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5.11.25 06:52 | 수정 : 2015.11.25 06:53
피로 지켜 낸 고지

김종오는 화력만 제때 동원하면 아군의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적에게 충분히 타격을 줄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이미 전투 이전부터 9사단이 속한 미 9군단장 젠킨스(Reuben E. Jenkins) 중장과 담판을 지어 포병지원이 절대 부족하지 않도록 사전에 엄중히 조치하여 놓은 상태였다. 젊은 국군 장군의 호기를 높게 산 젠킨스는 약속대로 김종오가 원할 때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결국 10월 15일, 9사단의 놀라운 분투에 중공군이 백기를 던졌다. 사실 중공군 38군은 지구에서 사라졌을 만큼 큼 더 이상 투입할 가용 자원도 없었다. 고지 주변에서 숫자만으로도 38군 전체 병력의 절반 정도인 무려 만4389구의 중공군 전사자가 확인되었다. 부상자까지 따진다면 38군이 전투를 더 이상 지속한다는 자체가 불가능하였다. 아무리 인해전술이라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피해였다.
9사단의 끈질긴 항전에 중공군은 엄청난 시신을 남기고 결국 백마고지에서 물러났다. US ARMY 제공
9사단의 끈질긴 항전에 중공군은 엄청난 시신을 남기고 결국 백마고지에서 물러났다. US ARMY 제공
물론 아군의 피해도 컸다. 3146명의 국군이 고지를 지키기 위해 희생되었다. 하지만 6·25전쟁 내내 국군이 이렇게 엄청난 희생을 각오하고, 또한 두려워하지 않고 항전하여 대승을 거둔 경우도 그리 많지는 않다. 산의 높이가 1미터 정도 낮아졌을 정도로 고지는 황폐화하였는데, 능선의 모습이 마치 말 등처럼 생겼다하여 이후 백마고지로 명명되었고 9사단은 백마부대라는 영광된 호칭을 얻게 되었다.

백마고지 전투를 승리로 이끈 김종오는 초산의 원통함과 현리의 망신을 일거에 회복하였다. 특히 백마부대는 현리전투 당시에 그가 지휘하였던 3사단과 함께 3군단 소속으로 사상 최대의 굴욕을 당한 부대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9사단이 겪은 수모의 기억도 함께 날려 버린 셈이었다. 이 전투의 후유증이 얼마나 컸던지 중공군이 피를 부어대는 고지전투에 더 이상 매달리지 않도록 만들어 버렸다.

6·25전쟁 기간 동안 커다란 전투가 수없이 많았는데, 공교롭게도 그때마다 김종오는 역사에 당사자로 굵게 획을 그었다. 전쟁 초기의 춘천대첩과 전쟁 말기의 백마고지 전투는 위대함을 후세에 길이 전할 위대한 승리였고 전략적 효과까지 컸다. 또한 충주, 음성, 신령에서 보여준 방어전은 놀라운 지략 싸움이었다. 반면 초산의 패배는 아쉬움이, 현리의 망신은 믿지 못할 참담함으로 기록되었다.<②편에 계속>
백마고지 전투 직후 9사단을 방문한 유엔군 주요 지휘부와 김종오 장군(왼쪽부터 백선엽 참모총장, 밴 플리트 미 8군사령관, 김종오, 젠킨스 미 9군단장). /백마고지 전투 기념관 제공
백마고지 전투 직후 9사단을 방문한 유엔군 주요 지휘부와 김종오 장군(왼쪽부터 백선엽 참모총장, 밴 플리트 미 8군사령관, 김종오, 젠킨스 미 9군단장). /백마고지 전투 기념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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