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만에 끝장난 백석과 자야의 열애

    입력 : 2016.03.10 04:46

    [문갑식 기자의 기인이사(奇人異士)(43):동주와 백석과 자야와 길상사와 자작나무(下)]
     

    <中편에서 계속>

    뜨거웠던 백석과 자야의 사랑은 3년만에 백석의 부모에 의해 끝장나고 말지요. 백석이 기생과 동거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백석의 부모가 1939년 충북 진천에서 한 처녀와 혼례를 올리게 한 것입니다. 그 처녀와 백석의 결혼은 머지않아 끝났습니다. 부모의 강요에 의해 혼인을 한 백석은 다시한번 자야에게 만주행을 권유했지만 자야는 자기가 백석의 인생에 걸림돌이 된다는 사실에 괴로워합니다. 백석은 1939년 만주 신경(지금의 장춘·長春)으로 떠나는데 이것이 영원한 이별이 되고 말았습니다.

    백석은 이후 고당 조만식 선생의 일을 돕다 1947년 북한 문학예술총동맹 중앙위원회의에서 외국문학문분과원이 됐으며 이후 파데예프의 ‘청년근위대’, 솔로호프의 ‘고요한 돈강’, 파블렌코의 ‘행복’ 등을 번역했다는 북한측 기록이 있습니다. 시는 1957년 평양신문에 ‘감자’ 등을 발표했지만 반동분자로 몰렸는지 1959년 양강도 삼수군에 있는 국영협동조합으로 하방(下放)돼 양치기 일을 하기도했지요. 1962년 일체의 창작활동을 중단한 그는 1995년 84세까지 살다 사망했습니다.

    백석이라는 인물에 대해선 여러가지 평이 가능한데 저는 한때 조선일보에서 같이 일했던 문학평론가 백철(1908~1985)의 평이 가장 정확하지않나 생각합니다. 그는 ‘1930년대 문단’이라는 글에서 백석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습니다.

    “백석에 대해 사내(社內)의 평판이 그리 호감적인 것은 아니었다. 누군가 내게 말한 것인데 ‘사람이 새파랗게 젊어가지고 도도하기만 하단 말이야. 원 그러면서 시를 쓴다는거야?’ 백석은 본시 성품이 모질지 않았다. 대신 결벽성이 심한데가 있었다?.”

    그런 백석을 보며 제가 생각한 것은 만주와 한반도 함경도 일대에 많이 자라는 자작나무였습니다. 백화(白樺)라고도 불리는 자작나무는 순결의 상징인데 의외로 백석은 자작나무를 소재로 한 시를 꽤 남겼습니다. ‘백화’라는 시를 감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백석이 떠돌았던 만주와 함경도 일대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자작나무 숲이 인제에도 있다.

    ‘산골집은 대들보도 기둥도 문살도 자작나무다

    밤이면 캥캥 여우가 우는 산도 자작나무다

    그 맛있는 메밀국수를 삶는 장작도 자작나무다

    그리고 감로같이 단샘이 솟는 박우물도 자작나무다

    산 너머는 평안도 땅도 뵈인다는 이 산골은 온통 자작나무다.’

    자작나무들은 속살을 벗어낸다. 나무의 흠들이 사람의 눈처럼 그것을 지켜보고있다.

    그러고보니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사랑했던 윤동주 역시 자작나무처럼 순결한 존재로 저에겐 비쳐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최근 강원도 인제에 다녀왔지요. 남한에서 유일하게 군락을 이루고 있는 인제 명품 자작나무 숲을 보고 싶었던 겁니다. 임도를 따라 1시간 정도 올라가야하는 인제 자작나무숲은 ‘인제국유림관리소’라고 네비게이션에 치면 되는데 경춘고속도로 동홍천IC를 빠져나와 인제쪽으로 가다보면 38선 휴게소 근처에 진입하는 길이 있지요. 시인 박인환 문학관 훨씬 못미쳐입니다. 이 숲 초입은 자작나무로 구성돼있다가 중턱부터는 자작나무가 보이지 않습니다. 정상부근에 가면 아랫쪽과 확연히 다른 자작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는데 하필 제가 갔을 때 백석의 표현처럼 ‘펄펄 눈이 나려’ 더욱 환상적인 자태를 감상했습니다.

    그렇다면 백석과 결별한 후 남한에 남은 진향, 즉 김영한은 어떻게 살았을까요. 김영한은 1951년 성북구 지금의 길상사가 있는 땅을 구입합니다. 원래 이곳은 일제시대 백인기의 별장으로 건물 3채가 들어서 있었으며 해방후에는 청암장으로 불렸습니다. 김영한은 당시로서는 거금 650만원을 주고 청암장을 인수한 뒤 요정으로 탈바꿈시켰지요. 이곳은 1970년대까지 부근의 삼청각, 우이동의 선운각과 함께 한국의 3대 요정으로 명성을 날렸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은 사라져버린 요정은 대체 뭐하는 곳이었을까요. 시인 고은이 쓴 다음의 시를 보면 요정이 뭔지를 알 수 있겠습니다. 참고로 저는 대원각이 길상사로 바뀌기 전 다녀온 적이 있는데 그때는 이미 요정이 아닌 고깃집으로 바뀐 후였지만 ‘대원각’의 명성을 들었기에 건물을 유심히 관찰한 적이 있지요.

