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5.11.10 11:20 | 수정 : 2015.11.11 11:32
<中편에서 계속>
그는 1974년 3월부터 열달간 아내 지양진 여사와 함께 10개월간 유럽여행을 떠나 ‘유럽화단의 황혼’이란 에세이를 신문에 3차례 발표했고 1980년에도 4월부터 9월까지 유럽을 거쳐 아프리카의 세네갈까지 여행했지요. 숨을 거두기 한해 전의 일이었습니다. 나혜석이 그랬고 천경자도 그랬지만 오지호 화백 역시 세계를 돌며 스케치를 하고 그림을 완성하는 것을 즐겨했습니다. 나라 밖으로 나가면 국내에서는 보지 못한 여러 풍물과 색감을 접할 수 있기에 화가들은 외유(外遊)를 좋아하는 모양입니다.

오 화백은 1982년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78세의 나이로 숨을 거뒀는데 지양진 여사가 3년 뒤 국립현대미술관에 유작(遺作) 34점을 기증했으며 화순군에서는 동복에 있는 생가를 보존하는 한편 100m정도 떨어진 곳에 오지호 기념관을 세웠습니다.
오지호 화백의 생가 앞에 있는 안내판이다. 오 화백의 생가는 인적이 드물어 가을의 정취를 즐기기에 알맞다.
오지호 화백의 생가 앞에 있는 안내판이다. 오 화백의 생가는 인적이 드물어 가을의 정취를 즐기기에 알맞다.
오지호 기념관은 작지만 정갈하게 가꾸어져 있었습니다. 야트막한 언덕 위에 서있는 기념관 앞으로는 너른 들판이 보이고 제가 찾았을 때는 마침 모과나무에 모과가 주렁주렁 열려 가을 정취를 더하고 있었습니다. 무서운 개가 연신 짖어대는게 흠이긴 했지요. 생가 직원에 따르면 1층에 전시된 오 화백의 작품들은 전부 실물이 아니고 복제품이라고 합니다. 다만 지하 1층에는 기증품들이 있는데 진품이 많다는군요.
오지호 화백의 장남 오승우 화백의 작품이다.
오지호 화백의 장남 오승우 화백의 작품이다.

오지호 화백의 작품이다. 인상주의의 효시라 할 만큼 색채가 강렬하다.
오지호 화백의 작품이다. 인상주의의 효시라 할 만큼 색채가 강렬하다.
월요일에는 휴관하니 혹시 가볼 분은 날짜를 잘 맞춰 헛걸음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오지호 화백 생가 부근에 있는 기념관이다.
오지호 화백 생가 부근에 있는 기념관이다.
부근 생가는 가을을 즐기기에 안성맞춤입니다. 찾아오는 이가 드문데 독상면 경로당을 지나면 붉은 단풍이 얽혀있는 오방색으로 된 토담이 보이며 그 뒤로 대문이 열려있습니다.
오지호 화백의 생가 앞. 서향집으로 황혼 무렵에는 햇볕이 쏟아진다.
오지호 화백의 생가 앞. 서향집으로 황혼 무렵에는 햇볕이 쏟아진다.
여기서 태어난 오 화백은 결혼 후 바로 옆에 붙은 집에서 살림을 했습니다. 원래 이 집은 향교 자리였다고 하지요. 오 화백의 집 옆에는 500년이 넘은 은행나무가 있습니다.
오지호 화백 집 마당에 있는 500년된 은행나무에도 가을이 내렸다.
오지호 화백 집 마당에 있는 500년된 은행나무에도 가을이 내렸다.
보기 좋게 생긴 이 은행나무가 떨군 은행들이 발에 밟히는데 서향(西向)이어서 저녁이 되면 붉은 노을이 서쪽으로 지는 모습이 일품이었습니다.

