 봐주세요"

혜성처럼 나타나 70年代 한국 가요계를 휩쓸고 돌연 은퇴를 선언했던 그녀 정미조,
유럽에서 어렵게 苦學한 생활이 녹아든 신곡 '귀로'와 함께 돌아왔다.
가수에서 화가로 또다시 가수로 복귀한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입력 : 2016.03.26 08:17

    [37년 만에 새 앨범 발표… 가수로 돌아온 정미조(下)]
     

    <上편에서 계속>

    정미조는 총 13장의 LP를 발매했었다. 당시 녹음 기술은 반주와 노래 단 두 트랙으로 이뤄져 있었고, 노래를 잘 못 부르면 처음부터 다시 녹음해야 하는 수준이었다. 기술이 완전히 디지털화한 지금은 노래를 음 단위로 쪼개 이어 붙일 수도 있다. 그런 환경에 익숙지 않았던 정미조는 여전히 '녹음 스트레스'를 받았던 것이다.

    "정말 녹음 환경이 이렇게 좋아졌나 싶었어요. 뮤지션들도 최고였고요. 제 노래에 클라리넷·반도네온·비브라폰까지 반주를 맞춰줬는데, 내가 떠난 사이 한국에도 이런 연주자들이 있었구나 해서 정말 신이 났어요. 노래하고 맘에 안 드는 부분만 따로 녹음할 수 있다고 해서 마음 편하게 한번 불렀더니 '아, 좋습니다. 됐습니다' 하기에 깜짝 놀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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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미조는 은퇴를 준비하던 1978년 동경국제가요제에 한국 대표로 참가해 최우수가창상을 받았다(왼쪽 위), 패션디자이너 앙드레 김은 정미조의 모든 무대의상을 협찬했고 정미조는 그의 패션쇼에 서기도 했다(왼쪽 아래), 파리 유학 시절 전시회에 출품해 수상한 작품 앞에 선 정미조. /정미조 제공

    자기 이야기 같은 신곡 가사,
    노래 연습하며 눈물 훔쳐

    정미조는 신곡 '귀로'를 연습하면서 울컥한 마음에 눈시울을 적셨다고 했다. "담벼락에 기대 울던 작은 아이/…/ 무지개가 뜨는 언덕을 찾아/ 넓은 세상 멀리 헤매 다녔네/…/ 나 그리운 그곳에 간다네/ 먼 길을 돌아 처음으로" 하는 가사의 노래다. "그림 공부 한다고 파리에서 13년간 고독을 이겼잖아요. 돌아오자마자 교수로 또 22년…. 그런데 결국 노래로 돌아간 거죠. 세상을 헤매다니다가 다시 돌아왔어요. 어떻게 가사가 딱 내 이야기인가 해서 울컥했어요."

    ―노래 잘한다는 이야기를 언제부터 들었습니까.

    "고등학교(배화여고) 때 합창부를 했는데 선생님이 무슨 콩쿠르가 있다고 1주일밖에 안 남았는데 나가 보라는 거예요. 그때 1주일 연습하고 나가서 1등을 했어요. 그때 '내가 노래를 잘하나 보다' 하는 생각을 처음 했죠."

    ―패티김씨가 자기 쇼에 나오라고 할 때 학칙을 어기고 나갈 생각은 없었습니까.

    "저는 학구열이 굉장히 강한 학생이었어요. 맨날 교실 맨 앞자리에 앉아서 수업을 들었죠. 학칙을 어기면서까지 그러고 싶지는 않았어요."

    가수 정미조가 그녀의 작업실에서 복귀소식과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설명하는 모습. /이진한 기자

    같은 노래만 부르는
    자신을 발견하자
    미술 유학을 결심해

    신곡 '귀로' 가사가 내 이야기같아 울컥

    1969년 당시 KBS TV의 '패티김쇼'는 매주 토요일 9시 뉴스 직후 방송되던 최고의 인기 프로그램이었다. 패티김이 사회를 보고 게스트를 초청해 노래와 대화를 하는 쇼였다. 정미조가 프로 데뷔하던 1972년에는 '쇼쇼쇼'가 그 인기를 물려받고 있었다.

    ―음반을 들어 보니 목소리가 거의 상하지 않았더군요.

    "글쎄, 저도 신기해요. 여태껏 쓰지 않아서 그런게 아닌가 생각할 뿐이죠. 37년간 잠자던 목소리를 어느 날 깨워서 불렀더니 쓸 만한 모양이에요."

    정미조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나의 노래방 애창곡"이라며 이미자의 '사랑했는데' 첫 소절을 불러 보였다. "사랑했는데/ 서로가 좋아서/ 아아아아아/ 사랑했는데…" 반주 없이 즉석에서 불렀는데도 특유의 탁성(濁聲)이 깊은 호흡에 실려 작은 공명(共鳴)을 일으켰다.

