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콩 시장서 팔던 용뼈, '킹콩'의 이빨이었다

입력 : 2015.09.19 03:05

韓人 첫 고인류학 박사 이상희… 한국어로 쓴 최초 대중 과학서

호빗부터 네안데르탈인까지 화석 인류 좇는 '인디아나 존스'
야쿠자와 베이징인·짝짓기 등 일상적인 테마 22가지로 다뤄

'인류의 기원'
인류의 기원|이상희·윤신영 지음|사이언스북스|352쪽|1만7500원

인류의 기원과 진화를 다룬 책은 숱하다. 하지만 이상희 교수의 '인류의 기원'을 선택한 이유가 있다. 캘리포니아대학 리버사이드 캠퍼스 인류학과 이상희(49·사진) 교수는 소위 고(古)인류학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최초의 한국인. 이 분야 최신 연구가 적지 않게 번역되어 왔지만, 한글을 모국어로 사용하는 한국인이 직접 쓴 대중 과학서는 처음이다. 월간 '과학동아'의 윤신영 편집장이 함께 썼다. 에드워드 윌슨을 통해 개미와 진화생물학을 읽다가, 그 제자인 최재천 교수의 문장으로 이 세계를 알게 된 느낌이랄까. 고인류학은 지금으로부터 최소 1만년 이전의 인류 역사를 다루는 학문. 유물과 유적이 아니라, 인간의 뼈를 추적하고 발굴하는 '인디아나 존스'가 여기에 있다.

난쟁이 인류 호빗에서 네안데르탈인까지 포괄하는 22가지 인류 이야기다. 최초의 인류부터 시작하는 연대기식 순서가 아니라, 흥미롭고 일상적인 소재를 테마별로 다뤘다는 게 대중적 매력. 가령 제10장(章) '베이징인과 야쿠자'를 보자. 어느 날 이 교수는 일본 조직폭력배 야쿠자를 조사하는 데 평생을 바쳤다는 탐사 기자(記者)의 메일을 받는다. 비밀리에 열릴 야쿠자 입회식에 전설의 베이징인 원본 화석이 등장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는 것. 부디 진짜인지 함께 가서 확인해달라는 부탁이었다.

캘리포니아대학 리버사이드 캠퍼스 인류학과 이상희 교수
독자도 거부하기 힘든 이런 유혹으로 도입부를 시작한 이 교수는 동아시아 최초의 호모 속(屬)으로 꼽히는 베이징인 화석의 의미를 다감한 목소리로 들려준다. 1920년대 중국 저우커우덴에서 발견된 이 고인류 화석은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1년 베이징 동쪽 친황다오 부두에서 홀연히 사라졌다는 것. 그 이후 이 역사적 화석을 찾기 위한 고인류학자들의 추적이 시작됐지만 아직도 오리무중. 이 교수는 베이징인이 살던 시대가 빙하기 중 가장 추웠던 아빙기인지 아니면 아간빙기인지를 가리고, 그에 따라 이 고대인류가 '불을 지배했는지' 여부, 그리고 베이징인이 그 시대를 대표할 수 있는 고인류 화석인지를 조근조근 설명한다.

매혹적인 에피소드를 통해 최신 고인류학 세계를 탐험하는 이런 글쓰기 방식은 일관적이다. 우리도 중국 여행을 할 때 가끔 경험하지만, 난전(亂廛)에서 장사꾼들이 목소리 높여 외치는 한약재 '용뼈'가 있다. 이 교수는 독일의 고생물학자 구스타프 폰 쾨니히스발트의 사례를 인용한다. 훈련받은 이 분야 전문가는 이빨만 보고도 그것이 어떤 동물인지 맞힐 수 있다는 것. 홍콩의 시장에서 '용뼈'를 구입한 독일 학자는 이 뼈가 용의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존재한 가장 거대한 유인원의 이빨이었다는 논문을 발표한다. 이 유인원 종에 붙인 이름은 '기간토피테쿠스 블라키'. 거대한 유인원이란 뜻이다. 몸무게는 고릴라 수컷의 1.5배인 270㎏, 키는 2.7m. 이 교수는 이 이야기에 '킹콩이 살아있다면'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식인(食人)과 짝짓기의 풍습 역시 가장 넓고 깊게 독자들을 유혹하는 소재 중 하나다. 완전히 새로운 연구 결과는 아니지만, 이 교수와 윤 편집장은 번역 뜨악한 외국영화가 아니라 웰메이드 한국영화를 보는 듯한 필력으로 고대(古代) 시간여행의 숙련된 가이드가 된다. 네안데르탈인 뼈에서 나타난 칼자국이 장례를 위한 것이었느냐 아니면 먹기 위한 것이었느냐의 문제, 파푸아뉴우기니 포레족이 왜 사람의 뇌와 장기까지 먹었느냐의 문제를 최신 연구 성과를 인용해 설득력 있게 소개한다. 죽은 사람을 먹으면 그 사람이 살아 있는 사람의 일부가 되어 한동네에 계속 살게 될 거라는 간절한 믿음 때문에 식인을 거듭하는 포레족의 슬픈 믿음까지도.

투구 쓴 로마 병사와 갓끈 맨 조선인의 뿌리는 같을까. 아니면 현생인류는 다양한 지역에서 시작해 동시다발적으로 교류하며 진화했을까.
투구 쓴 로마 병사와 갓끈 맨 조선인의 뿌리는 같을까. 아니면 현생인류는 다양한 지역에서 시작해 동시다발적으로 교류하며 진화했을까. /사이언스북스 제공
오스트랄로피테쿠스나 호모 에렉투스 등의 외우기 힘든 학술용어로만 이 분야 학문을 기억하는 당신에게, 또 그깟 옛날 인류와 화석이 요즘 같은 시대에 무슨 쓸모냐고 되묻는 당신에게, 고인류학의 독서는 어떤 의미를 지니는 걸까.

무릇 좋은 인문학은 상상력과 창의력을 키우는 법. 침팬지 수컷은 자신의 DNA를 남기기 위해 고환의 크기를 키우는데, 왜 인간 수컷은 유인원 중 유일하게 자식을 낳은 뒤에도 그 주변을 떠나지 않고 아이를 돌보는 방식으로 진화했는가, 자신보다 훨씬 거대한 킹콩 '기간토피테쿠스'를 인간은 어떻게 멸종시켰는가 등에 대해 고인류학은 상상력을 동원한 가설을 제시한다.

지금 이 세계를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면, 더 이상의 발전은 없을 것이다. 고인류학은 그렇게 당신의 창의력과 영감을 자극한다. 그 흥미진진한 세계로 당신을 초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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