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보식이 만난 사람

생명이 끝나도 日本으로 가겠다는 할머니, 초밥보다 된장찌개 익숙해

    입력 : 2016.03.14 13:55

    [역사의 그늘에 묻힌 '芙蓉會 할머니들'… 송미호 나자레원 원장(下)]
     

    <上편에서 계속>

    그 할머니의 호적을 찾아보니 '사망'으로 돼 있었다. 다른 여성과 재혼한 한국 남편이 그녀를 사망신고 해버린 것이다. 일본 가족을 가까스로 찾았지만 '우리 집안에서 죽은 사람'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 할머니는 법적으로 양국(兩國)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은 거죠. 당시 일본의 나카소네 총리까지 나선 덕분에 '수화물'로 비밀리에 내보냈어요. 그 뒤로 여기 살던 할머니 중 7명이 일본 호적을 취득할 수 있었어요."

    ―그분의 스토리는 해피엔딩입니까?

    "147번째 할머니는 일본 아오모리 양로원에 들어갔어요. 거기서 일본 국적을 취득했어요. 1년 반 뒤 일본 TV에서 그 스토리를 제작하기 위해 여기로 다시 왔어요. 방송 스태프와 양로원 직원과 함께요. 그런데 촬영이 끝나고 돌아가기 전날 할머니는 '일본에서 너무 괴롭다. 여기에 다시 살고 싶다. 나는 안 돌아가겠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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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미호 원장은 사진 찍히기를 원치 않았다.

    고대하던 日 귀국한지
    일년 반 後,

    "나자레원에 다시
    오고 싶어"

    "나의 조국은 냉정했다"

    ―순간적인 감정이 아니었을까요?

    "한국에서 30~40년간 살았기에 그쪽에서 적응을 못 했어요. 입맛도 김치와 된장찌개에 익숙해졌지요. 자기가 동물원에 갇힌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는 거예요. 아사히신문에서는 일본에 되돌아갔던 이런 할머니들의 육성(肉聲)으로 '나의 조국은 냉정했다'라고 보도했어요."

    ―안 돌아가겠다는 147번 할머니는 어떻게 됐습니까?

    "할머니에게 '다시 오실 수 있도록 해보겠다'며 겨우 달래 보냈습니다. 할머니는 떠나는 차창을 통해 '원장님 제발 제발'이라고 외쳤어요. (눈물을 글썽거리며) 그때 처음으로 내가 빈말을 했어요. 최선을 다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부용회(芙蓉會)' 친목 모임은 어떻게 만들어진 건가요?

    "1960년대에 들어서 이분들은 자신과 비슷한 처지가 있다는 걸 알게 된 거죠. 서울·대구·부산·목포 등 전국 도시마다 모임이 있었어요. 한때 서울에는 전국 회원들이 회비를 내서 구입한 '부용회' 건물이 있었어요. 갈 데 없는 할머니들이 거기서 합숙을 했어요."

    ―부산에는 아직도 부용회 모임을 한다고 들었습니다.

    "지금은 두 분만 남아 있을 겁니다. 회장인 구니다 후사코씨가 102살이 됐어요. 몇 년 전 '대구부용회 50년 행사'를 한 적이 있어요. 그때 일본에서 무용단이 오고, 주한 일본 대사관의 공사가 참석했어요. 그게 마지막 행사였어요. 대구부용회를 이끌던 회장은 재작년 우리 시설로 들어왔어요. 약간 치매 증세가 있어요."

    ―나자레원은 부용회와 연결돼 있었군요.

    "문제가 생기면 우리 쪽에 연락이 왔어요. 형편이 몹시 어려운 부용회 회원들에게 약간의 돈을 부쳐주기도 했어요. 서울 회원들을 여기로 초청한 적도 있었고요. 이제는 다들 병석에 있거나 저세상으로 떠났어요."

    1999년 9월, 재일 한국인 2세 권희로씨가 나자레원을 찾아 일본인 할머니들과 악수를 나누고 있는 모습. /조선일보 DB

    할머니들의 불행은
    시대적 환경의 산물

    "일본보다 이곳이
    고향이자 터전"

    ―이들 할머니의 불행에 대한 책임은 어디에 있다고 봅니까?

    "시대적 환경의 산물이었지요."

    ―이들은 결코 전쟁의 가담자가 아니었지요. 그런데도 당시 우리 사회와 남자들이 박해한 것이지요. '일본은 가해자'라는 명분 논리 때문에 드러내기 어려웠던 우리의 치부(恥部)였습니다.

    "일본인들은 '내 동포가 불쌍하게 살 것'이라는 생각으로 여기에 와봅니다. 하지만 좋은 시설을 보고 놀랍니다. 할머니들에게 '일본에 안 가겠느냐?'고 물으면 '여기가 고향이고 내 터전'이라고 답합니다. 아사히신문에서 '이곳이 천국(天國)'이라는 제목으로 보도됐어요. 일본 입장에서는 나자레원 설립자의 선친이 일제 강점기 때 독립운동을 하다가 옥사했다는 걸 알면 기가 막힐 겁니다. 하나님의 사랑에는 국경이 없다고 했어요. 이 할머니를 통해 일본에 한국의 사랑을 알리는 겁니다."

    ―일본에서 지원을 해줍니까?

    "알아서 도와주면 고맙지, 일본에 절대 구차한 소리를 하지 않아요. 일본 총영사관은 일본 호적을 가진 할머니에 대해 '긴급구호' 형식으로 개인당 얼마씩 줍니다. 나자레원 직원은 다섯 명인데, 저는 봉급이 없어요. 여기서 숙식하고 당직을 합니다. 경제적 여유가 없기에 할머니들이 병석에 누우면 제가 간호하고, 돌아가시면 제가 시신을 다 닦고 염까지 했어요."

    ―국내 주류 언론에서는 이 문제를 직시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위안부 할머니 문제와 연결이 안 됐으면 좋겠어요. 저는 이분들이 편안하게 지냈으면 합니다."

    나자레원 1층에서 휠체어에 앉아 TV를 보던 홋카이도 출신의 할머니는 96세였다. 일본어로 말했다.

    "가이큐주넨생(1920년생). 1957년부터 서울에서 혼자 살다가 2007년 들어왔지요. 남편은 전기기사였지. 나보다 일찍 죽었어요."

    2층 휴게실 겸 식당에는 세 명이 앉아서 10원짜리 동전을 쌓아놓고 화투를 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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