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5.11.25 06:53
| 수정 : 2015.11.25 06:54
<①편에서 계속>
뼛속부터 무인이었던 인물
6·25전쟁 당시 활약한 가장 인상적인 국군 지휘관을 거명하라면 제일 먼저 손꼽는 것이 다부동 전투와 평양 점령을 이끌었던 백선엽(白善燁)과 김종오라 할 수 있다. 백선엽은 거대한 대승보다 전쟁 내내 부대의 편제를 유지하고 무리하지 않은 작전 구사로 패배를 기록하지 않은 끈질김이 강점이었다. 그에 비하면 김종오는 대체로 모가 많았지만 어처구니없게 도도 던졌던 장군이라 할 수 있다.
당시 부관이었던 진종채(陳鍾埰) 예비역 대장의 회고를 보면 "완벽주의자에 가까웠다. 무슨 일을 하던 빈틈이 없고 또한 책임감이 강해 모시기가 여간 조심스럽지 않았다. 희비의 내색도 없고 화내는 일도 별로 없었다"고 회고하였다. 더불어 자상한 성격이어서 초산전투에서 와병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립된 20여명의 사병을 직접 구출하여 차량에 탑승하고 함께 후퇴하였다.
뼛속부터 무인이었던 인물
6·25전쟁 당시 활약한 가장 인상적인 국군 지휘관을 거명하라면 제일 먼저 손꼽는 것이 다부동 전투와 평양 점령을 이끌었던 백선엽(白善燁)과 김종오라 할 수 있다. 백선엽은 거대한 대승보다 전쟁 내내 부대의 편제를 유지하고 무리하지 않은 작전 구사로 패배를 기록하지 않은 끈질김이 강점이었다. 그에 비하면 김종오는 대체로 모가 많았지만 어처구니없게 도도 던졌던 장군이라 할 수 있다.
당시 부관이었던 진종채(陳鍾埰) 예비역 대장의 회고를 보면 "완벽주의자에 가까웠다. 무슨 일을 하던 빈틈이 없고 또한 책임감이 강해 모시기가 여간 조심스럽지 않았다. 희비의 내색도 없고 화내는 일도 별로 없었다"고 회고하였다. 더불어 자상한 성격이어서 초산전투에서 와병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립된 20여명의 사병을 직접 구출하여 차량에 탑승하고 함께 후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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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종오의 신화가 시작된 춘천 전투를 기리기 위한 기념비. /6.25 전쟁 60주년 기념사업단 제공
아마 세계 전사를 뒤져보아도 한사람의 지휘관이 이렇게 극과 극을 오가며 굵은 발자취를 남긴 경우는 그리 많지 않으리라 생각되는데, 초산 전투의 아픔보다는 춘천 전투 위대함이, 현리 전투의 굴욕보다 백마고지의 영광이 더욱 컸다. 그는 군단장, 군사령관, 합참의장, 육군참모총장 등의 요직을 고루 거친 후 육군대장으로 전역하였으나 1966년 불과 45세의 젊은 나이에 지병으로 타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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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종오는 역사가 일천하고 부족한 것이 많았던 창군 초기에 국군의 명예를 높인 명장이었다. /남도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