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아비밤콩, 앉은뱅이밀 토종 씨앗 찾아 30년… 종자는 곧 國力이다"

    입력 : 2016.03.22 15:35

    [더 나은 미래:토종씨드림 대표 안완식 박사]
     

    "수년간 분홍 감자를 찾아다녔습니다. 수분이 많고 쫄깃한 맛이 일품인 토종 작물이죠. 혼자 힘으로 부족해 수집 단원들과 아내까지 팔을 걷어붙였지만 좀처럼 구할 수가 없었어요. 감자는 곡식과 달라서 매년 한 알이라도 심지 않으면 보존이 어렵거든요. 미국·일본산 감자가 농가를 장악하면서 분홍 감자를 키우는 농가가 완전히 사라져버린 것 같았죠. 2008년,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찾아보자고 강화도에 갔는데 이상하게 한 집이 끌리더군요. 툇마루에 앉아 있는 할머니께 대뜸 '분홍 감자 좀 보여주세요' 했더니 소쿠리 한가득 갖고 나오시는 게 아니겠어요. 기쁨을 참지 못하고 할머니를 얼싸안았습니다(웃음). 그렇게 받은 분홍 감자를 시험장에도 보내고, 농가에도 나눠주며 다시 살려냈죠."

    안완식 박사. /토종씨드림 제공

    토종 종자 찾아 30年
    한 품종에 수년씩 들여 찾기도

    지난 30여년간 산과 들을 누벼온 '토종 종자의 아버지'가 있다. 비영리단체 '토종씨드림'의 대표인 안완식(74·사진) 농학박사가 그 주인공이다. 1969년 농촌진흥청에 입사한 안 박사는 강보리, 조광, 그루밀 등 보리와 밀 품종을 육종하다 1985년부터 본격적으로 유전자원 관리에 투입됐다.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전국에 흩어져 있는 농촌지도사 7000여명을 교육해 토종 종자를 수집하는 것이었다.

    안완식 박사가 직접 수집한 토종 작물들. /토종씨드림 제공

    수익성 높은 품종보다
    토종 종자의 중요성을 바라봐

    종자 시장은
    '총성 없는 전쟁'

    "당시 미국, 러시아, 일본 등에서는 이미 공격적으로 종자를 수집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수수꽃다리, 구상나무를 개량해 큰 수익을 벌어들인 사례도 있었죠. 일각에서는 수익성이 높은 품종 개발에 집중하는 게 더 효율적이라고 했지만 제 생각은 달랐습니다. 우리 땅에 맞는 토종 종자를 많이 갖고 있어야 우수한 품종도 개량할 수 있고, 종자 주권도 지킬 수 있는 것 아니겠어요? 종자 수집을 시작한 첫해에만 1700여개 농촌지도소에서 5000여점이 넘는 토종 씨앗을 모았습니다. 처음에는 작은 저장고로 시작했지만 1988년에는 어엿한 종자은행(농업유전자원센터)도 세웠죠."

    농촌지도사들과 함께 안 박사 역시 직접 종자 수집에 뛰어들었다. 깊은 산골이며 농가를 발로 뛰다 보니 웃지 못할 에피소드도 겪었다. 파주에서는 간첩이라는 오해를 받아 경찰에 잡혀가기도 하고, 강원도 산길을 6시간이나 헤매는 아찔한 순간도 있었다. 미국 일리노이대학 연구실에 보관돼 있던 우리 콩 2000여점을 반환받았고, 러시아 바빌로프 연구소로부터 참외 800종을 받아 한국에 들여오기도 했다. 그가 이렇게까지 토종 작물 확보에 힘을 쏟은 이유는 무엇일까. 안 박사는 1845년부터 7년간 아일랜드를 덮쳤던 대기근을 예로 들며 '종 다양성'의 힘을 역설했다.

    "당시 아일랜드 농가 대부분이 한 가지 품종의 감자를 재배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감자에 치명적인 곰팡이병이 번지면서 100만명이 굶어 죽는 사태가 발생했죠. 마을마다 각기 다른 품종의 감자를 심었다면 그 정도의 피해는 없었을지 모릅니다. 1970년대 한국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있었습니다. 쌀 자급을 위해 노풍·내경벼를 대대적으로 심었다가 변종 도열병이 돌면서 30만 농가가 피해를 입은 사건이죠. 당장 병충해에 강하고 재배가 쉬운 품종, 맛 좋고 굵은 열매를 맺는 품종이라 할지라도 한 가지 작물에만 의존하면 변수가 발생했을 때 막기가 어렵습니다."

