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윤동주가 가장 흠모했던 시인은 백석

    입력 : 2016.03.10 04:45 | 수정 : 2016.03.10 14:32

    [문갑식 기자의 기인이사(奇人異士)(43):동주와 백석과 자야와 길상사와 자작나무(中)]
     

    <上편에서 계속>

    그런데 영화에도 나오다시피 시인 윤동주가 가장 흠모했던 시인이 있습니다. 오랜기간 잊혀졌다가 복권된 백석(白石·1912~1996)입니다. 윤동주는 연변에 살 때부터 다섯살 위인 백석의 시집 ‘사슴’을 읽은 뒤 그에게 빠져들었다고 합니다. 이후 윤동주는 시집 ‘사슴’을 옆에 끼고 살았으며 일본으로 유학갔을 때는 동생 일주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시집을 꼭 읽어보라”고 권하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백석과 윤동주는 과연 같은 시풍(詩風)을 지녔을까, 다음의 두 시를 감상해봅니다.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중략)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쓰 쨈’과 ‘도연명(陶淵明)’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이 시는 백석이 쓴 ‘흰 바람벽이 있어’의 구절들입니다. 1941년에 발표된 이 시를 두고 평론가들은 “고향을 떠난 인물의 내면을 통해 부정적 현실을 이겨내려는 내적 의지를 표현한 작품”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음은 윤동주의 ‘별헤는 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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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동주의 육필원고인 '별헤는 밤'이다. 글씨 모양을 보면 사람됨을 알 수 있겠다.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 합니다.

    가슴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오.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오.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않은 까닭입니다.

    별하나에 추억과

    별하나에 사랑과

    별하나에 쓸쓸함과

    별하나에 동경과

    별하나에 시와

    별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했든 아이들의 이름과,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애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도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슬이 멀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

    어떻습니까? 1941년 11월5일 연희전문학교 졸업을 앞두고 윤동주가 쓴 이 시는 1948년 정음사에서 간행된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등장하는데 서울 종로나 광화문의 어느 골목에서 두 시인이 마주친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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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동주 시인의 별헤는 밤 육필원고다. 글씨는 사람의 됨됨이를 보여준다.

    시인 백석의 고향은 평북 정주군 갈산면 익성동입니다. 정주 오산학교 설립자인 남강 이승훈 선생의 영향으로 기독교 세력이 강한 곳이지요. 백석은 부친이 37살, 모친이 24살 때 낳은 귀한 ‘손’이었다고 합니다. 어머니 이봉우는 유명한 분이었습니다. 서울에서 시집왔는데 음식 솜씨가 남달라 고당 조만식 선생이 오산학교 교장시절 그 하숙집에 기거했으며, 백석의 부친 백용삼은 고당, 계초 방응모 선생과도 친분이 두터웠다고 합니다. 어릴 적 ‘백기행’으로 불린 백석은 이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했겠지요.

    백석의 부친 백용삼은 개화기 사진계의 초창기 인물입니다. 동향인 계초 방응모 선생은 그런 그를 조선일보의 사진반장으로 채용하기도 했습니다. 훗날 백석이 조선일보를 통해 등단한 것이나 조선일보 기자를 지낸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겁니다. 백석은 1918년 평북 정주의 오산소학교에 입학했지만 학교는 1년뒤 일어난 3·1운동의 여파로 교실이 불타면서 1년6개월간 문을 닫아야했지요. 백석은 1924년 오산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는데 이때의 교장이 고당 조만식 선생이었습니다.

    백석이 경성(京城), 즉 지금의 서울을 처음 본 것은 1927년 수학여행 때라고 합니다. 그는 서울에 대해 “건건쩝쩔한 냄새가 나고 황혼녘 같은 서글픈 거리”라는 인상기를 남겼지요. 1929년 오산학교 졸업 후 백석은 가정형편 때문에 진학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1930년 1월5일 조선일보 신년현상문예(지금의 신춘문예)에 그가 쓴 단편 ‘그 모(母)와 아들’이 당선되면서 인생에 전기가 마련됩니다. 조선일보 부사장으로 있던 계초 방응모 선생이 일본 유학자금을 대준 것입니다.

    백석은 일본 아오야마(靑山)학원 영어사범과에 진학해 1학년 때는 영어, 2학년 때 프랑스어, 3학년 때 러시아어를 공부했습니다. 이때 세례도 받았고 ‘동경 길상사(吉祥寺) 1895번지’에 살았다는데 이 이름은 훗날 다시 등장하지요. 아오야마학원에서 교사 자격증을 취득한 백석은 학교로 가는 대신 조선일보 출판부에 입사합니다. 1934년 4월의 일이었습니다. 여기서 백석은 잡지 ‘여성’의 편집업무를 하는 한편, 조선일보 지면에 러시아 작가 안톤 체홉의 단편을 번역 발표했습니다. 백석은 1935년 8월 시 ‘정주성’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인의 길을 걷습니다. 그의 일생에서 기념비적인 시 ‘정주성(定州城)’은 유년시절의 기억을 방언으로 표현한 것인데 감상해봅니다.

    ‘산턱 원두막은 비었나 불빛이 외롭다.

    헝겊심지에 아주까리 기름의 쪼는듯한 소리가 들리는듯하다.

