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5.06.25 14:41
(18) 사창리 패전

압록강 선착 사단

국군 6사단은 전쟁 준비가 비교적 충실했던 한국군 부대에 속했다. 6사단은 김일성 군대가 기습적으로 남침을 벌였던 1950년 6월 25일 아침에는 가장 인상적인 전투를 벌였던 부대이기도 했다. 그들은 강렬하면서도 조직적인 저항으로 김일성 군대의 침공을 3일 동안 막았다. 그 점은 전쟁 초반의 국면(局面)에 큰 영향을 미쳤다. 김일성 군대가 수도 서울을 점령한 데 이어 춘천을 조기에 공략하는 데 성공했더라면 한강 이남의 한국군 방어선을 무너뜨리는 일이 한결 수월했을 것이다. 6사단은 그런 김일성의 전쟁 의도를 좌절시킨 큰 공로가 있었다. 따라서 전쟁 초반 6사단의 명성은 매우 높았다.

앞에서도 몇 차례 거론했지만 이들에게는 다른 국군 사단이 부러워하는 점 하나가 있었다. 바로 기동력이었다. 영월 탄광 지대에 있던 광산업체들의 트럭을 징발할 수 있어 탁월한 기동력을 확보했기 때문이었다. 전쟁 초반에도 6사단은 늘 발 빠르게 움직였다. 기동이 쉬워 장병의 전투력도 높았던 편이었다. 따라서 낙동강 전선이 만들어지기 전의 6사단은 국군 사단 중에서 전과(戰果)와 함께 사기가 높아 형편이 가장 좋았던 부대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 점이 어쩌면 화(禍)를 부른 측면이 있다. 북진이 벌어지자 이들의 기동은 매우 신속했다. 트럭에 올라타 압록강을 향해 가장 먼저 달려갔다. 다른 사단이 흉내 내기 어려운 속도였다.

6사단 예하 7연대가 가장 먼저 북상해 압록강의 바로 앞인 초산진에 도착함으로써 6사단은 또 명성을 올렸다. 압록강에 가장 먼저 도착한 부대로서의 이름이었다. 통일을 암시하는 듯한 장면도 그로부터 나왔다. 압록강 물을 수통에 담았던 장면은 어느 누군가가 사진으로 찍기도 했던 모양이다. 그 다음의 결과는 그러나 아주 참혹했다. 7연대 장병은 자신들이 트럭에 올라타 아주 경쾌한 몸가짐으로 압록강을 향할 무렵 그 주변의 빽빽한 밀림 속에 몸을 도사리고 앉아 있던 중공군의 그림자를 전혀 보지 못했다. 그들은 오직 하나의 목표, 압록강 선착(先着)의 사명감을 위해 전진했으나 전쟁의 원칙에 충실하지 못했던 것이다.
6사단 장병으로 보이는 국군이 압록강에 도착해 물을 뜨고 있는 장면이다.
6사단 장병으로 보이는 국군이 압록강에 도착해 물을 뜨고 있는 장면이다.
나아가는 길에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지를 헤아리는 일은 전쟁터에 선 사람에게는 매우 중요하다. 매우 중요하다는 표현도 어쩌면 부족하다. 본인은 물론이고, 저가 이끄는 모든 장병의 목숨이 달린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군대의 가장 기본은 나아갈 때 앞을 충분히 헤아려야 한다. 물러설 때 또한 어떻게 물러설 수 있는지를 반드시 살펴야 옳다.

나아갈 때와 물러날 때

여담이지만, 당시 6사단 7연대장 임부택 대령은 나와도 인연이 매우 깊은 사람이다. 김일성 군대의 초기 공세에 밀려 낙동강 전선을 향해 밀려 내려갈 때 나는 그에게 신세를 진 적이 있다. 당시 내가 이끌던 1사단은 전투력이 형편없었다. 한강 인도교가 일찍 끊기는 바람에 임진강 일대를 방어하던 우리 1사단은 모든 장비와 중화기를 갖고 내려올 수 없었기 때문이다. 병력도 뿔뿔이 흩어졌다가 겨우 다시 모이는 중이었다.

1950년 7월 8일로 기억한다. 우리는 당시 음성에서 6사단 7연대와 방어 임무를 교대해야 했다. 마침 7연대는 동락리라는 곳에서 북한군을 대거 몰살하는 커다란 전공을 세웠던 터라 사기가 매우 높았다. 나는 임부택 중령(당시 계급)에게 “당장은 우리가 임무 교대를 할 수 없을 만큼 전투력이 보잘 것 없으니 준비가 될 때까지 우리를 도와달라”고 간청했다. 그는 흔쾌히 내 궁색한 요청을 받아들였다. 7연대의 포병 화력을 얻어 우리는 겨우 북한군의 공세를 막아낼 수 있었다. 그는 나중에 김종오 사단장에게 혼쭐이 났다고 했다. 이동 명령을 어겼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런 고마운 임부택 중령은 나중에 북진 대열의 가장 선두에 섰다.

그는 초산진에서 중공군에게 포위를 당했다가 겨우 살아났다. 임부택 중령은 겨우 사선(死線)을 돌파해 좌측으로 인접했던 우리 1사단의 12연대로 넘어왔던 모양이다. 그는 12연대장이었던 김점곤 중령과 친구 사이였다. 임부택 중령은 개인화기조차도 잃어버렸던 상태였다고 했다. 김점곤 중령이 임부택 중령에게 “압록강에서 떠 온 물은 어디에 뒀느냐”고 농담조로 놀렸다고 한다. 어쨌든 임부택 중령과 그의 예하 장병 일부는 결국 1사단 12연대의 도움으로 커다란 탈 없이 남하할 수 있었다. 전쟁이 벌어지는 와중에도 서로 돕는 인연은 그렇게 이어졌던 셈이다. 그 뒤 6사단은 재정비를 거쳐야 했다. 사단 전체가 너무 일찍 압록강을 향해 치달은 탓에 중공군의 포위에 걸려 커다란 전력손실을 입었기 때문이었다.

