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5.10.01 07:43 | 수정 : 2015.10.01 07:44
<①편에서 계속>
구인회는 먼저 국산 라디오 개발을 지시했다. 진공관 라디오 설계를 맡은 사람은 엔지니어 김해수였다. 1923년생인 그는 도쿄고등공업학교 졸업반이던 1943년 일제에 의해 강제로 인천 조병창 전기주임으로 발령되었으나 탈출하여 강원도 산골에 숨어 광산 전기책임자로 일하다가 광복을 맞았다. 그 뒤 미군 PX의 라디오 수리점을 운영했으며, 1958년 공채로 금성사에 입사했다. 산업기반이 전혀 없는 나라에서 라디오를 생산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시제품을 힘들게 완성해도 부품이 거의 수입품인지라 생산단가가 비쌌다. 결국 품질이 떨어지더라도 직접 부품을 제작해 제품의 가격을 낮출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설계 작업과 부품 생산이 동시에 이루어져 나갔다. 금성사는 창립 1년 만인 1959년 11월 첫 국산 진공관식 라디오 ‘A-501’을 자체기술로 만들어내 한국 전자산업의 신기원을 이룩한다. 라디오에는 금성사의 상징인 왕관 모양 마크와 ‘Goldstar’ 로고도 함께 찍혔다. 미제 제니스(Zenith) 라디오가 한국 시장을 한창 휩쓸던 때였다.
1959년 LG가 국내 최초로 만든 라디오인 ‘A-501’ 모델. /주간조선
1959년 LG가 국내 최초로 만든 라디오인 ‘A-501’ 모델. /주간조선
그러나 금성사는 예상치 못한 시련에 맞닥뜨렸다. 수요층 대부분이 외제만 선호하는 데다 밀수품의 기승으로 판매가 부진했다. 3년 연속 적자에 허덕이던 금성사는 문 닫을 위기에 처했다. 더는 지탱할 수가 없었다. 구인회를 비롯 금성사 직원 모두가 자포자기 절망뿐인 심정이었다. 그런데 1961년 9월 어느 날 부산 연지동 금성사 라디오공장에 검은 선글라스를 낀 군인이 예고도 없이 찾아왔다. 마침 생산과장 김해수는 혼자서 사무실을 지키고 있었다. 군인의 얼굴을 바라본 그는 가슴이 마구 뛰었다.

‘요즘 신문에 자주 나오는 박정희 의장이다!’

5·16군사정변의 주역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이 부산에 내려왔다가 시간을 쪼개어 라디오공장을 둘러보려고 찾아온 것이었다. 김해수는 부품가공실, 라디오 조립실, 검사실을 안내했다. 시설을 꼼꼼히 살펴본 박정희는 김해수에게 제조과정에 대한 설명까지 들었다.

“공장의 기계시설은 어느 나라 것이오? 부품의 국산화는?”

“김 과장은 어느 학교를 나왔소?”

“하루에 몇 대나 생산하오?”

박정희가 잇따라 질문을 쏟아냈다. 김해수는 왠지 모르는 진지한 이끌림에 차근차근 열정적으로 설명을 했다.

“이래서 살아남을 수 있겠소? 내가 무얼 도와주면 좋겠소?”

순간 김해수는 울컥 울음이 치밀어 오르는 심정으로 하소연했다.

“회사가 정말 어렵습니다. 그러나 상품의 질과 직원들 사기는 보장합니다. 밀수품과 면세품의 유통을 막아야 전자산업이 살아납니다.”

“알겠소! 기다려보시오. 곧 좋은 소식이 올 거요.”

다음 날 회사가 발칵 뒤집혔다. 구인회는 박정희의 예고 없는 부산 공장 방문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다. 최고 권력자의 깜짝 방문에 금성사는 세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일주일 뒤 밀수품 근절에 관한 최고회의 포고령이 발표되면서 금성사 라디오가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더불어 공보부 주관으로 농어촌 라디오 보내기 운동이 전개되면서 주문전화가 빗발쳤다. 그 결과 한 해 1만대에도 못 미치던 금성라디오 판매량이 1962년에 들어서며 13만7000대로 늘어났으며 1961년 89만여대였던 라디오 보급 대수가 1962년 끝 무렵에는 134만대로 늘어났다. 시인 김수영은 아내가 A-501을 사온 것을 소재로 ‘金星라듸오’라는 시를 썼다. 한 기업의 제품이 광고나 홍보가 아닌 문학작품에 등장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라디오가 그만큼 서민들의 삶과 가까웠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구인회는 화학과 전자산업을 두 축으로 LG그룹의 기틀을 닦아 나아갔다.

럭키치약 못지않은 대히트 상품인 ‘하이타이’ 개발에는 숨겨진 이야기가 있다. 구인회는 1962년 락희유지 상무 허신구를 일본·홍콩·동남아시아로 보내 시장개척 아이디어를 얻어오게 했다. 출장을 마치고 온 허신구는 간부회의에서 이렇게 보고했다.

“태국 방콕에 가 보니, 강가에서 무슨 가루를 뿌려 빨래하는데 희한하게 때가 다 빠지더군요. 합성세제라 하는데, 아직 양잿물로 끓이고 방망이질하는 한국에서 생산하면 아주 잘 팔릴 것 같습니다.”

그때 이미 럭키빨랫비누가 나와 아주 잘 팔리고 있었다. 기존 상품의 수요를 깎아먹을 수 없었으므로 일단 가루세제 아이디어는 접어야 했다. 그 뒤로도 허신구는 집안사람들이자 경영층을 1년 넘게 설득해 나갔다. 그 모습을 본 구인회는 마침내 허락했다.

“그토록 집념을 갖고 해보겠다니, 나름대로 확신이 있나보구먼. 좋네, 자네를 한번 믿어보겠네.”

최초의 합성세제 ‘하이타이’가 개발되자 영업사원들은 전국 곳곳에서 세탁 시연을 해보이며 판매에 열을 올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하이타이는 주부의 필수품이 되었고, 이듬해에는 공장 시설을 두 배로 늘려야 할 만큼 성공을 거두었다. 샴푸도 개발하여 큰 인기를 모은다. 그전까지 비누로만 머리를 감던 사람들에게 샴푸는 한마디로 문화충격이었다.

고정일 소설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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