    ―패티김씨의 칭찬이 가수 데뷔할 용기를 줬습니까.

    "그런 생각은 없었어요. 스타가 되겠다, 돈을 많이 벌겠다는 생각이 없었어요. 그냥 제대로 된 밴드 반주에 드레스를 입고 마이크로 노래하니까 신났어요. 그래서 '한 3년만 하자' 하다가 그게 5년 되고 7년 된 거죠." 작고한 디자이너 앙드레 김과 친밀했던 정미조의 전성기 의상은 모두 앙드레 김 드레스였다.

    ―그런데 왜 갑자기 노래를 그만뒀습니까.

    "5년 정도 가수를 했을 때 '이제 미술 유학을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맨날 똑같은 노래를 부르고 있는 걸 보니 '이제 떠날 때가 된 모양이다' 하고 생각했어요. 그때부터 학원에 나가 불어를 배우기 시작했죠. 그런데 이듬해 동경국제가요제에 한국 대표로 나가서 최우수상을 받은 거예요. 그래서 그다음 해까지 노래하다가 9월 말에 고별쇼를 한 거죠."

    ―어려서부터 그림도 잘 그렸습니까.

    "제 어릴 때 꿈은 무용가였어요. 중학교 때까지 발레와 고전무용, 체조를 했어요. 저는 노래도 좋아하고 그림도 좋아하고 춤도 좋아했지만, 어려서 제일 좋아했던 건 춤이었어요."

    정미조의 부친은 1950년대 김포에서 양조장과 극장을 운영했던 부자였다. 집 근처에 양조장이 있었는데 "어른이 들어갈 만큼 큰 독이 끝도 없이 놓여 있었다"고 했다. 영화와 쇼를 동시에 할 수 있었던 '우파래 극장' 영사실에서 정미조는 엘비스 프레슬리가 출연하는 청소년 관람불가 영화를 수도 없이 봤다고 했다.

    정미조의 대표 미술작품 '파리야경'. /정미조 제공

    苦學한 파리유학,
    당시는 괴롭지만
    몸에 밴 절약생활 결과

    "鄭美朝는 '아름다운 아침의 나라'"

    ―정미조(鄭美朝)는 본명입니까.

    "본명이에요. '아름다운 아침의 나라'라는 뜻이죠. 프랑스 유학 할 때 그곳 친구들에게 내 이름 뜻을 알려주면 다들 너무 아름답다고 좋아했죠."

    가수 시절 정미조는 서울 반포 주공아파트에 살았다. 그때 4층 옆집에 이규태(1933~2006) 전 조선일보 논설고문이 살았다. 술을 유난히 좋아했던 이 전 고문은 정미조 부친의 양조장에서 빚은 술을 무척 좋아했다고 한다. "그분 생각하면 머리가 곱슬곱슬하고 발소리가 유난히 컸던 게 기억나요. 저희 아버지가 드린 막걸리를 맛있다며 마냥 드시던 모습도 기억나고요."

    ―그렇게 부잣집 딸이었지만 파리에서는 고학(苦學)을 했다던데요.

    "저는 어려서부터 자립심이 강했어요. 아버지도 제가 학비를 부탁드리면 거저 주지 않고 꼭 빌려주셨어요. 그걸 반드시 갚아야 했고요. 부자였지만 절약이 몸에 배서, 지금도 휴지 한 장 함부로 쓰지 않아요."

    ―유학 기간은 왜 그렇게 길었습니까.

    "이화여대 학위로 아르데코라는 미술학교를 들어갔어요. 거기 학위 받고 전문가 과정 2년 거치고 논문 쓰고 파리7대학에서 박사 코스까지 밟다 보니 13년이 걸린 거죠. 파리7대학 박사논문은 일반인 방청객 앞에서 심사를 받아요. 580페이지짜리 논문이었지요."

    ―가수로는 유명했었지만 화가로는 덜 유명했죠.

    "글쎄요. 노래는 사람들이 그때 좋아하던 코드와 딱 맞아떨어졌었나 봐요. 그래도 제 그림이 인정 받아서 국제전에 나가 상도 받고 파리의 비평가 초대전도 하고 개인전에서 팔리기도 했고…. 그렇게 유명한 작가가 되지는 못했지만요."

    ―지금 와서 보면 애초 노래에 더 재능이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까.

    "어머 그렇구나, 하고 생각할 때도 있죠. 그렇지만 오랫동안 그림 공부를 하고 학생들 가르친 걸 후회하지는 않아요. 다만 저의 인생을 노래로 결산하게 되는구나 하는 생각은 해요. 다시 노래한다고 했을 때 제 가족들이 '그냥 점잖게 그림 그리고 여행 다니고 하지 무슨 노래를 하려고 하느냐' 했는데 다시 노래를 하고 무대에서 춤을 출 생각을 하니까 너무 행복해요. 정말 저는 젊어졌어요! 그래서 행복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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