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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未濟로 남을 뻔한 사건 100여개… 최면 걸었더니 풀렸다

입력 : 2015.07.04 03:09

전생체험·심리치료用인 줄 알았던 최면, 과학수사 최후의 보루로

해마 속 '장기 기억' 호출
평소보다 많은 사실 기억… 감성적인 사람에 더 효과

최근 개봉한 영화 '극비수사'에선 유괴사건 해결에 '최면'이 활용된다. 이 영화는 1978년 부산의 한 수산업체 대표의 딸 정모(당시 9세)양이 유괴됐다가 33일 만에 구출된 실화를 다뤘다. 당시 경찰은 용의자의 차량 번호, 인상 착의 등 기초적인 단서조차 파악하지 못한 상황에서 최면을 통해 목격자 기억을 되살렸다.

유괴 차량을 목격한 초등학생에게 최면을 유도해 차량 번호에 '2·0·8'이라는 숫자가 있었다는 진술을 받아냈다. 이를 토대로 '서울1라2082' 코티나가 범행 차량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정양 사건은 한국 경찰 수사에 최면이 도입된 첫 사례다.

미제로 남을 뻔한 사건
일러스트= 김성규 기자

이후 최면은 수사에 종종 활용돼 사건 해결에 결정적인 실마리를 제공해왔다. 지난해 7월 서울 중랑천 산책로에서 최모(24)씨가 괴한에 폭행당했다. 피해자가 범인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했고 현장 주변에 CCTV도 없었다. 경찰은 피해자에게 최면을 유도해 범인의 인상착의 기억을 되살려냈고 이를 바탕으로 몽타주를 작성해 범인을 검거했다. 2006~2007년 경기 서남부에서 여성 7명을 연쇄 살해한 강호순 사건 해결에도 최면 수사가 활용됐다. 경찰이 목격자를 대상으로 최면 수사를 실시해 강의 인상착의를 특정한 것이다.

경찰청은 지난해 CCTV 사각(死角) 지대 등에서 발생한 사건 중 100여건이 최면 수사를 통해 해결됐다고 밝혔다. 경찰청 과학수사센터 이태현 팀장은 "최면이 흔히 '전생 체험' 수단으로 알려져 있어 비과학적인 것으로 오해를 받는데 사실은 과학 수사 기법"이라고 말했다. 이 팀장은 "의식과 무의식의 중간 상태를 유지하면서 주변의 방해 요소를 차단하고 이미 저장돼 있는 기억을 또렷하게 하는 과정이 최면 수사"라고 했다. 일선 경찰들은 최면을 '과학 수사의 최후 보루'라고 말한다. 물증이나 CCTV, 블랙박스 기록, 진술 등이 없는 상태에서 기억에만 의존해야 할 때 써볼 수 있는 마지막 방법이란 것이다.

최면으로 뇌에 저장된 장기기억 추출

전문가들에 따르면 최면 상태는 꾸벅꾸벅 졸거나 선잠에 빠진 상태와 비슷하다. 이 상태에서 어느 한 장면이나 물건, 인물 등에 집중하면 평소 깨어 있을 때보다 훨씬 많은 것들을 기억해 낼 수 있다고 한다. 최면은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사람에겐 잘 통하지 않지만, 감성적이고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에게는 효과가 좋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최면을 유도하려면 먼저 대상자의 마음을 최대한 편안하게 만드는 게 중요하다. 이 때문에 최면 유도자는 실제 최면을 시도하기 전에 대상자와 한 시간가량 대화를 나눈다. 대상자가 좋아하는 장소·음식·색깔·향기, 가장 행복했던 기억 등을 파악하고 최면 유도자에 대한 믿음을 심어주기 위해서다. 최면 유도는 짧게는 4주에서 길게는 16주 정도 교육을 받으면 누구나 시도할 수 있다고 한다.

