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5.09.08 07:11 | 수정 : 2015.09.08 07:32
1. 장군보다 위대한 전쟁 영웅 김만술 특무상사

1950년 6월 25일 북한공산군이 불법 기습 남침했다. 미국 등 16개 우방국의 참전과 도움이 있었으나 국군 장병 약 14만 명 전사와 13만 명 실종(거의 전사 추정) 그리고 70만 명 부상이란 위대한 희생이 없었다면 한반도 전체가 김일성 일가 독재 치하의 지옥으로 떨어질 뻔하였다. 3년 1개월 동안 매일 평균 약 270명의 병사가 전선에서 처참하게 죽거나 실종되었고 640명이 부상을 당한 셈이었다.

37개월의 치열한 전쟁 동안 용감하게 싸운 장군도 많았지만, 적에게 포위되자 사단병력을 버리고 도망간 사단장과 군단병력을 둔 채고 비행기로 혼자 탈출한 군단장도 있었다. 그 와중에도 불과 34명의 소대 병력으로 1000명이 넘는 중국군 2개 대대를 섬멸한 부사관 출신의 김만술 소대장이 있었다. 한국정부로부터 훈장서열 1위인 금성태극무공훈장을, 미국정부로부터는 한국인 최초로 미국 최고훈장인 십자훈장을 받은 그는 1960년 대위로 제대한 후 전투 중 입은 부상 후유증 때문에 1991년 63세로 사망했다. 그 위대한 전쟁영웅 김만술 대위를 아는 한국인은 극소수다. 바로 이것이 한국 교육의 심각한 문제점이다.
미 8군 사령관 테일러 대장에게 훈장을 받는 김만술 소위.
미 8군 사령관 테일러 대장에게 훈장을 받는 김만술 소위.
2. 34명의 소대원과 1000명이 넘는 중국군 2개 대대와 전투 시작

김만술은 1929년 10월 경상남도 함안군에서 출생하여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 공업학교를 졸업하고 해방 후에 귀국하였다. 귀국 후 그는 1947년 6월 국군의 전신인 국방경비대에 입대하였다. 당시에는 지금의 고등학교 졸업 수준이면 장교로 입대할 수 있었는데 부사관으로 입대한 것을 보면 오사카 공업학교가 중학교 정도의 학교인 것으로 추측된다. 어쨌든 김만술은 여순반란사건 진압 작전과 태백산 등에서 공비토벌 작전에 기관총 사수로 전투에 참가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 발발 후에는 평양탈환작전 등 주요 전투에 참가하여 전공을 세워 특무상사가 되었다.

1947년 6월부터 약 6년 동안 최전선에서 전투로만 일관해오던 중 1953년 7월 15일 직속상관인 제1사단장 김동빈 준장의 구두 명령으로 특무상사에서 소위로 특진하였다. 1953년 7월 중순은 휴전회담이 막바지에 이르러 한국과 북한 양쪽 군대가 한 뼘의 땅이라도 더 확보하려고 전력을 다해 사투를 벌일 때였다. 김만술 특무상사는 제1사단 11연대 2대대 6중대 2소대장이 되었다. 1사단 11연대의 전초기지는 경기도 연천군 임진강 북방 베티고지였고 2대대 7중대 1소대가 방어하고 있었는데 중국군의 공격을 받아 피해가 막심했다. 신임 2소대장 김만술 소위는 1소대와 진지교대 명령을 받았다. 진지를 교대하자마자 김만술 소위와 34명의 소대원은 공격해오는 1000명 이상의 중국군 2개 대대와 전투를 시작했다.

3. 김만술 소대 35명이 중국군 314명 전사와 450명 부상시키고 섬멸

휴전협정 조인 12일 전인 1953년 7월 15일 15시 30분경에 베티고지 (동봉, 중앙봉, 서봉 등 세 봉우리가 있었는데 서봉은 중국군이 장악하고 있었음) 중앙봉과 동봉에 도착한 김만술 소대장은 대대장으로부터 서봉을 점령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서봉은 중앙봉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김만술 소대장은 17시 30분 1개 분대를 직접 지휘하여 서봉을 먼저 기습 공격하여 5명의 적을 사살하고 8부 능선까지 진격했다.

곧 19시 30분이 되자 약 800명의 중국군 대대의 공격이 개시되었고 중국군이 아군의 참호 속까지 뛰어들어오자 김만술 소대장은 총검으로 과감하게 적을 죽이고 물리쳤으며 이를 본 소대원들은 용기가 솟아 용감하게 싸우기 시작했다. 22시에 적은 다시 동봉과 중앙봉으로 각각 1개 중대 병력(160명)과 2개 중대 병력(320명)으로 공격하였다. 공격 중인 적들이 교통호로 침입하자 김만술 소대장은 수류탄과 백병전으로 적을 죽이고 또 죽였다.

베티고지 전투 호국화와 베티고지 세 봉우리.
베티고지 전투 호국화와 베티고지 세 봉우리.

16일 오전 3시 30분 중국군 대대급 부대가 또 공격해오자 불과 30여 명의 병력을 갖고는 사격, 수류탄 투척과 백병전 등을 해도 도저히 적의 공격을 막을 수 없었다. 김만술 소대장은 소대원들을 참호 속으로 대피시키고 아군에게 진 내 포격을 요청하였다. 진 내 포격이란 전투현장에 아군과 적군을 안 가리고 무차별 포격하는 것으로 아군도 아군 포격에 적군과 같이 전사할 가능성이 많다. 네 차례의 진 내 포격으로 중국군은 일시 퇴각했다.

1000여명 중공군 공세를 34명으로 막아낸 한국전쟁 영웅 김만술 특무상사

오전 6시 30분 중국군은 대대 이상의 병력으로 또 공격해 와 아군 병력의 1/2 이상이 전사하였다. 나머지 10여 명은 후방 지원이 없어 수류탄, 총검, 철모와 야전삽 등으로 적들과 죽이고 죽이는 처절한 백병전을 계속하여 중국군 314명을 죽이고 450명을 부상시키며 3명을 포로로 잡았다. 중국군은 막대한 피해를 당하고 오전 7시 30분 퇴각하였다. 적이 퇴각한 후 12명의 생존 소대원들은 중국군 시쳇더미에 얽혀 있는 23명의 전우 시체를 껴안고 통곡했다. <②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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