    이 작은 건물들이 대원각 시절 손님들이 기생과 운우지정을 나누던 곳이다. 이 건물들은 대원각이 고깃집으로 바뀐 뒤 고기냄새로 찌들어있다 지금은 스님들이 거처하는 공간으로 변모했다.

    ‘70년대 성북동 대연각이라 우이동 삼청각이라

     아니 코밑의 청진동 장원이라

     거기 가면

     온통 번드르르르

     아리따운 연인의 치맛자락 방바닥을 쓸어가며

     교자상 가득히

     산해진미

     점심때라면 밥도 은수저로 떠 넣어주고

     그렇게 밥 먹고 나면

     야들야들한 손으로

     등때기 굳은 살 풀어주고

     슬슬 졸음 오는 척하면

     뒷방으로 모셔가

     그 침침한 방 요 위에 눕혀져

     졸음은커녕

     난데없는 운우의 정이 쏟아지니

     정아무개가 뒹군 방

     아무개가 뻗은 방

     박아무개

     김아무개가 늘어진 방

     이렇게 점심때

     대낮 주색 마치니

     퇴근 후에는

     영락없는 모범공직자 아니었던가

     그것으로도 모자라지만’

    삼청각-선운각과 함께 한국 3대 요정으로 불리던 대원각은 길상사로 바뀌었다.

    여하간 이렇게 돈을 모은 김영한은 북으로 간 백석을 잊지 못했는지 백석의 생일인 매년 7월1일이면 음식을 입에 대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곤 팔순을 바라보던 1987년 자신이 평생 애독하던 에세이 저자 고 법정(法頂)스님과 연락하게 되지요. 김영한씨는 김대도행(金大道行)이라는 분을 통해 미국 로스앤젤레스 고려사에서 법정스님을 처음 만난 자리에서 “아무 조건없이 대원각을 시주할 테니 절로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지만 법정스님은 “평생 주지도 맡아본 적이 없다”고 거절했습니다. 법정스님은 여러 번 사양했지만 1994년 ‘맑고 향기롭게 살아가기 운동’을 펴며 불교의 사회적 책무를 알리다 마침내 김영한씨의 청을 받아들입니다.

    폭설 내리던 날 극락전앞이다. 백석이 자야로 불렀던 김영한은 이렇게 눈내리던 날 이곳에 자신의 재를 뿌려달라고했다.

    1996년 마침내 대원각은 길상사로 이름을 바꾸는데 대지-임야가 7000여평, 시가 1000억원에 달했습니다. 이렇게 통큰 시주를 하고 김영한이 법정스님으로부터 받은 것은 염주 한벌과 길상화(吉祥華)라는 법명이었으니 아름다운 기부가 분명하지요. 여기서 여러분은 백석이 동경 아오야마학원 유학시절 머문 주소가 길상사였다는 그 우연을 다시 떠올려보시길 바랍니다.

    왼쪽 아래건물이 김영한씨가 거주하던 길상헌이다. 김씨의 유골은 눈 내리던 날 길상헌 뒷편에 뿌려졌다. 지금 그곳엔 김씨를 기리는 사당과 유골함이 서있다.

    1999년 김영한씨는 세상을 떠나며 화장을 한 뒤 첫눈이 길상사에 내리면 자신이 머물던 길상헌(지금의 길상사 입구에서 왼쪽 건물) 뒷편 계곡에 뿌려달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지금 길상헌 뒤에는 작은 사당과 김씨의 소박한 유골함과 ‘나와 나탸샤와 흰당나귀’가 적힌 김씨의 약력판이 서있습니다.

    요정을 절로 바꾼 법정스님도 2010년 여기서 입적했지요. 길상사 맨 윗쪽 진영각은 법정스님의 초상화를 모신 곳이며 진영각으로 들어가서 오른쪽 밭에는 법정스님의 유골함이 있습니다. 스님의 유골함은 송광사에도 있는데 재미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법정스님의 영정을 모신 진영각에는 작은 유골함도 있다.
    송광사의 옛 이름이 바로 길상사였다는 것입니다. 마침 3월11일은 법정스님이 입적한 날입니다. 길상사를 돌면 법정스님과 김영한씨의 인연, 그에 앞서 백석과 김영한의 사랑, 더 나아가 백석을 흠모한 윤동주가 생각날 것입니다.
    윤동주 문학관위로 올라가면 시인의 언덕이 나온다.
    서촌의 윤동주 하숙집에서 청운동 윤동주 문학관과 시인의 언덕을 거쳐 북악스카이웨이 건너 길상사까지는 걸어서 2시간이 채 안걸릴 것입니다. 다가오는 봄날, 이곳을 거닐며 우울했던 시절, 우리 문학계를 빛낸 찬란한 별들의 내면을 밟아보기를 권합니다.

     

    Photo by 이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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