오지호 화백의 예술혼은 그 아들 오승우(1930년생), 오승윤(1939~2006) 화백 형제와 고 오승윤 화백의 아들인 오병재 화백 3대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여기서 제가 오지호 화백에 대해 관심을 갖게된 계기를 말하고자 합니다. 제 인척 중 한 분의 고향이 전남 화순 동복인데 그의 집을 방문하니 오방색으로 이뤄진 멋진 그림을 볼 수 있었습니다. 매우 단순하면서도 풍수와 샤머니즘을 섞은 오방정색(五方正色)의 세계였는데 바로 그것이 오승윤 화백의 작품이었던 것입니다.
오지호 화백의 차남 오승윤 화백은 사건에 연루돼 안타깝게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오지호 화백의 차남 오승윤 화백은 사건에 연루돼 안타깝게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안타깝게도 오승윤 화백은 자살로 생을 마치고 말았습니다. 알려지기로는 우울증과 스트레스에 시달렸는데 그 이유가 화집 발간과 전시회가 계속 늦어졌기 때문이라고 하지요. 그런데 제가 아는 인척을 통해서 들은 이야기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가 그린 명작들이 사기를 당해 회수할 수 없는 지경에 몰린 것이었습니다. 지금 그의 그림들은 오간데가 없다고 합니다. 이런 일로 상심하던 그는 자신보다 네살많은 누나의 아파트에 다녀오던 길에 8층에서 투신하고 말았습니다. 안타까운 화가의 최후였지요. 그가 죽음에 앞서 남긴 유고도 있습니다. 원문을 인용해보기로 합니다.

“출판사이기 때문에 잘하리라 믿었다. 그런데 지금보니 저작권을 모르는 작가는 쉽게 빠지기 쉬운 함정이 있었다. 계획적인 계약서다. 혼란스러운 것들을 수정하는 것처럼 위장한 것이다. 어차피 계약을 해지하면 변상하는 작품과 호수를 이야기할 것이다….”

이게 무슨 이야기일까요? 당시 보도를 보면 오 화백과 한 출판사는 ‘1년에 500만원 가치의 그림을 그려 출판사에 내면 출판사는 그만큼의 대가를 지불하는 한편 1억원 정도를 투자해 2004년까지 화집을 발간한다’는 골자의 계약서를 썼다고 합니다. 문제는 여기에 ‘단 2006년까지 오화백은 화집에 들어있는 작품을 일반에 팔 수 없고 화집이 나올 때까지는 이미 받은 작품과 200호 이내에서 교환할 수 있다’는 단서가 붙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생각해볼수록 묘한 뉘앙스를 주는 단서임에 분명합니다.
오승윤 화백은 오방색을 샤머니즘과 접목해 독특한 미술세계를 구축했다.
오승윤 화백은 오방색을 샤머니즘과 접목해 독특한 미술세계를 구축했다.
이 때문에 출판사는 끊임없이 오화백에게 그림을 요구해 가져간 것만 유화 25점, 드로잉 7점, 판화 원판 37점이라고 하지요. 오화백은 출판사의 요구에 지친데다 그림을 돌려받을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해 상심한 나머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합니다. 문제의 출판사 대표는 오 화백이 숨진 뒤 1년 후에 법원에서 “유명화가의 작품을 무단으로 게재하고 가족을 협박한 혐의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구속됐다고 합니다. 하지만 응징한들 한국을 사랑했던 화가는 이미 저 세상으로 떠난 뒤였지요.

제가 궁금해 찾아보니 오 화백의 죽음과 연관된 출판사의 대표는 여전히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최근에도 다른 유명 화가와 함께 찍은 사진이 인터넷에 올라있더군요. 검색을 해보니 ‘전속작가’ 제도가 예술가를 옥죈다는 비판이 많았습니다. 만일 그에게 오 화백의 죽음에 대해 묻는다면 전혀 다른 말을 하겠지요. 하늘에 있는 오 화백은 다시는 입을 열 수 없을테고요. 저는 예술 관련 취재를 해보지 않았지만 일련의 화랑(畵廊) 비리와 뇌물 구조 등을 간접적으로 전해들은 바 있습니다.

아름다운 예술의 이면에 이토록 비린내가 진동하는 인물들이 둘러싸고 있다니 그것도 세상사의 한 부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하기는 연꽃도 진흙속에서 꽃을 피운다니 할 말은 없습니다만….

Photo by 이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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