    토종 종자 확보가 중요한 이유는 이뿐만이 아니다. 청과·채소 시장을 점유하고 있는 품종은 대부분 글로벌 종자회사에서 판매하는 F1(우수한 종자를 교배해 만든 잡종 1세대)으로, 씨를 받아 심어도 원래만큼 우수한 품질을 갖추기 어렵다. 아예 발아 능력을 없앤 불임 종자를 판매하기도 한다. 종자를 갖지 못한 농부는 매년 업체에서 가격을 올리는 대로 값을 치를 수밖에 없고, 이는 곧 식량과 작물에 대한 주권 상실로 이어진다. 글로벌 종자회사 몬산토에서 판매하는 목화씨에 생산량의 90% 이상을 의존하고 있는 인도가 종자 가격 정상화를 위해 분투하는 모습은 실로 '총성 없는 전쟁'을 방불케 한다.

    농촌진흥청을 퇴직한 안 박사는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고자 2008년 비영리단체 토종씨드림을 설립했다. 전국 농가에 흩어진 토종 종자를 찾아 육종하고, 농부들에게 나눠주기 위해서다. 1년에 최소 3번, 약 1만여 점의 작물이 활발히 교환되고 있다.

    2013년 농업유전자자원관리기관으로 지정된 토종씨드림은 제주, 울릉, 강화, 괴산, 진주 등 14개 도시를 돌며 지금까지 약 3500여종의 토종 작물을 수집했다. 안 박사는 "농촌진흥청에 있을 당시, 수집한 종자가 얼마나 남아 있나 보려고 8년마다 재조사를 했는데 고작 26%의 종자만 남아 있었다"면서 "종자가 농부의 손을 떠나면 2~3년 안에 소멸되는 만큼 우리 농가가 좀 더 다양한 토종 작물을 재배하도록 돕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종자는 하나의 우주입니다" 안완식(오른쪽에서 둘째) 박사가 토종씨드림 회원들과 함께 작물 수집에 나서기 전 촬영한 기념사진. /토종씨드림 제공

    "회원들의 봉사와 용인시 등 일부 지자체의 도움 덕분에 지금까지 단체를 운영할 수 있었지만,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습니다. 토종 작물을 연구하고 나누려면 종자를 키울 땅이 필요한데, 안타깝게도 지금은 안정된 공간이 없거든요. 4500여종의 씨앗을 보관 중인 토종씨드림의 종자은행 역시 수원, 용인 등 잠시라도 땅을 빌려주겠다고 하는 곳이 생기면 이전하기 급급한 형편입니다. 매주 2박3일은 토종 종자 수집을 위해 지방을 돌아야 하는데 상근인력이 저 한 명이다 보니 사람도 부족하고요.

    토종씨드림뿐만이 아닙니다. 정부가 토종 종자 보존과 종자 개발을 위해 향후 10년간 국고 약 5000억원을 투자하는 '골든씨드 프로젝트'를 시작했는데, 글로벌 종자회사의 1년 연구비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죠. 토종 종자와 종 다양성에 대한 관심이 절실합니다."

    토종씨앗수집단의 활동 영상. /씨드림토종학교 유튜브 채널

    정부의 10년 투자계획 액수는
    海外 종자회사 1년 연구비도 안돼

    안 박사는 현재 한국 '맛의 방주' 생물다양성위원회 위원장으로도 활동 중이다. 맛의 방주란 소멸 위기에 처한 지역의 식용 동·식물 및 가공식품을 등재함으로써 전통 음식 문화 보존을 꾀하는 슬로푸드 국제본부 주관 프로젝트다. 우리나라도 2013년부터 구수한 맛이 일품인 진주 앉은뱅이밀, 동치미로 만들면 3년간 먹을 수 있다는 이천 게걸무 등 60여 가지 먹거리를 등재했다. 안 박사는 "맛의 방주는 전통 식문화를 보존하기 위한 프로젝트지만 그 속에는 음식의 재료인 고유 종자를 보존해야 한다는 뜻이 숨어 있다"고 말했다.

    "잊혀가던 토종 작물이 맛의 방주에 등재되면서 생산자협동조합도 생기고, 새로 제품도 개발되는 등 이목을 끌고 있습니다. 최근 등재된 황녹두는 이미 소실된 것을 농민이 직접 나서 다시 키워낸 사례죠. 우리 아이들이 이 풍부한 맛을 같이 느낄 수 있도록 남은 평생도 토종 종자에 쏟을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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