1951년 4월에 벌어지는 중공군의 제5차 1단계 대규모 공세 때 사단을 이끌고 있던 이는 장도영 준장이었다. 그는 1961년 벌어지는 5.16으로 인해 매우 유명해졌던 인물이다. 나와 같은 군사영어학교 출신이어서 창군 멤버에 속했다. 그는 내 후임으로 정보국장을 맡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국군 사단장 등 주요 지휘관 모두가 그렇듯, 장도영 준장 역시 젊은데다가 전투 경험은 별로 없었다. 중공군이 5차 1단계 공세를 벌이던 무렵에 6사단은 김화 지구를 향해 공세를 펼치고 있었다.
1951년 4월 중공군 5차 1단계 공세 때 국군 6사단을 이끌었던 이는 장도영 준장이다. 5.16 때 박정희 당시 소장과 함께 촬영한 사진이다.
1951년 4월 중공군 5차 1단계 공세 때 국군 6사단을 이끌었던 이는 장도영 준장이다. 5.16 때 박정희 당시 소장과 함께 촬영한 사진이다.
유엔군 전체에게 내려진 공세 명령으로 38선 이북을 향해 부지런히 전진하는 중이었다. 내가 있던 강릉과 주문진에서는 앞서 언급했던 대로 별다른 충돌이 없었다. 전면에 버티고 있던 적이 전투력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던 북한군이었던 까닭이다. 그러나 중공군이 다가서고 있던 서부와 중부 전선의 상황은 달랐다. 중공군은 신규로 한반도에 도착한 새 병력, 재정비를 거쳐 전투력을 회복한 기존의 참전부대를 대규모로 동원해 서부와 중부 전선 모두에서 강력한 공세를 벌일 작정이었기 때문이다. 중부전선을 맡아 가평과 춘천 북방으로 진출하려던 미 9군단과 10군단의 앞에는 중공군 39, 40군이 전투를 준비 중이었다.

불리했던 환경

이곳의 산세(山勢)는 험했다. 광주산맥이 서남쪽을 향해 흘러내리면서 많은 산지(山地)가 발달한 지형이었다. 보통은 해발 1000m를 웃돌거나, 그에 다소 미치지 못하더라도 험준한 산들이 많았다. 아군의 진격로는 따라서 이동이 편치 않았다. 높은 산지가 발달해 우선 관측과 기동 자체가 어려웠다. 아울러 인접부대와의 통신 연결도 수월치 않았다. 통신에 제한이 따르면서 부대 사이의 공백은 커질 수 있는 위험을 지니고 있었다. 중공군에 비해 우세에 있던 유엔군의 장비와 물자는 따라서 6사단에게 효율적으로 전해지지 않을 수 있다는 가능성에도 주목해야 했다.
1950년 10월 1일 38선을 돌파해 북진에 나선 국군 3사단 장병들을 주민들이 환송하는 모습이다.
1950년 10월 1일 38선을 돌파해 북진에 나선 국군 3사단 장병들을 주민들이 환송하는 모습이다.
그런 여러 요소를 따질 때 6사단의 진격은 신중을 기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나아가는 길이 험하다면 물러서는 길도 험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도보로 이동하는 병사들의 진격에는 문제가 없었지만 그를 후속(後續)하는 장비와 물자 등이 늘 제한을 받을 수 있었다. 중공군에게는 유리한 싸움터였다. 그들은 늘 산악 이동을 근간으로 하면서 기습과 우회, 매복을 번갈아 선보이던 군대였다. 물자와 장비를 그런 목적으로 실어 나르기 위해 거느렸던 군마(軍馬)도 매우 풍부했다. 산지가 펼쳐지며 발달한 계곡이 중첩해 있다는 점도 역시 중공군에게는 유리함으로 작용할 수 있었다.

전쟁의 상처도 빼놓을 수 없는 요소였다. 6사단은 압록강에 선착한 부대로 용맹을 과시했지만, 그 직후 산맥 속에 도사린 중공군의 포위에 걸려 잔혹한 패배에 직면한 경험이 있었다. 그런 경험이 있는 부대는 생명줄을 놓을 깊은 위기에 빠졌던 당시의 두려움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경우가 많다. 전쟁이 불붙고 있던 당시의 환경에서 그를 다 감안할 수는 없더라도, 그런 두려움은 적잖게 6사단 장병의 마음속에 남아 있었을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중공군 공세가 펼쳐 지려던 무렵의 일기(日氣)는 좋지 않았다. 구름이 잔뜩 끼었으며 눈을 가리는 안개가 광주산맥 주변의 여러 산지를 덮었다고 했다. 산불도 잦았다고 했다. 높은 산지라 건조한 기운이 번져 일어나는 산불이었다고 했다. 운무(雲霧)에 화재로 인한 연기도 겹쳐 아군의 시야(視野)는 흐릿했다는 얘기다. 몸을 감추고 은밀하게 산악과 계곡을 넘어 드는 중공군에게는 유리한 날씨였다. 구름과 안개, 연기로 인해 아군의 공중 정찰로는 중공군의 이동을 볼 수 없었던 상황이었던 셈이다. 그럴 경우 중공군이 갖추지 못한 미군의 공군력도 제한적으로 펼쳐질 수밖에 없었다. 여러모로 중공군에게는 유리한 작전 환경이었다.

<정리=유광종, 도서출판 ‘책밭’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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