전북지방경찰청 박주호 최면수사관은 "한적한 숲길이나 해변을 거닐었던 기억으로 유도해 심신을 이완하는 것이 보통"이라고 말했다. 박 수사관은 "'최면에서 깨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오해도 있지만 최면 수사관이 방을 나가버리거나 본인이 최면 상태에서 빠져나오고 싶다고 생각하면 금방 깨게 된다"고 말했다.

편안한 기억 속에서 심신이 충분히 이완되면 최면 유도자는 '이제 현장으로 들어가보겠습니다' '무엇이 보입니까' '좀 더 가까이 가서 살펴봅시다' 같은 말로 기억을 되살린다. 인간의 기억은 단기 기억(전전두엽에 저장)과 장기 기억(측두엽에 있는 해마 부위에 저장)으로 나뉘는데, 최면을 통해 장기 기억을 불러내 또렷하게 인식하도록 하는 것이다.

범인 인상착의, 차량 번호판 등과 관련한 구체적 기억을 해마에서 끌어내는 데 성공하면, 최면 유도자는 "이 기억은 절대 잊어버리지 않습니다"는 암시를 준다. 이를 통해 최면에서 깨어난 뒤에도 해당 기억을 잊어버리지 않을 수 있다.

암시 배제가 중요

2013년 경찰청이 발표한 '과학 수사 규칙'에 '법최면(法催眠·Forensic Hypnosis)' 항목이 처음 들어갔다. 최면이 정식 수사 기법으로 공인된 것이다. 현재 경찰에서 활동하는 최면수사관은 전국에 37명이다.

법최면이 심리 치료, 암기력 증진 증에 쓰이는 최면과 다른 점이 바로 '암시의 배제'다. 심리 치료에서는 부정적인 기억을 공이나 상자에 담아 우주로 날려보내는 장면을 암시해 기억을 긍정적인 쪽으로 이끌어주려고 한다. 반면 법최면은 사건 당시의 정확한 기억에 접근하는 것이 목적이다. 따라서 암시를 최소화해야 한다. 예를 들어 사건 현장에 있었던 차량 종류를 파악할 때 '차종은 무엇입니까'라고 묻지 않고 '쏘나타입니까'라는 질문을 던지면 대상자의 기억 속에 있는 차량은 그 즉시 쏘나타가 돼 버린다. 최면이 오류를 범할 수 있는 것이다.

경찰 관계자는 "성폭행 등 트라우마가 남을 수밖에 없는 사건을 최면 수사할 경우 '그 사람은 당신을 결코 해치지 못합니다' '이 기억은 당신을 괴롭히지 못합니다' 같은 최소한의 암시를 줘야 한다"며 "대상자의 심리적 안정이 중요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선진국에서도 최면은 수사에 적극 활용된다. 미국 연방수사국(FBI)은 1950년대부터 최면을 공식적으로 수사에 이용해왔다. 최면 수사를 통해 얻어낸 진술 자체는 법적 효력이 없다. 하지만 범인 인상 착의, 차량 번호, 장소 특정 등을 위한 단서로 사용돼 사건 해결에 도움을 준다.

최면 수사는 원칙적으로 피해자·목격자를 대상으로 한다. 용의자·피의자는 혐의를 부인하는 '거짓 기억'을 지어낼 수 있어 수사의 정확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예외적으로 피의자 최면 수사를 하는 경우도 있다. 경찰은 2013년 군산 비응도 살인 사건 피의자 장모(45)씨를 대상으로 최면 수사를 실시했다. 범행의 결정적 증거인 흉기를 버린 곳을 장씨 본인도 기억하지 못했던 탓이다. 최면 수사를 통해 경찰은 장씨의 기억을 되살려 흉기를 찾아냈다. 최면은 반드시 대상자 동의를 얻은 후 영상 녹화 장치가 설치된 전용 최면 수사실에서만 실시할 수 있다.

2011년 창립된 한국법최면수사학회에는 군·검찰·경찰 수사관 45명이 정회원으로 가입돼 있다. 군 최면 수사관들은 주로 총기·실탄 분실 사고가 발생했을 때 투입돼 기억을 복원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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