    잠자리 조울든 무너진 성(城)터

    반딧불이 난다 파란 혼(魂)들 같다

    어데서 말 있는듯이 크다란 산(山)새 한마리 어두운 골짜기로 난다

    헐리다 남은 성문이

    한울빛같이 훤하다

    날이 밝으면 또 메기수염의 늙은이가 청배를 팔러 올 것이다.’

    영화 ‘동주’에도 등장한 백석의 첫 시집 ‘사슴’이 나온 것은 1936년 1월20일입니다. 100부 한정판으로 나온 ‘사슴’은 당시 시인이 되기를 꿈꾸던 문학청년들이 서로 돌려보면서 시집을 통째로 암기했다고 합니다. 대표적인 시 ‘여승(女僧)’을 봅니다.

    최근 초판본 그대로 복각돼 출판된 윤동주의 시집은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랐다.

    ‘여승은 합장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옛날같이 늙었다

    나는 불경처럼 서러워졌다

    평안도의 어느 산 깊은 금덤판

    나는 파리한 여인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여인은 나어린 딸아이를 따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년이 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않고

    어린 딸은 도라지 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산 꿩도 설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산 절의 마당귀에 여인의 머리오리가 눈물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

    어떻습니까, 비록 북한작가였지만 그가 시인들이 뽑은 ‘한국의 대표시인’의 반열에 당당히 오른 이유를 알 수 있지 않습니까? 백석의 삶은 시 못지않게 여러 여인들과의 로맨스로 유명한데 그 첫번째는 친구의 혼인 축하자리에서 처음 본 박경련이었습니다. 백석은 생애 통틀어 세번 경남 통영에 갔으며 시를 남겼는데 첫번째 통영행은 1935년 6월, 친구 허준의 혼인축하 회식자리였다고 합니다. 그때 남긴 시 ‘통영’에는 박경련이라는 여인이 ‘천희(千姬)’라는 이름으로 등장하지요.

    시인 윤동주가 사망한 뒤 1948년 발간된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다.

    ‘옛날엔 통제사가 있었다는 낡은 항구의 처녀들에겐 옛날이 가지않은 천희라는 이름이 많다

    미역오리같이 말라서 굴껍질처럼 말없이 사랑하다 죽는다는

    이 천희의 하나를 나는 어느 오랜 객주집의 생선가시가 있는 마루방에서 만났다

    저문 유열의 바닷가에선 조개도 울을 저녁 소라방등이 붉으레한 마당에 김냄새 나는 비가 나렸다.’ 

    백석은 이후로도 두번 통영에 가 시를 남겼는데 이번에는 박경련이 ‘난(蘭)’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지요. 백석은 1936년 조선일보를 그만두고 함흥 영생고보 영어교사로 옮겼습니다. 그가 사랑했던 난은 절친했던 친구 신현중과 1937년 혼인하지요. 하필이면 신현중은 백석이 난을 향한 사랑의 열병을 앓고 있으면서 통영에 갈 때마다 동행했던 친구였습니다. 실연의 아픔을 달랠 시기 이번에는 김영한(1916~1999)이라는 여인이 백석의 앞에 등장합니다. 김영한에 대해 잠시 살펴봅니다.

    서울 관철동에서 태어난 김영한은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16살 때 조선 권번, 즉 기생조합에 들어갑니다. 어머니와 할머니가 근근이 이어가던 생활이 금광을 한다는 친척 때문에 풍비박산나면서 기생의 길로 밀어넣은 것인데 기명은 진향(眞香)이었습니다. 그는 정악계(正樂界)의 대부 하규일 문하로 들어가 창가곡, 궁중무를 배우는 한편, 잡지 ‘삼천리문학’에 수필을 발표할만큼 재능이 많았습니다. 김영한이 백석을 만난 것은 자신의 일본 유학을 주선해준 신윤국이 함흥 감옥에 투옥됐기 때문입니다. 신윤국을 면회갔다가 만나지 못하자 함흥권번에 주저앉은 김영한은 우연히 영생고보 교사들의 회식장소였던 함흥관에 갔다가 운명적으로 백석을 만나지요. 백석은 옆자리에 앉은 김영한의 손을 잡고 이렇게 속삭였다고 합니다.

    “오늘부터 당신은 나의 영원한 마누라야. 죽기 전엔 우리 사이에 이별은 없어요.” 백석은 김영한에게 자야(子夜)라는 아호를 지어주는데 이것은 ‘당시(唐詩)선집’에 나온 이백의 시 ‘자야오가(子夜吳歌)’에서 따온 것이었다고 합니다. 자야오가는 중국 장안에서 서역으로 오랑캐를 정벌하러 나간 남편을 기다리는 여인 자야의 애절한 심정을 담은 시인데, 앞서 말한 백석의 일본 주소 ‘길상사’나 결국 이뤄지지 못한 백석과 자야의 사랑을 보면 뭔가 운명적인 것이 있긴 있는 모양입니다.

    1937년 백석은 자야에게 만주로 가자고 했지만 자야는 홀로 경성으로 떠났습니다. 백석은 결국 만주 대신 자야를 따라 경성으로 와 청진동 자야의 집에서 동거하지요. 이때 3년간 살며 그가 남긴 대표적인 시가 바로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입니다.

    윤동주가 가장 흠모했던 시인 백석의 시집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다. 오른쪽은 백석을 평생 사랑했던 김영한씨가 쓴 '내사랑 백석'이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탸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탸샤는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탸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를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탸샤를 생각하고

    나탸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같은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탸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응응앙 울을 것이다.’ <下편에 계속>

     

    Photo by 이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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