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5.10.22 06:07
| 수정 : 2015.10.28 14:42
1. 고려 충신에서 마음 바꿔 조선 조정 진출
조선 시대를 통틀어 정승을 가장 오래 지낸 재상은 황희였다. 그는 세종 시대에 무려 24년간 정승자리에 있었다. 그만큼 세종이 그를 아끼고 중용했다는 증거이다. 그는 고려 공민왕 12년인 1363년에 개성에서 강릉부사를 지낸 황군서(본관 장수)의 아들로 태어났다.
부친의 덕분으로 음서로 출사했으나 곧 과거에 합격하여 성균관 학관이 되었다. 1392년 7월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개국하자 황희는 고려의 유신이 되고자 벼슬을 던지고 성균관 학관 친구들과 두문동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조선 조정이 부르고 동료의 권고도 있어 황희는 마음을 바꾸어 벼슬길로 다시 나갔다. 그래서 죽을 때까지 고려 유신으로 자처한 길재 학파의 후학인 김종직과 조광조 등의 사림파에서는 그를 훌륭한 인물로 보지 않았다.
조선 시대를 통틀어 정승을 가장 오래 지낸 재상은 황희였다. 그는 세종 시대에 무려 24년간 정승자리에 있었다. 그만큼 세종이 그를 아끼고 중용했다는 증거이다. 그는 고려 공민왕 12년인 1363년에 개성에서 강릉부사를 지낸 황군서(본관 장수)의 아들로 태어났다.
부친의 덕분으로 음서로 출사했으나 곧 과거에 합격하여 성균관 학관이 되었다. 1392년 7월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개국하자 황희는 고려의 유신이 되고자 벼슬을 던지고 성균관 학관 친구들과 두문동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조선 조정이 부르고 동료의 권고도 있어 황희는 마음을 바꾸어 벼슬길로 다시 나갔다. 그래서 죽을 때까지 고려 유신으로 자처한 길재 학파의 후학인 김종직과 조광조 등의 사림파에서는 그를 훌륭한 인물로 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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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종대왕(왼쪽)과 황희 /장대성
세종은 결점이 많은 황희를 무려 24년간이나 정승자리에 있게 하였고 황희는 영의정을 18년간 하다가 87세에 은퇴하고 1452년 90세에 사망했다.
2. 황희, 사위 살인죄 무마 위해 청백리 맹사성에게 청탁해
황희가 의정부 찬성(종 1품)에 있을 때인 1426년에 사위 서달이 충청도 아산의 신창현을 지나다가 양반인 자기에게 예를 갖추지 않았다고 트집을 잡아 아전을 때리는데 말리는 다른 아전을 죽게 하는 살인을 저질렀다.
황희는 사위의 살인 사건을 무마하기 위해 친분이 있는 아산 출신의 판부사 맹사성에게 피해자 가족과의 중재를 요청했고 맹사성은 피해자 가족들을 불러 합의를 주선했고 신창 현감에게도 선처를 부탁했다.
살인한 서달의 부친인 서선은 형조판서였고 장인이 찬성 황희이며 아산 출신의 유력인사인 판부사 맹사성이 해당관리들에게 압박성의 청탁을 하니 서달의 종이 죄를 뒤집어쓰게 되었고 서달은 결국 석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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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종 때 청백리 정승 맹사성 동상, 맹사성의 집. /장대성
세종은 얼마 후 황희의 얼굴을 보아 솜방망이 처벌을 했다. 사형감인 사위 서달은 장 100대를 치고 유배를 보냈으나 가족과 함께 살도록 하였고 대사헌 등의 강력한 반대에도 황희와 맹사성은 좌의정과 우의정에 복직시켰다.
그런데 1년도 안 되어 첨절제사 박유가 황희에게 뇌물을 보내다가 적발되어 체포되었다. 그리고 역졸로부터 말과 술대접을 받고 잘 봐 주었다는 보고도 있었다. 또한 황희는 처남들과 아들의 이익 등을 위해 여러 번의 구질구질한 청탁과 뇌물 사건으로 구설수에 올라 탄핵 대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종은 1431년 황희의 재주가 비범하다고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의 자리인 영의정에 임명했고 황희는 업무처리에 탁월한 재상이 되었다. 물론 맹사성도 우의정에 복귀한 후 좌의정으로 올라 음률에 뛰어난 청백리 명재상으로 이름을 날렸다.<②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